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누비며 막바지 표몰이

정몽준 의원 겸 FIFA 부회장 겸 2002년 월드컵 유치위원회 부위원장 겸 대한축구협회장은 요즘 (4월11일 총선 이전) 몸이 열 개라도부족함을 느낀다. 총선을 위해 지역구 선거운동 하랴 월드컵 유치를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해외출장 다녀오랴 그야말로 눈코 뜰새가없다.선거 날짜가 코앞에 닥쳤던 지난 5일에도 미국 메이저리그 프로축구 개막식 참석을 위해 출국을 했다가 8일 오후에 들어왔다. 아벨란제 FIFA회장을 비롯해 세계의 내로라하는 축구계 인사가 집결하기 때문이었다. 개최지 결정일까지는 이들 거물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도 많지 않아 더 머물러있어야 했지만 국내 사정이 급한 까닭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해서는 곧바로 지역구인울산행 국내선편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사실 선거일을 며칠 안남기고 지역구를 비워야하는 안타까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지금까지 숱한 선거를 치러 웬만큼 이골이 났다 싶은 정회장이지만, 투표를 앞두고 느끼는 긴장감의 무게는 경험이 많다고 해서줄어드는게 아니다.아닌게 아니라 선거나 투표에 관한 한 정회장만큼 이력이 붙은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다. 굵직한 것만 들어봐도 우선 80년대 초반 88 올림픽 유치를 위해 부친인 정주영 현대그룹명예회장(당시 대한체육회장)과 함께 IOC 위원들을 상대로 치열한득표활동을 벌인 것을 비롯해, 88년과 92년 국회의원 선거, 93년1월 대한축구협회장 선거 (이때는 상대 후보의 막판 사퇴에 따라만장일치 당선), 94년 FIFA 아시아지역 부회장 선거 등이 눈에 띈다. 게다가 이번에 15대 국회의원 선거를 치렀고 한달여 뒤에는 월드컵 유치 투표가 기다리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아벨란제 은퇴뒤 차기 FIFA 회장 자리도 겨냥하고 있다. 만 45세의 나이에 그만큼 「표밭」을 누비고 다녔고 앞으로도 비슷한 길을 갈 인사는 분명 드물다고 해야할 것이다.그런 점에서 볼 때 정회장이 이번 월드컵 유치 경쟁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직함상의 적합 여부를 떠나 썩잘 된 인선인지도 모른다. 정회장은 대한축구협회장에 취임하면서축구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이나 다름 없지만 마를 길 없는 재력과 40대 초반의 왕성한 체력, 그리고 세계 스포츠계의 선거 풍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 하나 목표에 접근해 나갔다.◆ 월드컵유치 3단계 계획 진행 및 집행위원 설득정회장은 당초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해 1차로 3단계의 계획을 세웠다. 1단계는 93년 10월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통과, 2단계 94년5월의 FIFA 아시아 지역 부회장 당선, 3단계 월드컵 16강 진출이었다. 1단계 계획은 「카타르의 드라마」라는 가슴 짜릿한 상황을 연출하며 성공을 거뒀고, 2단계 역시 「어려울 것」이라는 일반적인예상을 뒤엎고 또 한번의 승리를 안았다. 특히 정회장의 FIFA 부회장 당선 여부는 월드컵 유치의 향방을 결정할 수도 있는 중요한 계기로 간주되었기에 한국으로서는 더욱 고무적이었다. 정회장은 당시 이 선거가 갖고 있는 중요성을 인식해 아시아 32개 FIFA 회원국가운데 북한과 일본 시리아를 뺀 나머지 29개국 전부를 순방하는의지와 열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다만 3단계는 아쉬움이 많은 가운데 한국축구의 수준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정회장은 이러한 단계적 목표와 함께 집행위원 설득용 카드도 설정했다. 크게 △월드컵 한국 개최의 당위성 △합리적 논리 △자격요건 등 3가지였다. 월드컵을 남북한이 공동개최함으로써 한반도의긴장완화 및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바 크다는 것과 월드컵에 3회 연속 본선 진출한 명분과 자격 등을 들어 한국이 월드컵 개최의 적격자임을 납득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를 FIFA 집행위원들에게전파하는 과정에서 각종 선거 경험과 축구협회장 취임 이후 획득한타이틀이 큰 힘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때로는 정주영 명예회장의 덕을 보기도 했다.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월드컵 개최지를 결정하는 집행위원 가운데 모 유력 인사는 정회장이 한 번 만나려고 했으나 시간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정회장은 그 유력인사가 부친과 친분이두텁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의 친서를 휴대한 뒤 다시 시도했다.결과는 당연히 성공이었다. 반드시 그 일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는 최소한 친일표는 아닌 것으로 분류되고 있다.정회장의 구체적 활동 전략으로는 앞서 든 1대1 면담 외에 이른바「인간적 접촉」카드가 있다. FIFA 집행위원쯤되면 대부분 자기 나라에서 행세깨나 하는 유지이기 마련이다. 지식과 정보입수 능력에다 재력까지 갖춘 이들에게는 별다른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자주 만나서 인사하고 사업 근황이나 가족 얘기도 나누면서 친분관계를 두텁게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정회장이 레나르트 요한슨 유럽축구연맹 회장과 연계, 아벨란제 회장의 월드컵개최국 조기결정 움직임을 무산시킨 것도 이러한 친분관계가 없었으면 쉽게 성사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체육계 일부·보좌관 등 주변 관심미흡” 지적도그러나 월드컵 유치를 위해서는 집행위원 개인에 대한 설득작업과병행해 집행위원의 소속 국가에 대해서도 일정한 「성의」를 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최근 1~2년간 한국을 방문했거나 앞으로 방문할 외국 축구팀의 면면에서 이러한 노력의 일단이 발견된다.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필두로 아르헨티나 보카 주니어스팀 초청, 마라도나 공식복귀전(약간의 시차를 두고 메넴 대통령도 함께 초청), 스웨덴팀의 방문이 있었고 오는 5월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 프로축구팀, 이탈리아의 유벤투스, AC밀란 등이 줄을 이어 한국을 찾도록되어있다. 이들 국가 모두 집행위 국가들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브라질은 아벨란제 회장국, 스웨덴은 유럽축구연맹회장국, 독일 슈투트가르트는 구단주가 FIFA 집행위원으로 있으며 이탈리아 역시집행위원국이다.95년 방일전을 가진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그 해가 양국 수교 1백주년이어서 원래 일본만 방문할 계획이었으나 정회장을 비롯한 축구계가 적극 나서서 어렵게 유치했다. 브라질은 아벨란제 회장이 기본 한표를 갖고 있고 유치투표에서 가부 동수가 나올 경우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어 사실상 2표를 갖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리카르도 테이세이라 집행위원 (브라질 축구협회장)이 아벨란제 회장의 사위여서 실질적으로는 「3표 행사국」이라는 해석도 있다. 아벨란제 회장의 지나친 일본 경사에 대해 우려가 없지도 않으나 그렇다고 해서 브라질을 전혀 도외시할 수는 없었던 사정이 여기에있다. 당시 개런티로 수백만달러가 지급됐다는 후문이다.하지만 남미가 보이고 있는 입장과 관련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사유도 있다. 일본이 막강한 경제력을 앞세워 오래전부터 남미에대한 각종 경제적 지원·투자에 나서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일본과 가까운 배경과 마찬가지이다. 또FIFA의 50여 공식 후원업체 가운데 일본업체는 20여개에 달하나 한국은 단 한 업체도 없는 실정이다.정회장이 가장 아쉽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이 대목이다. 정회장은기회있을 때마다 88올림픽 유치를 위해 기업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듯 이번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도와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말의 참뜻은 뒤집어 해석해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한국이명분에서 앞서면서도 경제규모와 기업의 국제성, 조직력 등에서 뒤지고 있고 이것이 국가대항전 성격을 띤 월드컵 유치 경쟁에 있어지금까지의 성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의미이다.또하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축구계는 물론 관련 체육계 인사들의사심없는 지원이다. 심지어 보좌관·비서관 등 그를 최측근에서 보필하는 것이 주임무인 인사들조차 그의 활동에 대해 무관심하다는인상을 주고 있어 뜻있는 애호가들을 애태우고 있다.하지만 15대 총선을 성공적으로 치름으로써 일단 개인 차원의 짐을던 정회장은 또 다른 투표에서의 승리를 위해 11일 오후 멕시코로출국했다. 바로 등 뒤로는 국가와 국민의 전폭적 지원이 쏟아질 것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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