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업계 최고 엘리트 꿈 가꾼다

「자존심과 오기」.일천한 국내 외식업계에서 남다른 업적으로 화제를 모은성신제(48) 한국로스터스 사장. 그의 성공을 설명하는데 빼 놓을수 없는 두 요소다.그는 사업초기 펩시콜라가 운영하는 「피자 헛」본사인 펩시코에피자 주방용품과 판촉용품을 납품하다가 구매직원들로부터 자존심을 크게 손상받은 적이 있다. 그가 나중에 피자헛 한국내 사업권을따 낸 것은 바로 이 「상처」를 만회하기 위한 자의식의 발로의 결과였다.성사장은 또한 52개까지 늘린 피자헛 가맹점을 펩시코에 되팔기도했다. 이는 피자 아닌 다른 외식업 분야에서도 성공하겠다는 오기때문이었다. 결국 장작구이 치킨업에 뛰어 든 그는 현재 「케니로저스 로스터스 치킨」을 운영하면서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자존심과 오기외에 덧붙인다면, 일단 시작한 사업에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성공하겠다는 강한 승부근성도 한몫했다.◆ 피자헛 펩시에 처분하고 4백50억원 벌어성사장이 외식산업과 연을 맺은 것은 특별나다. 서울대 정치학과졸업후 70년대 중반, 호남정유 비서실과 당시 10대 종합상사중 하나였던 삼화에서 근무했기에 애당초 외식산업과는 거리가 멀었다.삼화에서도 스포츠용구 수출을 담당했을 뿐이었다. 79년말 삼화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센티브」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한다. 당시 창업자본은 7만 2천원이었다. 성사장은 인센티브상사를 운영하면서 별도로 2명의 동업자와 함께 자신이 무역부문을 맡기로 하고「세일산업」이란 스포츠용구 제조업체를 설립했다. 성사장은 공장에서 제조된 용품을 해외에 수출했다. 반년치 이상의 주문이 쌓일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사업이 잘되면서 동업자들이 무역도 자신들이 맡겠다고 나서는 등 갈등이 빚어지자 사업에서 손을 뗐다. 당시반포에 어렵사리 마련한 아파트를 담보로 출자했던 4백만원은 3달후에 되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무역업을 만만히 봤던 2명의 동업자들이 약속기일도 되기전에 망해버리는 바람에 한푼도 못 받고 말았다. 은행에서 「아파트에 차압딱지를 붙이는」곤경에 처하게 됐다. 교통보험(동부화재의 전신)을 경영하던 선친이4·19로 경영권을 빼앗기면서 가세가 몰락, 성북동 달동네에서 생활했던 악몽이 떠올랐다.『성북동 달동네의 배고픔을 자식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재기에 나섰다.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무역업에 다시 손을댔다. 이때가 82년초였다. 설립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82년 2월시카고에서 NSGA(전미운동용품 박람회)가 개최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포츠용구 수출에는 남다른 자신이 있었기에 참가하면 무슨수가 생길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국행 비행기를 타는 것이 문제였다. 천신만고 끝에 시카고에 가서 「피자헛」의 판촉용 비치볼을수주 받는데 성공했다. 얼마되지 않는 액수였지만 재기를 모색하던성사장에게는 「가뭄끝에 단비」였다. 이를 계기로 매년 4,5백만달러어치를 수출할 수 있었다.그러나 성사장은 본사 구매담당자의 고압적인 태도에 자존심을 손상당한다. 납품하는 물건을 검사하는데 괜히 까탈을 부리고 성사장의 요구를 듣는둥 마는둥 기분을 상하게 했다. 이같은 태도가 못마땅하던 그는 우연히 본사 직원들의 대응태도가 180도 다른 일군의집단을 보게 된다. 바로 피자헛의 가맹점 운영자들이었다. 그 순간머릿속에는 『나도 가맹점을 운영하면 자존심 세우면서 대등한 거래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펩시코측에 한국에 피자헛을 개설하겠다는 사업계획서를 제출했다. 이미 국내 유수기업중 몇군데가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의 성실한 납품 태도와 외식산업에 대한 계획을 높게 평가받아가맹점 운영자로 선정받았다. 그때가 84년 12월이었다.그러나 계약이 체결됐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가맹점을 여는데 필요한 돈을 조달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친구와 은행에서 3억원을 빌린 끝에 모두 6억원을 들여 1백60평 규모의 피자헛 1호점을 이태원에 열었다. 그의 고생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하루 1만원짜리 피자가 3백판 이상 팔릴 정도로 고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태원의 성공에 힘입어 뉴코아 청담동 등에 잇따라 지점을 개설했다.◆ 로스터스 치킨 기름기 모두 제거해 인기성사장의 예상 밖의 성공에 놀란 펩시측은 91년 10월 합작투자를제의했다. 그래서 45%의 지분을 펩시측에 넘겨줬다. 젊은층의 피자에 대한 선호와 청결하고 깨끗한 이미지에 힘입어 매장은 52개로늘어났다. 그러나 피자헛의 성공에 비례할수록 펩시측의 경영권 간섭은 강화됐다. 마침내 성사장은 『세계적 대기업과 싸워봐야 이득도 없을 것이 뻔한데 그러니 다른 사업을 하자』라고 결심하게 된다. 93년 10월 55%지분마저 2백30억원에 펩시측에 넘겨줬다. 45%의지분을 넘을 때 받은 금액과 합산한다면 모두 4백50억원을 번 셈이다. 7만 2천원으로 사업에 나선지 14년만의 결실이었다.주변에서는 그 돈으로 이자나 받고 골프나 치면서 여생을 보내라고권했다. 충분히 고생했으니 경쟁이 치열한 사업은 다시 하지 말라는 충고였다. 그러나 성사장의 생각은 달랐다.『10년 가까이 키운피자헛을 반강제로 넘기고 나니 새로운 업체를 키우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또한 그간의 노하우를 살리고 싶었다.』당시 성사장은 미래의 외식산업은 △청소년 회사원 중년층 등 모든계층이 출입할 수 있는 식당 △소득수준에 적합한 합리적 가격 △배달 단체급식 포장판매 등 소비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기동성 등 3가지 요소를 충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이같은 원칙에 부합한다고 본 사업이 바로 「케니로저스 로스터스치킨」이었다. 가족단위의 식사가 가능하고 또한 기름에 튀기는것이 아니라 통나무 구이(wood roasted chicken)였기 때문에 건강에도 좋을거란 판단이 들었다. 매출액의 4%를 로열티로 지불한다는조건으로 국내영업권을 획득한뒤 94년 12월 서울시 서초구 양재동에 첫 매장을 열었다. 로티서리라는 기구를 이용해서 직접 매장에서 구워 내는 바비큐 스타일과 종업원들에 대한 친절교육 덕택에소비자들의 반응은 좋았다. 특히 가장 맛있는 온도로 알려진 화씨1백85도까지 장작나무와 가스불로 구워냄으로써 기름에 튀겨 내는기존 업체들과 차별성을 부각시켰다. 기름기를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40, 50대 성인들도 부담없이 먹게 했다. 이같은 성공에 힘입어명동점 논현점 고덕점 등을 차례로 열었다. 이들중 명동매점은 한달 평균 1억 5천만원 정도의 매상을 올린다. 이익도 『굉장히 해피(happy)』한 수준이다. 성사장은 지금까지 직영점만 운영해 왔으나올 겨울부터는 가맹점도 받아들이겠다고 밝힌다. 6(직영점) 대4(가맹점)의 비율이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20개까지 확장하고 싶다고 한다.자존심과 오기로 「아파트 가압류」의 역경을 극복한 성신제 사장.그는 지금까지의 성공에 자족하지 않고 국내 외식업계 최고의 엘리트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오늘도 양재점에서 부지런히 치킨 서빙(serving)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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