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신증설ㆍ해외투자 제동

『돈만 잡아먹은 반도체는 뭣하려고 합니까. 차라리 그 돈으로 잘나가는 신발산업에 투자하는게 낫지.』지난 80년대 중반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던 L씨가 공식석상에서 한말이다. 그는 지금도 정부의 고위관리로 있다. 사실상 당시 정부관리들의 한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일반적인 정서를 대변한 말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작년 국정감사장. 홍재형 당시 부총리는『반도체 공장을 해외에 짓는 것은 안된다. 국가전략산업은 국내에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외에 공장을 건설해 기술을 유출시켜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두 사람의 말은 정부가 반도체에 대해 갖고 있는 시각이 얼마나 극명하게 변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위상은 사실 두 사람의 말만큼이나 엄청나게 변했다. 세계 메모리시장의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국내업체가 모두 10대 메이커안에랭크돼 있다. 적어도 반도체에 관한한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서있음에 틀림없다. 문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이같은 발전을 하는데 정부가 아무런역할을 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오히려 「뒷다리」를 잡는데 더 열을 올렸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처음 시작할때 정부에서는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미국이나 일본업체들도힘겨워하는 사업인데 괜히 객기부리지 말라는 압력도 있었다. 일본의 공세로 고전하고 있을때는 『거봐라. 괜한 것을 시작해가지고속썩이느냐』는 질책도 쏟아졌다.그러나 90년대 들어 한국 반도체가 행세깨나 하게 되자 정부에서도거들고 나서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무슨 프로젝트라는 거창한이름이 붙은 민간연구개발 프로그램을 잇달아 발표하며 기술개발을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대부분 뜬 구름 잡는 것이거나 민간기업이 거의 개발해놓은 것에 한발 걸치는 게 고작이었다.◆ 「속도전」인 반도체분야 기술개발 저해 말아야반도체에 관한한 정부가 별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사건」이 있었다. 지난 94년말 삼성전자는 서울 호텔신라에서 2백56메가D램 개발을 기념하는 리셉션을 열었다. 재계는 물론각계 각층의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성대한 행사였다. 김광호 삼성전자 부회장이 개발 경과를 보고한 뒤 정재석 당시 부총리가 축사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 정부총리는 축사를 하기에 앞서 머리위에 올라가 있는 마이크를 끌어내려야 했다. 앞서 단상에올랐던 김부회장의 키가 1m80cm가 넘는 탓에 마이크 위치가 전혀맞지 않았던 것. 단구인 정부총리는 마이크를 내리곤 농담을 던졌다. 『마이크의 위치가 마치 정부와 민간기업의 위상을 대변하는것 같다』고.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정부의 한 인사는 반도체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정부가 그동안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인정하는 말로 들렸다고 씁쓸해했다.그러나 문제는 지금도 정부가 반도체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힐난섞인 질문을 받고 있다는데 있다. 대표적인 게 반도체 공장의 신규증설 억제다. 삼성전자의 기흥 공장은 공장 하나만 더지으면 꽉찬다. 10여년전부터 해마다 생산라인을 세워온 탓에 더이상 공간이 없다. 현대전자도 마찬가지다. 생산라인을 한 두개 더 세울수 있을까 하는 정도다. 구미와 창원으로공장이 이원화된 LG반도체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몇년 안에 땅이모자랄 건 틀림없다.그래서 업계는 공장을 더 지을 수 있도록 인근에 부지매입을 허용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반면 정부는 수도권 정비계획법에 따라 이를 허용할 수 없다는 완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공장의 신증설을 억제할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정부의 말도 일리가 있다. 또 정책방향으로 보면 옳다고도 할 수있다. 하지만 무조건 안된다고 하면서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태도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는 지적이다.정부에선 고작해야 지방으로 가면 될것 아니냐는 소리만 늘어 놓는다. 그러나 『땅 한평에 50만원 60만원씩 하는데 어떻게 수십만평을 사서 사업장을 새로 만드느냐』는 업계의 항변에는 그냥 입을다물고 있다. 업계는 기존 사업장에는 종업원 복지시설이나 기숙사등이 있어 공장부지 정도만 사면 되는데 지방에 별도의 사업장을만들려면 최소한 땅을 두배이상 사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 기존 사업장에 연구체제가 갖춰져 있는데 이를 이원화시킬 경우 연구개발의 효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연구개발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사실상 속도전인 반도체 분야의 기술개발을 저해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더 큰 문제는 이처럼 공장 신증설을 억제하고 있으면서 해외에 공장을 짓는 것에도 이런 저런 조건을 붙이고 있다는 데 있다. 작년에 부활시킨 해외투자시 자기자본 20% 의무조달 규정이 대표적 예다. 이 규정은 당시 현대전자와 삼성전자가 대규모 해외투자 계획을 발표하자 정부가 내놓은 정책이다. 대규모 해외투자가 무분별하게 시행되어서는 안된다는 게 정부의 논리다. 여기에는 반도체가국가 전략산업이어서 함부로 외부에 내둘러서는 안된다는 생색도곁들인다.그러나 자기자본 의무조달 규정은 국내업계의 경쟁력을 저하시키는큰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우선 값싼 해외 자금을 사용할수 없어 금융부담이 크게 늘어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반도체는조단위의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잣돈이라고 해도 금액은 무시못한다. 반도체 공장을 해외에 짓지 못할 경우 수요자가 있는 곳에서 제품을 생산한다는 세계 반도체 업계의 추세를 따라갈 수가 없다. 현재세계 반도체 업계에선 납기를 5일이내에 맞추지 못하면 도태될 만큼 납기 단축 경쟁이 심하다. 따라서 수출이 전체 매출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국내업체로서는 해외 공장을 짓는 게 필수적이다. 그런데 정부는 정 반대의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해외에 공장을 짓는 것은 산업공동화를 초래할 우려가 있어 안된다, 국내에서 공장을 신증설하는 것은 수도권 정비 계획법에 따라불가능하다고 버티는 정부의 논리속에서는 반도체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인정한다는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정부의 정책은 낭떠러지 앞에 선 자동차보고 오른쪽 길은 이래서안되고 왼쪽길은 저래서 안되니 그냥 앞으로 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도대체 사업을 하라는 건가 말라는 건가』(반도체 산업협회관계자)하고 업계의 볼멘 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가 뒷다리를 잡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업계가 줄기차게 요구해온 것중에는 반도체의 수입관세를 없애달라는 게 있다. 얼핏보면 국내시장을 완전히 개방해서 좋을 게 뭐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정부에서도 이런 이유로 8%의 관세를 매기고 있다.◆ 높은 관세 시한폭탄처럼 위험성 내포그러나 이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대표적 정책으로 꼽힌다. 한국의 반도체는 미국 일본과는 달리 내수시장이거의 없다. 90%이상이 수출이다. 따라서 통상문제가 걸리면 초비상이 걸린다. 업계는 해외기업들이 관세율을 가지고 시비를 걸어오는경우를 종종 당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에 관한한 관세가없다. 유럽은 3%정도의 관세를 물린다.그러나 한국은 높은 관세를 꼬박꼬박 매기고 있다. 따라서 아직 이문제가 크게 부각된 적은 없지만 적어도 시한폭탄처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업계는 국내시장을 열어봤자 규모가 작아 별타격이 없는데다 통상마찰의 위험요소까지 제거할 수 있다 며몇년째 설득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관세를 매기는 것은 업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고 있기도 하다. 한국에는 반도체 장비를 만드는 기술이 거의 없다. 장비 국산화율이10%를 간신히 웃돈다. 나머지는 모두 일본이나 미국에서 들여다 쓴다. 따라서 관세도 엄청나다. 『한해에 장비 수입에 들어가는 관세만도 8백억~9백억원은 된다』(반도체 산업협회 관계자). 안써도 될 돈이 들어가는 셈이다.최근 한국 업계는 미국과 일본이 맺은 반도체 협정에 끼여들려고노력하고 있다. 미일반도체 협정은 앞으로 반도체의 기술표준화등에 포괄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하는 게 골자다. 또 환경등 앞으로 제기될 여러 문제에 대해 다각적으로 공동보조를 취하겠다는 내용도담고 있다. 물론 미국과 일본 이외의 국가에도 협정참여를 제안하고 있다.한국업계로서는 이 협정에 꼭 끼여야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들어가지 못할 경우 산업 주도권을 빼앗길 우려가 높다. 그러나 한국업계는 미일반도체협정에 끼일 자격이 없다. 협정에 들어올 수 있는전제조건이 반도체 수입에 관세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정부가 의도적으로 뒷다리를 잡는 건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때 잘해준 것보다 못해준 게 더 많았다. 산업의 특성을 이해하고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를 헤아려 가려운데를 긁어주는 것이야 말로 정부가 해야할 일이 아닌가. 최근 반도체 산업협회에는 이런 전화를 걸어오는 정부관리가 많다고 한다. 『반도체 수출이 안되는데 도대체 협회나 업계는 뭘 하고 있는 거냐.』 『비메모리 반도체를 해야 한다는데 왜 한국업계는 안하나.』 이런 전화를 하는정부 관리가 있는 한 반도체 산업이 국가전략산업으로 자리매김하기는 요원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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