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짓기로 덩치 키워야 한다

금융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이 두가지 있다.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것과 설혹 망하더라도 정부가 구제해준다는것이다. 만사 걱정할게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금융기관을 믿고 돈을 맡기겠느냐는 식이었다.그러나 신화는 깨지고 편견은 부정되기 마련이다. 망하지 않는다는편견은 자본주의의 근본원리에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힘은 경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명확히 가른다. 패자가 눈물을 머금고 물러나는 것도 발전과정인게 자본주의 사회이다. 망하지 않는다는 편견은 누가 봐도 「거짓명제」다.정부도 금융인들의 안일한 사고에 경종을 울리듯 금융기관간 인수합병(M&A)을 유도하기로 했다. 한승수 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은최근 부실금융기관을 금융시장에서 신속하게 퇴출시키기 위해 금융기관간 통폐합을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둘러 금융기관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다는 확신에 따른 것이다. 사실 인수합병을 통한 금융산업 개편논의는 나웅배 전부총리재임때부터 제기돼왔다. 은행의 파산에 대비, 예금보험공사를 만들고 파산기금을 조성하기 시작했다.그런만큼 정부의 정책의지는 어느 때보다 강하다. 금융산업개편(구조조정)은 우리경제의 발목을 잡고있는 「고비용 저효율」을 해소하는데도 효과가 클 것이란게 재경원의 분석이다. 금융기관간 경쟁이 치열해지면 자연히 고비용의 주범인 금리를 자연스럽게 낮출 수있다는 것이다.재경원은 지난 91년 만들어진 현행 「금융기관 합병 및 전환에 관한 법률」을 「금융산업구조조정에 관한 법률」로 전면 개편, 올정기국회에 제출할 계획이다. 주무부서인 국민저축과의 유재한과장은 『조세금융상의 지원을 확대하기 위해 세제실쪽과 의견을 조율해야하는 문제가 남아 있지만 금융기관간 합병을 촉진시키는 쪽으로 법조항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이번에 마련된 법률에는 합병에 따른 소득 법인 특별부가 등록세 등의 감면폭이 확대되고 자금지원이 제도화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이제 금융산업의 지각변동이 예고되고 있다. 그 파장과 충격은 어느 때보다 클 것이다. 80년대 금융기관의 급속한 구조개편을 가져왔던 영국의 빅뱅 이상이 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같은 시기에 미국은행들도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도산하는 은행이 속출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세계적 추세인 합병 및 통폐합전략이 개방의 파고를 타고 한반도에 상륙한 것이다. 겸업화개방화 자율화시대에는 새로운 사고와 인식이 필요하다. 그래야 합병도 가능해지고 변할 수도 있다. 지금같이 당위성을 인정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서둘러 실천에 옮길 때이다.◆ 겸업화·개방화 파장, 금융계 ‘일파만파’이제 금융기관이 비빌 언덕은 없어졌다. 적자생존의 밀림으로 내몰리고 있다. 살아남기위해선 오직 자신의 힘을 키우고 무기를 갖춰야한다. 힘이 모자라면 적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 과거의 폐쇄적운영체계로는 개방화의 파고를 이겨갈 수 없다. 금융기관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혜택에도 미련을 버려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급변하는 금융환경에 적응하는데 유리하다. 금융업도 가격담합, 내부거래 등으로 공정거래법상 제재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국내 은행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규모의 영세성이다. 전체경제규모에비춰볼 때도 그렇고 선진국 경쟁은행과 비교하면 초라할 정도다.우리나라 은행중 세계 1백대은행(총자산기준)에 들어가는 은행은하나도 없다. 국내 5대 시중은행의 자산점유율은 50%에 달하고있지만 은행별 평균자산규모가 미국 5대은행의 19%, 일본 5대은행의5.4%에 불과하다. 규모가 작다는 것은 규모 및 범위의 경제에서 뒤처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산투자에 대한 부담도 늘게된다. 조흥경제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 시티은행의 경우 매년 전산투자비용이 우리나라 전체시중은행의 전산비용을 합한 것보다 3배이상많다.부실채권에 대한 부담도 적지않다. 지난해말 현재 은행권의 부실채권은 약 2조3천억원(총여신대비 0.9%)으로 비교적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으나 6개월이상 연체된 채권을 포함하면 부실채권 규모는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6월말 현재 은행별 부실여신규모도 요주의 여신을 포함할 경우 눈에 띄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전문가들은 은행간 경쟁이 심화되면 고객들의 신용리스크는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금융기관간 경쟁 치열할수록 금리는 낮아져이밖에 낮은 생산성도 구조적인 취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국내은행의 자기자본이익률과 총자산이익률은 미국은행의 절반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소매금융영업, 기업신용심사기법, 경영정보시스템 및자산부채종합관리기법 등에서 전문기술을 확보하지 못한데 따른 것이다. 은행뿐 아니라 증권 투신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대형증권사들은 리스크가 큰 주식등 위험자산에 수천억원씩 투자, 막대한 평가손을 안고 있다. 또 인수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미회수채권도 발생해 수익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특히 모든 증권사들의 수익구조가 매매수수료에 편중돼있어 주가침체기에 적자기업으로 전락하기 예사이다. 국내 증권사 역시 외국증권사에 비해 1인당 생산성이 크게 뒤져 경영효율화문제가 제기되고있다.투신사는 형편이 더욱 어렵다. 정부의 보호막속에서 저축기관으로외형성장을 해온 서울 3투신사들은 진입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불안에 떨고 있다. 독과점성격의 영업과 경영은 설땅을 잃게된 셈이다.수조원 이상의 부채부담으로 몇년째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는 투신사도 있다. 책임경영을 할 수 있는 재벌에 투신사의 경영권을 넘겨줘야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올초 현대그룹이 금융업강화를 위해 국투의 지분을 매입했다가 되파는 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밖에 신용금고 할부금융 카드 리스사등도 업무영역이 통합될경우 경쟁이 더욱 치열해져 짝짓기를 통한 생존전략마련이 시급하다.금융기관합병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인원감축의 어려움이다. 노동조합의 반대로 합병에 따른 인원감축이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킨지리포트에 따르면 비용절감의 가능성이 가장 큰 분야는 영업점의 임대차보증금의 기회비용인 것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기회비용의 절감가능성이 감원 등을 통한 인건비 절감가능성보다 훨씬 크다는 분석이다. 서울대 민상기교수도 『미국을 제외하면 유럽과 일본도 합병시 종업원을 마음대로 해고하지 않는다. 이를 지나치게 문제삼는 것은 잘못이다』고 강조한다.또 정부의 의지도 부족했던게 사실이다. 정부가 지점설립에서 상품개발 운용까지 세세한 곳까지 간섭하고 있는 현실에서 합병을 생각하는게 비현실적이지 않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풀 수 있는 규제를서둘러 풀어야 한다. 규제는 풀고 감독을 철저히 하는 방식으로 시장질서를 잡으면 된다. 캐나다 로열뱅크 서울지점의 배리라몬트씨는 정부의 의지없이 한국에서 은행합병이 일어나겠느냐고 반문할정도이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부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은행의소유구조에 약간의 변화가 있더라도 경쟁력강화에 무게를 싣고 정책을 펴겠다는게 재경원의 기본 시각이다. 정부는 이번 법개정과정에서 미국 일본의 합병유인책을 광범위하게 참조해야한다.미국에서는 합병의 직접적인 동인이 주간영업허용 및 지점설치완화였다. 독점금지법상 경쟁제한기준도 완화했다. 경쟁심화로 은행간실력차가 표면화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는 자회사를 통한 이업종진출을 허용하고 특수전문은행과의 합병을 허용하면서 합병바람이 불었다. 구제합병의 경우 일본의 예금보험기구가 자금을 지원해주는 제도도 있다.물론 금융기관 합병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조직을 통합하고잉여인력을 감축하고 전산시스템을 통합해야하는 등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회사이름이 바뀌면서 고객이 이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방화시대에 국제무대에서 싸워 이기려면 몸무게도 불리고힘도 길러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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