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라운드 시대의 '벌거숭이'

서태지와 아이들과 룰라 김건모는 국내 가요계를 이끄는 3대 신세대 가수였다. 「였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이중 서태지와 아이들과 룰라가 얼마전에 침몰했기 때문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메창조의 고통이 힘들었기?때문에 은퇴했고 룰라는표절시비에 걸려 거의 「매장」당하다시피했다. 겉으로 나타난 침몰 이유는 다르지만 근본적인 배경은 같다. 「모방」시비 때문이다. 창조의 고통과 모방의 편리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우리 가요계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국내 산업디자인계도 까딱 잘못하면 전체적으로 침몰할 위기에 처했다. 디자인을 무역제재의 수단으로 삼는 디자인라운드(DesignRound)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됐기 때문이다. 디자인라운드가 국내산업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것은 자명하다.국내 기업의 경우 자체 개발한 디자인은 20%에 불과하고 나머지80%는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방식의 납품수준이거나 모방에 의한것이다. 창조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90년대 들어 거세지고 있는디자인라운드는 이미 곳곳에서 무역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해2월 대한방직이 미국 직물생산공급자협회(TPSA)와 코빙톤사로부터자사의 직물디자인을 도용했다는 혐의로 피소당했는가 하면 로만손시계가 중국의 바이어와 상표등록 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르기도했다. 이 뿐이 아니다.당장 미국이나 EU(유럽연합) 등이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의 디자인에 대해 모방이라고 몰아붙인다면 국내 업계의 대응이 수월치 않은게 현실이다. 마이 펠립 국제산업디자인단체협회장이나 우베 반센 유럽아트센터 대표 등 해외 디자인전문가들도 「국경없는 경제전쟁」시대에는 디자인분쟁이 국제무역의 중요한 이슈로 떠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전문가들은 산업디자인이 기술개발에 비해 10%의 투자액과 30%의소요기간만으로도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것과 같은 수익을 낼수 있다고 지적한다. 기술개발에 비해 효과적인 투자인 셈이다.기술적으로 우수한 우리 제품들이 제값을 받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낙후된 디자인 때문이다.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KIDP) 이 설문조사한 결과 국내 소비자의 60%이상이 ?디자인이 좋아 외국제품을 구입했다?고 대답했다. 1백억달러에 달하는 우리나라의 무역적자가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보여주는 수치다.◆ 각기업, 고유디자인 개발에 박차이처럼 산업디자인이 경쟁력의 핵으로 떠오르자 국내 기업들도 산업디자인 개발을 위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대우자동차는 94년에영국 런던의 아이에이지그룹 산하의 자동차엔지니어링업체인 워딩기술센터의 인력 3백명과 설비를 통째로 인수했다.현재 인력이 7백50여명으로 불어난 이곳에서는 전세계에 판매할 대우자동차의 모델을 디자인하고 있다. LG전자도 유럽과 일본에 디자인연구소를 두고 현지에 맞는 디자인 개발에 힘쓰고 있다.대부분의 대기업들은 디자인 선진국에 현지 디자인연구소를 두거나국내에 외국 디자이너들을 데려와 공동으로 디자인 개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에서 기초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자니 시간도 모자라고 인력도 없어 아예 바깥에서 통째 데려와 쓴다는 것이다.기업들이 이처럼 외국인 디자이너를 중시하는 이유는 「현지화」때문이다.수출상품은 수출하는 지역의 현지감각에 맞게 디자인하겠다는 의도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유럽에 판매하는 디자인은 유럽식으로, 미국에 파는 제품은 미국식으로, 일본에 파는 제품은 일본식으로 이렇게 디자인하다보니 우리 고유의 디자인없이늘 선진국의 디자인을 좇아가게만 된다는 지적이다. 서구에서는 오히려 동양적인 미를 디자인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활발한데 우리는우리 것을 버린채 남의 것만 따라한다는 비판인 셈이다.삼성그룹은 이런 지적에 수긍, 디자인의 「현지화」를 넘어서 삼성고유의 디자인을 개발하겠다고 나섰다. 삼성그룹의 이건희회장이올해를 「디자인 원년」으로 선언하고 디자인 전문인력 양성을 전담할 「삼성디자인연구원(IDS)」을 개원한 것도 한국적인 미를 가미한 삼성 특유의 디자인을 창조하기 위해서다.서울 논현동에 전용면적 1천4백평 규모로 설립된 이 연구원은 산하에 디자인 교육 및 연구센터를 설립, 오는 97년까지 약 2백명의 전문인력을 포함한 2천명의 디자인 인력을 양성하게 된다. 한 해 운영비만도 1백억원에 이른다. 외국 현지 디자인 센터와 외국인 디자이너의 단점을 넘어서보자고 만든 삼성의 디자인 특공대인 셈이다.우리 디자인에 한국적인 미가 없다는 지적은 대부분의 국내 기업에해당되는 말이다. 「모방」을 극복하고 선진국의 디자인을 따라잡기 위해 외국 디자이너에 의존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는 우리만의독특한 디자인을 개발해야 할 때라는 자각인 셈이다.◆ 장인정신 지닌 디자인 네트워크 구성돼야외국 디자이너를 데려오고 디자인에 대한 투자를 늘릴 수 있는 대기업은 그나마 행복한 편이다. 문제는 중소기업이다.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KIDP)에서 중소기업에 디자인 지도를 담당하는 오국영기업지도2부장은 『중소기업이 디자인실을 따로 설치한다는 것은 경비상 도저히 불가능하고 효과도 없다』고 말한다.디자이너 한두명을 데리고 있다고 해서 디자인이 획기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본부장은 중소기업이 직접 디자인을개발하는 것보다 전문 디자인회사를 육성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중소업체가 마음놓고 디자인 개발을 의뢰할 수 있는 디자인 전문회사 네트워크가 구성돼야 한다는 것이다.예부터 우리 민족의 장인정신은 유명했다. 모방에 급급했다가 뒤늦게나마 디자인에 눈을 돌려 투자를 늘리는 국내 기업의 「장인정신」이 빛을 발할지 지켜볼 때다.★ 인터뷰 / 문창호 태평양화장품 디자인연구센터 수석디자이너『디자인 부문에서 국내 기업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점은 전문인력의 부족입니다.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커리큘럼으로는 선진국의디자인 수준을 좇아가기 힘들고 기업이 재교육하기에는 너무 많은시간과 비용이 듭니다.』태평양화장품 디자인연구센터의 수석디자이너 문창호씨(46)는 국제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디자인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수준 높은디자인 교육을 담당할 전문기관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디자인 분야가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발전하다 보니 대학이나 기업체의 사내 교육만으로는 선진국의 디자이너와 경쟁할만한 전문인력을 양성하기에 역부족인 면이 많아졌기 때문이다.문씨는 『전문인력도 분야별로 세분화해서 육성해야 한다』고 밝힌다. 일본에는 한평생 종이 포장용기만을 만들어온 종이패키지 전문가가 있듯이 우리도 각 분야별로 전문가를 키우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용기 하나를 제작하더라도 로고를 만드는 전문가와 무늬를 새겨 넣는 전문가, 용기의 형태을 잡는 형상 전문가 등으로전문 분야가 구체적으로 나뉘어져야 한다는 주장이다.문씨는 분야별로 디자인 전문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어학능력과 마케팅에 대한 식견도 디자이너의 필수적인 자질이 되고 있다고 강조한다.『어학능력은 미국이나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의 최신 디자인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기본적인 역량입니다. 마케팅에 대한 이해는 팔리는 디자인을 창조하기 위해서 필수적이죠.』소비자의 기호가 빠르게 변하다 보니 시장동향에 관심을 쏟지 않고서는 세련된 디자인을 창조해낼 수 없다는 설명이다. 문씨는 『이전에는 디자인할 때 생산성을 가장 많이 고려했으나 최근에는 소비자의 취향을 먼저 생각하게 됐다』고 덧붙인다. 수요는 한정돼 있고 공급은 넘치다 보니 원가개념이나 생산성을 중시하는 생산자 중심의 디자인은 힘을 잃고 미적인 면과 개성 편리성 등을 강조하는소비자 위주의 디자인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국내 산업디자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업체의 노력과 투자가 우선돼야 하겠지만 디자인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도 변해야 한다. 문씨는 『우리나라의 디자인은 서구화하고 있는데 비해 미국이나 프랑스 등 서구의 디자인은 오히려 동양적으로 변하고 있는 추세』라며 한국적인 미를 무조건 촌스럽게 여기는 풍토 자체가 바뀌어야한다고 역설한다.문씨는 홍익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한 후 75년에 태평양화장품에입사, 화장품 디자인에만 26년간 종사해왔다. 문씨는 『디자인 선진국에서는 피에르가르댕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유명 디자이너의이름을 상품화하고 있다』며 『우리 디자인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위해서는 세계적으로 상품화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우선 육성해야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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