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부가가가치 낳는 황금시장

유럽에 본사를 두고 있는 프랑스계의 세계적 디자인 전문업체 데그립 고베 어소시에이츠사는 94년 1백67억7천만원의 매출을 올렸다.매출 절대액만 놓고 보면 이렇다하게 주목할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 10위권인 이 회사의 순이익은 놀랍게도 총 매출액의 80%가 넘는 1백34억6천만원이나 된다.이탈리아 아르떼미데사가 만든 탁상 또는 거실 조명기구는 아무리싸다 해도 2백~3백달러 정도는 줘야한다.고가품은 수천달러까지 호가한다. 값이 비싼 고급 제품이니만큼 장식이 요란하거나 특수한 재질 또는 전구를 사용했으리라 추측할 법도하다. 하지만 전구는 필립스사 등에서 3달러 안팎을 주고 납품받은 평범한 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재료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작품성 높은 디자인에 따른 지적 재산의 부가가치다.◆ ‘부도란 없다’ 순풍 타는 디자인 전문회사일본 SONY사의 기술자들은 디자이너가 제시하는 허무맹랑한 발상을제품으로 만들기위해 수없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그러나 창조적아이디어를 절대시하는 SONY사의 분위기는 워크맨을 개발함으로써한 시대를 풍미하는 전혀 새로운 문화를 형성했다.지난 60년대 일본에서는 산업 디자이너들의 자살 사건이 이따금씩신문지상에 보도되곤했다. 산업 디자인에 승부를 건 기업들로부터창조성 높은 제품을 만들어달라는 주문을 견디지 못해서였다.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강박관념과 부담이 디자이너들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것이다.이러한 사례는 대표적 지적산업 가운데 하나인 디자인이 얼마나 큰부가가치를 낳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아울러 그 부가가치의 뿌리는 바로 창의적 아이디어, 남과 다른 발상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디자인이 탁월한 상품의 가격은 그 상품이 지닌 기본적 기능, 즉사용가치를 훨씬 뛰어넘는다. 세계 유명기업들은 대부분 「소비자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된다」는 마케팅 철학을 확고히 하고 있다.덴마크 뱅 앤드 올룹센사의 오디오 제품은 같은 기능급의 타사 제품보다 훨씬 비싸다. 설사 기능에는 별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갖고 싶은 욕망을 절로 일어나게 만드는 우아한 외관」때문에 2배,3배 더 비싼 가격에도 팔려나가고 있다.비단 기업의 입장이 아닌 소비자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디자인의 위력은 막강하다. 오늘날 옷에서부터 주거공간, 각종 생활용품, 운송수단, 거리 등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만든 물품치고 디자인과 관계를 맺지않는 대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그 인공물이 전문 디자이너의 손길을 거친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 이용자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사뭇 다르다. 깔끔하고 세련된 색채로 단장된 기획도시에서의 생활과, 마구잡이식으로 정비되지 않은 곳에서의 일상은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바야흐로 산업 디자인이 사실상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강력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우리나라에서도 디자인 산업이 갖는 중요성이나 그 개발의 절실함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공감대가 형성되어왔다. 특히 최근 몇 년전부터 (디자인 업계에서는 88올림픽을 계기로 전기가 마련됐고90년대 초반부터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확산되기 시작했다고 보고있다) 정부나 기업 학계 언론계 모두 디자인 산업의 육성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면서부터는 관련 인력이나 조직, 제도, 정부 지원,일반인의 인식 제고 등의 측면에서 눈부신 진전이 있었다.정부로부터 공인을 받은 전문 디자인 회사가 92년 2개소에서 95년현재 63개로 대폭 증가했고, 그런대로 규모를 갖춘 디자인 업체는6백여개에 이르고 있다. 디자이너직에 대한 인기 때문인지 관련 학과 지원자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학, 산업대학, 전문대학을 포함해 한해 3만명 가까운 디자인 전공자가 배출되고 있으며 사설 디자인 학원까지 포함하면 이 숫자는 더욱 늘어난다.한국 산업디자인 포장개발원에 따르면 최근 3~4년간 디자인 수요는30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 중소기업의 부도가 사회문제화할 정도로 심각하지만 대부분 영세업체인 디자인 전문회사가 부도를 낸 경우는 단 한건도 없다. 그만큼 디자인 사업이 순풍을 탔다는 증거다.◆ 외국상품과의 차별화 전략 시급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우리의 디자인 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다는 조심스런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하지만 양적 팽창과는 달리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직도 수많은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우리 디자인 업계의 현주소이기도 하다.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크게 지적되고 있는 것이 바로 창의력에 관한 부분이다.서울대 김민수 교수는 『산업 디자인에 대한 계몽의 시대는 일단지나갔다고 본다』면서 『지금은 다른 회사 제품이나 외국 상품과의 차별화를 위해 어떻게 독창성을 창출할 것이냐가 논의되어야할시점』이라고 말했다.그는 한국 디자인계에서는 그동안 외국에서 만들어 놓은 것과 비슷한 「유사디자인」 제품을 생산하는데 머물러있었다면서, 예컨대「이것도 TV라고 하자」는 식의 통념을 뒤바꾸는 제품은 내놓지 못했다고 한다. 문이 하늘쪽으로 치켜올려지는 자동차, 헬멧 모양의TV, 교각을 유리잔 처럼 만들어 조심성을 일깨워주는 다리, 포도주빛깔의 냉장고….새로운 개념의 상품을 내놓는 것은 물론 디자이너의 몫이다. 그러나 창의력은 디자이너들의 천부적 감성과 교육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뛰어난 발상을 제품화하는 데에는 주변의협조와 지원이 필수적이다.◆ 경영자의 디자이너 신뢰가 열쇠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다. 또 기업 경영자는 디자이너를 신뢰하지 않으면 안된다. 디자이너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고충 가운데 하나는 경영자가 디자이너에게 일을 맡기면서도 결국에 가서는색상이나 형태에 대해 자기나름의 복안을 관철시키는 사례도 적지않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디자이너들은 차라리 컨셉트 단계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착수하는 게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아울러 현 미술교육 체계와 디자이너의 의식에도 대폭적인 수술이가해져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산업 디자이너는 화랑에서 자신의미적 세계를 보여주는 예술인이 아니라 생활과 밀착된 제품을 만드는 기능인이다.앞으로는 감성적 상품, 개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주는 상품이 더욱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기술만으로는 대처가 안되는 분야다.역시 디자이너의 감각성 발휘가 열쇠라는 얘기로 귀결된다.고무적인 것은, 창의적 소양이 상당하다고 디자이너들 스스로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디자이너뿐 아니라 문화평론가들을통해서도 어느 정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또 포장을 전문으로하는한 전문 디자이너는 『인문계나 자연계로 갈 수 있는 실력을 지닌학생들중 10% 가량이 미술대로 진학하고 있다는 얘기를 교수들로부터 듣는다』면서 『과거 「공부 못하는」 예능계라는 인식도 이제상당부분 수정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상당수의 디자이너들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삼아왔던 부분, 즉 어학을 비롯한 일반적 지력에서도 진일보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있다.이제 주변 여건이 좀더 조성되고 디자이너들이 크리에이티브한 역량을 살려나간다면 한국의 산업 디자인 수준은 크게 진보할 것이라는게 관계 전문가들의 자체 진단이다.★ '디자인=그림' 인식 버려야모 제과업체의 디자인실은 불과 6년 전만하더라도「도안실」간판을달고 있었다. 디자인에 대한 중요성과 개념이 아직 광범하게 전파되지 않았던 터라 그저 포장 용지에 그림과 글씨를 집어넣는 것이산업 디자인과 졸업생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6년이 지난 지금 디자인을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작업으로 인식하는 기업은 거의 없지만 디자이너들에게는 넘어야 할 고비가 아직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디자인에 대해 기업 경영인들이 갖고 있는 인식은 때로 상호 모순적이다. 제품의 기술과 마케팅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심을 쏟으면서도 정작 소비자들의 눈길을 머물게 하는 외관에 대해서는 「부차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형편이 되면 디자인에 좀 신경을 쓰지만,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의 비용으로 외관을 마감하려한다. 이경우 디자인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 상식·전문성 두루 갖춘 제너럴리스트 돼야반면 어떤 상황에서는 디자인이 도깨비방망이가 된다. 시장상황이나 소비자 분석, 색상, 소재, 표면 스타일 등의 상세한 자료 조사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디자이너들이 뭔가 히트 칠 제품을 만들어내길 기대한다.디자이너들이 생산자의 의도와 소비자의 경향을 읽어내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제대로 된 기획서 한 장 없는 상태에서는 결코 만족스러운 디자인이 나올 수 없다. 이 경우디자인은 만능해결사가 된다.두가지 케이스 모두 바람직하지 않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경력10년이 넘은 한 중견 디자이너는 『특히 후자 같은 상황에서는 급조, 날조, 모방적 디자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잘되면 기획이나 마케팅이 좋았기 때문이고 못되면 디자인 탓으로 돌려지는 풍토는 디자인 산업의 발전을 저해할 따름』이라고 강조한다.훌륭한 디자인이 상품으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예술과 마케팅의 3 박자가 고루 갖춰져야 한다. 기술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디자인은 개념에 머무를 뿐이며 예술성이 없으면 디자인으로 인한 부가가치를 포기해야한다. 또 하나, 시장상황을 정확히 꿰뚫는 영업기획력이 가세해야한다.월간 편집부장 박인석씨는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그에 맞춘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디자이너의 역할』이라면서 『이런점에서 볼 때 디자인은 바로 혁신을이뤄내는 과정』이라고 규정한다.박 부장은 그러기 위해서 디자이너들은 상식과 전문성을 두루 갖춘제너럴리스트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과거에는 디자인이 기술을 마무리해주는 역할에 그쳤으나 지금은디자인이 기술과 동시적, 또는 기술을 선도하는 추세에 있다. 이와함께 디자인은 문화와 라이프 스타일을 창출하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예를 들어 요즘의 주전자에는 대부분 휘슬(whistle) 이 부착되어있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주방용품 기업인 알레시사가 「물이 끓으면 증기 기관차 소리가 나도록 한 스테인리스 주전자」를 만든 이후에 보편화된 것이다. 소리가 나는 주전자는 80년대의 주된 문화상품으로서 큰 성공을 거둔 사례라고 서울대 김민수 교수는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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