“세계적인 초우량기업 누가 키웠나”

‘삼성전자는 창업주의 강력한 리더십과 한국 특유의 기업지배구조 밑받침으로 성장’ 주장

1983년 2월 도쿄 오쿠라호텔에 체류 중이던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은 한국 산업사의 큰 획을 긋는 중대 결정을 내린다. 이른바 ‘동경 구상’이라고 불리는 이 결정은 삼성그룹이 반도체산업에 진출한다는 것.당시로서는 모험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막대한 투자재원 조달, 선진국과의 극심한 기술격차, 불투명한 시장전망, 특수설비의 공장건설 등 모든 것이 난제였다.그러나 84년 6월 경기도 기흥공장에서 64K D램을 첫 생산하기 시작한 삼성전자는 딱 20년 만에 세계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기업으로 성장했다. 당시 한낱 야산에 불과했던 기흥도 세계 반도체기술의 요람으로 변신했다.세계 최대 조선업체인 현대중공업도 유사한 탄생배경을 갖고 있다. 울산에 조선소 부지만 확보한 채 외국에서 선박을 수주한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은 특유의 배짱과 뚝심으로 조선소 건설과 주문받은 선박제조를 동시에 진행시켜 가며 현대중공업을 창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값싼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한 근로자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의 덕도 크지만, 삼성전자와 같은 초우량기업의 성장배경에는 창업주의 강력한 리더십과 한국 특유의 기업지배구조가 있었다는 점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는 평가다.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김희천 교수는 “경제개발 초기 기업집단은 창업자의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의사결정의 집중화는 자본, 인력 등 희소한 경영자원의 계열사간 공유를 가능하게 해 기업집단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새로운 전략산업 진출시에도 기업집단은 축적된 자본과 인적자원을 활용함으로써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필요한 자본은 다른 계열사로부터의 상호출자 형태로 조달했고, 운영자금도 이들로부터 다양한 방법을 통해 지원받았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박사도 “우리나라에서 반도체, 자동차, 중공업 등 전략산업이 단기간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룹경영의 순기능이 발휘됐기 때문이다. 단일 기업의 경우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커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룹경영체제에서는 내부의 여유자금과 우수한 내부인력을 동원, 고위험 사업도 성장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인터뷰 참조)그러나 자본시장, 노동시장, 제품시장이 발전함에 따라 재벌식 기업지배구조가 계열사 내 초우량기업의 발전을 오히려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에 부딪치고 있다.김교수는 “그룹 본사가 모든 계열사에게 적합한 전략방향과 사업모형을 제시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또한 기업집단 내 동질성을 강조하는 문화도 계열사별로 사업의 성격에 맞는 전략과 사업모형을 추구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지적했다.최근에는 국내 초우량기업들이 그룹에서 분리되면 주가가 훨씬 더 뛸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그러나 이에 대해 황박사는 “주가는 경영성과와 경영성과에 대한 전망을 반영하는 것이며, 기업지배구조는 경영성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요인 중의 일부분일 뿐이다”며 주가와 기업지배구조는 연관성이 없음을 강조했다. 황박사는 특히 “지금과 같이 기술과 주력상품의 라이프사이클이 짧은 시대에서는 신속 과감한 의사결정이 중장기적인 경영성과를 좌우하는 중요 요인이다”며 그룹경영체제의 장점을 설명했다.IMF 외환위기 이후 재벌들의 기업지배구조 관련 제도가 크게 개편되거나 보강되고 있는 추세다. 이에 따라 각 그룹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조직 형태와 내부지배구조를 모색 중이다. 이미 LG그룹은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했고,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도요타처럼 수직계열화 전문그룹으로 새로이 출범했다. SK그룹은 공식적으로 구조조정본부를 해체하고, 브랜드와 이미지를 공유하는 느슨한 연계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현재의 그룹체제를 유지하는 기업집단의 경우에도 각 계열사들은 이사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경영체제가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한국 특유의 기업지배구조하에서 성장한 국내 우량기업들이 새로운 기업환경에 대한 적응과 함께 새로운 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이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주목된다.INTERVIEW 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박사“재벌식 기업지배구조 순기능 있다”만약 삼성전자가 그룹에서 분리된다면.삼성전자가 성공하기까지는 그룹 내 계열사의 지원과 희생이 있었던 만큼 삼성전자가 그룹 차원의 전략하에 신규 유망산업 발굴에 나서고, 미래를 위해 또 다른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주주들은 단기적인 경영성과를 선호하고 투자자금의 단기 회수를 선호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그룹에서 분리되면 주가 상승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룹 차원의 장기 모험투자가 줄어들어 장기적인 효율성과 역동성이 지나치게 감소할 위험이 있습니다.인텔, 도요타 같은 기업은 한국식 기업지배구조가 아닌데.시장, 기술, 자본이 풍부한 경제체제하에서는 인텔이나 도요타처럼 처음부터 한 분야에 특화, 출발한 기업도 다국적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처럼 시장도 작고, 자본이 열악한 경제권에서는 정부의 독점권 보장과 막대한 혈세 지출 등이 없이 전문기업이 다국적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매우 어려운 현실입니다. 우리의 주어진 여건에서 삼성전자와 현대차는 그룹경영의 순기능 때문에 우량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각 나라의 처한 상황이 다른 만큼 기업의 성장과정과 성공요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재벌식 기업지배구조의 순기능은.그룹 사령탑을 중심으로 신속 과감한 의사결정이 가능하고, 계열사의 여유자금을 동원, 새로운 유망산업에 전략적인 집중이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룹 사령탑에는 계열사들의 경영상태와 사업전망에 대해 시장보다 빠르고 정확한 정보를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대규모 신규사업 진출시 성공확률도 그만큼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후발 개도국 중 한국식 기업지배구조를 가진 나라는 있는지.우리는 흔히 미국식 기업형태와 지배구조를 글로벌스탠더드라고 말하지만, 전세계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국형 모델을 예외적인 현상으로 보는 외국 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기업집단 형태의 기업조직이 더 많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흔히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재벌식 기업집단은 한국에만 있는 현상이라고 얘기하지만, 후발 개발도상국인 인도에서부터 캐나다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돼 있는 기업형태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조직형태보다는 해당기업에 대한 시장규율 기능에서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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