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로 밀려나는 화이트 칼라

회사원 김모씨. 점심식사를 마치고 충정로의 회사근처에 있는 A은행에 간다. 출근길에 부인이 부탁한 계좌번호로 돈을 부치고 약간의 용돈을 찾을 생각이다. 그는 지갑속에 들어있는 신용카드 한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한다. A은행의 한쪽 구석을 ATM(현금자동입출금기)이 나란히 차지하고 있는 덕분이다.불과 3∼4년전만해도 은행에 갈 때는 도장과 통장을 챙기는 일이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각종 공과금이나 할부대금은 통장에서 자동이체가 되고 돈을 송금하고 인출하는 일마저 신용카드한 장으로 처리할 수있게 됐다.은행이 자동화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는 도심 곳곳에 무인점포가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은행이 자동화됨으로 인해 편리해진 바가 있지만 창구직원의 미소를 접할 기회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바로 은행의 자동화는 곧 직원들의 실업을 의미한다. 어느정도정확한 반비례관계를 갖는다고 계산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지난3∼4년간 자동화는 은행창구직원을 감소시켰다.자동화로 인한 실업은 비단 은행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사회와기업내에서 보편적으로 진행되고 있어 모든 샐러리맨들이 당면하고있는 위기다. 다만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에서 자동화로 인한실업을 피부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은행·증권회사 실업 피부로 느낄 정도조흥은행 개봉동지점의 한 대리는 『1년반사이에 직원이 34명에서28명으로 줄었다. 대신에 용역사원이 한두명 늘었지만 직원이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느낄 수 있는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앞으로도 은행지점의 직원수가 계속 감소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 지점당 적정인원이 18명이라고 어떤 책에 쓰여있던 일본의한 연구결과를 심각하게 얘기했다.지점을 위협하고 있는 기계로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CD(현금자동지급기)와 ATM이다. 외환은행의 한 관계자는 『작년말까지 약 2천대가 본·지점에 배치된 상태』라고 밝혔다.CD기는 대당 8백만원수준이고 ATM은 3천6백만∼3천8백만원정도다.간단히 창구직원의 연봉을 1천8백만원으로 어림잡아 계산해도 이들기계를 3년정도 사용한 다음부터는 대략 인건비절감에 들어갈 수있는 셈이다. 기계를 보수 유지할 비용이 들어간다는 점을 감안해도 결과는 엇비슷하다.외환은행의 관계자는 『CD기는 하루에 50여건, ATM은 1백50건정도를 고객이 이용해야 수지를 맞출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자동화로 인한 인원감축요인이 신설지점 신규업무 등에 흡수됨으로써 가시화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앞으로도 은행직원수가 늘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덧붙였다. 은행지점에서는고객들이 기계를 이용하고 가급적 공과금은 자동이체를 시키도록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연로한 계층에서는 기계이용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지점사람들은 지적한다.자동화로 인해 실업요인이 나타나는 또 다른 대표적인 곳이 증권회사들이다. 증권사에 컴퓨터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대략 80년대중반이라고 한다. 이전까지는 수작업으로 주가지수의 차트를 그리고 커다란 칠판에 분필로 시세표를 고쳐 적었다. 당시만해도 컴퓨터는 직원들의 일감을 덜어주는 「고마운 기계」였다.그러나 90년대들어 붐을 조성하다시피 자동화기계를 도입한 결과현재는 증권사들의 행정업무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전산망으로 연결돼 있다. 잔고조회 수표인식 인감조회 공모주청약 원장대조 등이모두 전산처리됐고 컴퓨터단말기만 두드리면 수십가지의 주가분석차트가 떠오른다.그러나 전산화의 결과는 감원.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고마운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는 「무서운 기계」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국내최대증권사인 대우증권의 관계자는 『아무래도 과거에 기계가했던 업무를 담당했던 여직원들이 유휴인력이 되고 있다. 전산화로인해 한 지점당 2명정도의 인원감축요인이 생겨난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는 대부분 증권사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꾸준한 인력감소세…절반 이하로 줄기도더군다나 최근에는 여직원들이 결혼이후에도 직장생활을 지속하는것이 일반적인 추세가 돼있다. 대우증권에서는 이에 대비해 80년대말부터 사무직 여직원 채용을 피하고 있다.옆건물에 위치한 동서증권도 여직원 채용은 전문직 위주로 이루어진다. 『최근 2년동안 회사의 전체인원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고하지만 이는 지점의 증설과 자연감소(퇴직)되는 인원을 감안할 때전산화로 인해 많은 인원감축요인이 생겨나고 있음을 시사한다.인사부의 한 관계자는 『올10월에는 증권전산에서 탈퇴할 예정인데이렇게 되면 증권전산과 자체전산에 이중으로 투입됐던 전산업무담당자 숫자만큼 당장 인원감축요인이 발생한다』며 『신설되는 지점에 배치하고 신규업무를 개발함으로해서 이들을 흡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금융기관을 벗어나 제조업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비록 겉으로드러나지는 않지만 회사의 발전과정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기계가사람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고기능의 첨단전화기로 두각을 보이고 있는 맥슨전자. 이 회사는88년에 1천6백71억원의 매출과 30억2천만원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했다. 당시의 종업원수는 3천8백45명. 그러나 매출이 2천8백49억원으로 늘어난 94년 현재 종업원수는 1천3백95명으로 절반이하로 감소했다.의류업체인 쌍방울. 90년이후 매출과 순이익은 해마다 증가했지만종업원수는 3천9백여명에서 3천6백명(93년) 3천2백70명(94년)정도로 꾸준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이같은 추이는 제약업체인 유한양행, 화장품 등을 만드는태평양(태평양화학)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삼성물산의 경우 매출규모가 7조9천억원에서 13조3천억원으로 증가하는 동안 종업원수는 단 18명 늘어나는데 그쳤다.부단한 전쟁과 전염병의 창궐로 인한 노동력감소를 중세봉건사회가붕괴하게 된 근본원인이라고 지적한 프랑스의 사학자 마르크 불로흐. 그는 지속적인 노동력감소를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바다밑을 지나는 해류와 같아서 거역하기 힘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우리사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동화로 인한 실업 또한 표면적으로드러나지는 않지만 수면밑을 지나는 해류와 같다. 언제부턴가 우리들 입에 부담없이 오르내리는 리스트럭처링 희망퇴직제 등은 그것이 등장한 밑바탕에 자동화와 실업이란 미묘한 함수관계를 깔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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