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권에 그 '경제요리사'

「경제정책의 주도권이 청와대에서 내각으로 돌아올까」. 지난해말개각으로 구본영 전과기처차관이 대통령 경제수석에 임명되면서 과천 관가에 떠돌고 있는 말이다. 구수석은 박재윤·한이헌 전수석과는 달리 김영삼 정부의 「지분」을 갖고 있지 않다.게다가 「온건합리주의자」로 알려져 있어 내각에 미치는 영향력이줄어들 것이란 분석이다. 구수석 자신도 취임초 『내각이 소신있게일할 수 있도록 하는게 경제수석의 본분』이며 『비서실에서 내각에 정책방향을 직접 지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혀 이같은「희망」을 부추겼다.◆ 3·4공때는 내각, 5·6공때는 청와대가 주도과천 관가에서 경제정책의 주도권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지난 30여년간의 주도권 변천사를 살펴보면 금세 이해할 수있다. 경제정책 주도권은 각 정권의 특성에 따라 내각과 청와대 비서실을 오갔다.60~70년대에는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내각에 경제정책의 주도권이 있었으나 80~90년대에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옮겨 갔다.60년대 이전인 이승만 정권에서는 정책주도권이란 말조차 없었다.경제전체를 미국원조에 의존하다 보니 이렇다 할 경제정책이 필요없었고 주도권도 분명하지 않았다. 직제상으로도 경제정책을 주도할만한 조직이 없었다. 경제기획원(EPB)이 경제개발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것이 61년 7월이었다는 사실도 이같은 사정을 잘 보여준다.박정희 대통령시절에는 내각에 주도권이 주어졌다. 박대통령이「5·16」직후 취약한 권력기반을 경제개발로 벌충하기 위해 강력한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면서 EPB에 힘을 몰아준데 따른 것이다.다만 최고회의시절엔 일시적으로 최고의회 경제전문위원이 파워를행사했다. 특히 한국은행 대리출신의 곽상수씨는 당시 부총리였던김유택씨나 송요찬씨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최고회의의 영향력은 「민정이양」과 함께 점차 내각으로 옮겨졌으며 「10·26」까지 내각우위체제는 계속됐다. 박정권전기간은 내각이 경제정책을 요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는 얘기다.60년대 경제정책에 파워를 행사한 사람은 「왕초」 장기영부총리와「쓰루」 김학렬 부총리 그리고 장덕진 재무부 이재국장(재정차관보)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덕진씨의 경우 박대통령과 인척관계인 점이 「강점」으로 작용해 직책에 비해 많은 권력을 누렸다.한국은행이 재무부의 「남대문출장소」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을얻게 된 것도 이때다. 장덕진씨는 경제개발을 위한 내자조달을 극대화하기 위해 예금금리를 대출금리보다 높게 받는 「역금리」체계를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부총리는 박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을 토대로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하면서 경제정책에서 주도권을 잡았다. 박대통령의 정치권력기반이 유신으로 뒷받침돼야 할만큼 약화되고중화학공업 투자와 방위산업육성에 초점이 모아졌던 70년대에는 청와대의 입김이 상대적으로 세졌다. 72년에 전격적으로 실시됐던 「8·3조치」가 대표적인 청와대 작품이다.◆ 정권초기엔 청와대 파워 막강태완선 부총리나 남덕우 재무부장관을 제치고 「8·3조치」를 주도한 인물은 김용환 경제1수석. 과다한 차입금과 높은 금리등제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기업의 경영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이 조치는 정책수단을 갖고 있던 재무부에서 맡지 못하고 청와대가 주도했다. 73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된 중화학공업 및 방위산업정책도 마찬가지다. 이 부문의 핵심 정책결정은내각의 입김이 스며들 여지없이 오원철 경제2수석팀이 「전담」했다.그러나 특정정책을 제외한 일반경제정책은 여전히 부총리를 중심으로 한 내각이 담당했다. 70년대 이후에도 경제정책 주도권은 여전히 내각에 있었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3·4공화국시절 경제정책을 주물렀던 사람들이 대부분 수석시절 보다는 내각때 파워가 강했던 것도 이같은 평가를 뒷받침한다. 「똘똘이」란 별명을 가졌던 김용환 수석도 재무장관으로 내려오면서실권이 강해졌다.그는 5년4개월이라는 전무후무한 최장수 재무장관의 영예를 이룬것으로 유명하다. 남덕우 부총리도 유신전반기는재무장관으로(69년10월~74년9월), 후반기는부총리(74년9월~78년12월)로서 박정권 시절 경제정책의 중심에 있었다.박대통령의 장기집권이 끝나고 5공화국이 들어선 80년대부터 경제정책의 주도권은 청와대로 넘어간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제가정교사」로 경제수석에 오른 고김재익씨가 대표적이다. 김수석은 자율화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며 「보수주의자」로 지목되었던 재무부를 대대적으로 「물갈이」했다. 또 은행민영화와 금리인하정책도 과감하게 추진했다. 랑군 폭탄테러로 인해 「단명」에 그쳤지만그의 경제정책관은 5공화국 내내 기본원칙으로 유지됐다.6공화국 때는 문희갑 김종인으로 이어지는 경제수석이 경제정책의물줄기를 좌우했다. 문수석은 토지공개념과 금융실명제를 강력하게추진했다. 조 순부총리도 이같은 개혁정책을 뒷받침하긴 했으나 주도권은 문수석이 잡고 있었다. 김수석은 금융실명제 실시유보와 경제활성화를 기치로 내걸었던 인물. 그는 「5·8조치」를 중심으로강력한 대재벌정책을 실시했다.6공화국 시절 나웅배-조순-이승윤-최각규로 이어지는 부총리와 이규성-정영의-이용만으로 이어진 재무부장관이 나름대로 독특한 색채를 띠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은 청와대에 있었다.이같은 청와대 주도는 「문민」을 내세운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신경제」의 기치를 내건 박재윤 수석이나「세계화」를 내세운 한이헌 수석 모두 내각이 보기엔 상당히 「강성」이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김영삼 출범의 「창업공신」으로서일정한 지분도 갖고 있어 그들이 갖는 영향력은 훨씬 컸다.문민1기 부총리가 이경식-정재석-홍재형으로 이어지는 「연성」이었다는 점에서 「조화」를 이뤘다는 역설을 가능케 했다.지난 30여년간 경제정책 주도권 변화는 정권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박대통령 시절엔 「튼튼한」 권력기반을 바탕으로 내각을 중심으로 한 우위구조가 정착됐으나5·6공화국에서는 취약한 권력기반을 수석을 중심으로 「개혁드라이브」로 커버하려고 한데 따른 것이란 얘기다. 이는 경제팀의 임기에서도 나타난다. 박대통령 시절 부총리 평균재임기간은 2년5개월이었던데 비해 80년대 이후엔 1년남짓으로 줄어들었다.반면 80년대 이후 경제수석 임기는 1.7년이었다. 별다른 목소리를내지 못하고 단명에 끝났던 박영철 박 승 이진설 수석을 제외할 경우엔 2.5년으로 길어진다. 수석에 비해 부총리가 자신의 「색깔」을 주장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었던 셈이다.◆ 구본영 수석임명으로 내각우위 전환 될듯구본영 수석의 등장으로 지난 15년여간 청와대가 잡고 있던 주도권이 내각으로 옮겨질 가능성이 생겼다.부총리에 과거 상공 재무 경제기획원 장관을 모두 거친 나웅배씨가임명된데다 상공장관에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는 박재윤 전수석이 차지하고 있어서이다.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발탁된 이석채 전재경원차관과 건설교통부장관에 임명된 추경석 전국세청장도 현정부에선 상당한 「입지」를 확보하고 있어 내각의 목소리는 어느때보다 강할 것이란 분석이다. 게다가 이번 경제팀은 오는 4월 총선을앞둔 「과도체제」 성격을 갖고 있다. 새로운 비전이나 정책방향을제시하는 것보다는 「표」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정책개발이 더중요하다. 내각의 주도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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