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급정년ㆍ연봉ㆍ명예퇴직제 급속확산

지난 2월1일 오전7시. 태평로에 위치한 삼성물산 사무실에서 월례조회가 열렸다. 사원들은 각자 사무실에 설치된 사내방송을 통해사장의 조회사에 귀를 기울였다. 화면에 등장한 사장은 조용히 원고를 읽어나갔다. 사원들은 조회사를 듣자 얼굴표정이 달라졌다.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흘러나온 언어가 모국어인 한글이 아니라영어였기 때문이다.최근 기업에서는 「영어열풍」이 거세게 일고있다. 기업들이 임직원회의를 영어로 진행하거나 업무보고 문서작성 등을 영어화하고있다. 현대그룹은 올해부터 토익시험대상자를 부사장까지 확대했으며, 삼성그룹도 외국어성적이 일정수준에 못미치는 임직원들에 대해 승진은 물론 호봉승급에서도 불이익을 주기로 했다.LG그룹은 지난 2월 그룹경영세미나를 영어로만 진행하기도 했다.다른 기업들과 수출입은행등 금융기관에서도 영어모의이사회를 여는 등 영어의 생활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모두 영어능력을 승진에 반영하고 있다. 이제 영어를 못하면 직장생활도 어렵게 됐다.◆ 2단계 승진·30대임원 40대 사장 탄생이같은 영어열풍은 3년째를 맞고있는 신경영을 실천하기 위한 대표적인 움직임중 하나다. 기업들은 신경영의 실천방안으로 내외적으로는 「세계화」를, 대내적으로는 「슬림화」를 구호로 내세우고있다.예전의 경영이 실적위주의 양(量)경영이었다면 신경영은 생산성향상을 겨냥한 질(質)경영이랄 수 있다. 따라서 질경영은 생산성향상의 주역인 화이트칼라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그만큼 화이트칼라의 위기감이 팽배한 요즘이다.기업들은 세계화의 실천방안으로 다양한 연수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교육은 물론 컴퓨터 인터넷 마케팅 등 각종 연수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그 대상도 기존의 사원중심에서 임원들을 비롯한 사장단에 이르기까지 확대되고 있다.삼성은 93년부터 최고경영자교육제도를 도입, 매기마다 11개월간의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현대도 올해부터 종전의 1박2일간의 경영전략세미나 정도에 그쳤던 경영자연수를 대폭 강화, 8개월간 외국어컴퓨터 해외연수 등으로 짜여진 학습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LG그룹도 지난 94년부터 매년 임원의 5%를 선발,1년과정의 연수를실시하고 있다.물론 연수나 교육에서 뒤처지면 승진서 탈락한다. 탈락이 계속되면퇴직으로 곧바로 이어진다. 다행히 탈락하지 않더라도 동료들과 무한경쟁을 벌여야 한다. 모든 교육과 연수과정이 스트레스로 작용할수밖에 없다.기업들이 1인당 노동생산성 향상을 위해 추진하는 또다른 조치는「슬림화」다. 작은 조직과 적은 인원으로 기존내지 그 이상의 업무를 수행해야 생산성이 제고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는 자리와인원의 삭감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화이트칼라의 위기를 부채질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셈이다.조직슬림화는 우선 「팀제」도입에 의한 조직개편에서 구체화되고있다. 대우전자는 지난해말 전부서의 과·부제를 전면 폐지하고 팀제로 일대 조직수술을 단행했다. 팀제는 관리 기획 영업등에서 생산현장에 이르기까지 전부문에 걸쳐 도입됐다.현대자동차는 올해부터 기존 1백70부 6백50과를 4백여팀으로 전면개편,운영키로 했다. 포항제철 역시 지난해부터 도입한 팀제를 더욱 확대, 9본부 31부를 29부로 슬림화하기로 했다. 자동차 철강 전자등 국내를 대표하는 제조업에서도 전통적인 부·과장체제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팀제란 조직을 단순화해 의사결정단계를 축소함으로써 외부환경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사원-대리-과장-부장-임원으로 이어지는 기존조직의 의사결정단계를 팀원-팀장-본부장으로 축소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 부·과장중에 팀장을 맡지 못하는 인원이 절반가량 되면서 자연적으로 도태되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현장중시」도 최근 대기업그룹들의 조직개편에서 보여지는 또다른 흐름의 하나다. 현대자동차는 관리직 여직원 50여명을 영업부서로 전진배치했다. 효율적인 인원재배치와 함께 불필요한 관리조직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인원삭감효과를 노린 조치랄 수 있다.슬림화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역시 「신인사제」다. 불과2,3년 전만해도 일부 기업에서 실험적으로 시작된 발탁인사나 연봉제같은 신인사제도가 거의 전직장으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신인사제도는 확산속도가 아주 빠르게 진행되면서 연공서열에 익숙한 한국의 직장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있다.대기업들이 최근에 단행한 임원인사는 인사혁명의 바람이 얼마나거센지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초특급 발탁인사인 2단계 승진도 여러 기업에서 이루어졌다.지난 70년대 경제개발기에나 볼 수 있었던 「30대임원 40대사장」이 탄생했다. 한국기업에서 임원의 조건은 연공서열이 아닌 「능력」과 「실적」임을 분명하게 제시해주는 인사였다. 연공서열 온정주의가 사라지고 차가운 경쟁의 룰이 기업의 인사 기조로 대체된셈이다.◆ 상사고과제 등 신인사로 스트레스 쌓여능력과 실적에 걸맞게 대접하는 「연봉제」는 무한경쟁을 유도하는신인사제도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사실 이번 인사혁명의 바람은발탁인사로 요란하게 다가왔지만 연봉제는 2~3년 사이에 서서히 기업들 사이에 번져나가면서 「인사파괴」의 징후를 예고했다고 볼수도 있다.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는 기업은 두산그룹 미원그룹 한화그룹 럭키화재 삼성물산 세풍전자 일진 한보철강 오리온전기 제일기획등 무수히 많다.물론 기업별로 연봉제의 범위를 임원들로 한정하느냐, 아니면 일반직원들까지 포함하느냐에 따라 그 강도가 차이가 나지만 대기업 그룹이라면 거의 예외없이 연봉제 또는 전단계인 능력급제를 표방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한국경제연구원이 종업원 1백명이상인 2백40개업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결과 응답기업의 6.6%가 연봉제 도입을 결정했다고밝혔다. 또 5년안에 연봉제를 도입할 예정이라고 밝힌 기업도 전체의 70.3%를 차지했다. 연봉제가 국내 기업간에 빠른 속도로 확산될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상사고과제」도 화이트칼라에 스트레스를 주는 신인사제도 가운데 하나다. 부하직원이 상급자를 평가하는 이 제도는 동료에 의한동료고과와 자기평가결과와 함께 고과자에게 전달된다.국내에서는 동양그룹 계열 정보통신회사인 동양SHL이 지난92년에처음으로 도입했다. 이어 금호그룹과 두산그룹의 일부계열사 ,LG경제연구원 인켈 등이 채택하는 등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이제 간부직원들은 상사에게는 물론 동료 부하직원들의 눈치를 한층 많이 살피게 됐다. 갈수록 신경쓸 사항들이 늘어나고 있는 셈이다.한걸음 더 나아가 「직급정년제」와 「명예퇴직제」는 화이트칼라들의 죽음 즉 퇴직위기로 몰아가는 제도로서 하이라이트를 이룬다.직급정년제는 직급내에서 일정기간 승진하지 못하면 자동 퇴직하는제도다.임직원을 막론하고 대부분 직급내 표준연한의 2배를 초과한 직원을퇴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코오롱상사가 지난 94년부터 이제도를도입한 이래 현재는 삼성 LG 한화등 거의 모든 그룹들이 이 제도를도입하고 있다.퇴직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명예퇴직제는 지난 92년부터 활성화되면서 화이트칼라들의 갈등을 부채질하고 있다. 경영합리화와 감량경영을 내세워 실시되고 있는 이 제도는 정년에 임박한 고령자 위주에서 벗어나 점차 하위직으로까지 적용되고 있다.외국계 은행들이 불을 댕기기 시작하면서 대다수 기업들이 경제개발시기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오늘의 기업을 일궈낸 일꾼들을 몇달치의 월급을 얹어주면서 몰아내고 있다. 작년 2월 포항제철은1천4백여명을 일시에 명예퇴직시켜 이목을 집중시켰다. 94년부터한층 활발하게 이제도를 활용(?)하고 있는 금융계는 지난 3년동안무려 2천5백명이상을 명예퇴직이란 이름하에 해고했다.신경영이란 구호 아래 펼치고 있는 각종 제도는 외국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절박한 기업들의 속사정이 깔려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한동안 대세를 이룰 전망이다. 화이트칼라들로서도 살아남기위한 생존전략을 다시한번 재고해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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