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은 사원양성소가 아니다

기업과 대학은 다르다. 한국의 선도적인 기업들이 세계 유수의 기업으로 발전하고 세계를 무대로 경영하는 반면, 한국의 대학들은5백위권에조차 끼이지 못하는 천덕꾸러기의 대접을 받고 있다. 기업은 이윤추구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며, 또한 시장에서의 경쟁은 효율적인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적자생존의 원리를 가르친다. 그래서 시장에서 단련된 기업들은 「경쟁력」을 모토로 다가올 사회의 주역임을 자처하고 있다.그러나 대학은 목적부터 불분명하다. 자기 대학의 교육이념을 알고있는 교수나 학생은 거의 없다. 목적이 불분명하니 목적달성의 효율성을 측정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대학입시와 기업채용, 창의성보다 획일성 더 원해기업의 입장에서 대학은 방만하고 비효율적이고 소비적인 곳으로보일 것이다. 그래서 어느 기업인은 『불량제품은 반품이라도 하지만 부실한 대졸신입사원은 반품조차 할 수 없다』고 불평하였다.이러한 발언의 이면에는 기업이 만드는 제품과 대학이 배출하는 졸업생을 동일시하는, 그래서 기업과 대학이 같은 기준에 따라 움직이는 같은 종(種)의 조직이라는 사고가 내재돼 있다.그러나 역시 기업과 대학은 다르다. 대학은 본래부터 기업의 수요에 즉각적으로 대응해 왔다기보다는 「가장 비현실적이고 저항적이며 황당무계한 이론」조차 수용되는 실험장이었다.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대학은 기초학문의 기반위에 다양한 이론적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의 조직과 교육방식은 5백년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큼 시대적 변화에는 뒤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대학의 졸업생들은 사회의 변화를 선도적으로이끌어나가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문제는 대학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화상과 기업이 요구하는 대학간에 큰 괴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기업에서는 당장 채용해 써먹을 수 있게 훈련된 인력과 기술을 대학에 요구한다. 그러나 대학은 그러한 민첩성을 결여하고 있다. 오히려 기업과의 지나친 밀착이 기초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지원의 결여로, 대학을 취업준비장으로 전락시킨다는 불평이 일고 있다.대학과 전문학교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는 대학은 학문적 연구와 결합해 종합적인 교양과 지식을 쌓고 새로운 지식체계를 생산해 내는곳인 반면 전문학교는 직업교육을 전담하는 사원양성소라는 점이다. 대학의 울타리 내에서도 기초학문을 담당하는 인문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과 직업교육을 담당하는 경영학 법학 의학 등은 전혀상이한 학문적 전통에 기반하고 있다. 전자를 본래 의미의 대학이라고 본다면, 후자는 직업교육을 담당하는 전문학교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다양한 기초학문을 습득한 대학졸업자들을 선발해 직업교육을 시키기 위해 전문대학원을 두고 있다.지식의 생산을 담당하는 대학과 생산된 지식을 표준화된 방식으로습득하고 활용하는 전문학교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생산체제로 비유를 한다면 대학은 상상력과 종합력, 그리고 예리한 분석력으로 기존의 지식과 기술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장인생산」의 특징을 지닌다.반면에 전문학교는 표준화된 내용을 학습하고, 학습한 내용을 역시표준화된 시험을 통해 확인하여 자격증을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대량생산체제」와 유사하다. 전문직업훈련을 받은 사람은 기존의조직체계속에서 곧바로 자기에게 주어진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준비성을 갖추었다는 점이 장점이다. 반면에 지식이 생산하는 기술을익힌 대학 졸업자는 변화무쌍한 환경하에서 조직의 변화와 적응의방향을 모색하는 창의성을 갖추었다는 것이 장점이다.우리나라 대학과 기업간의 관계에서 생기는 수요-공급의 불일치는기업이 지식의 생산체제로서 가지는 대학의 기능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현실적 「효용성」의 기준으로만 대학의 연구와 교육을 평가하려 할 경우 대학은 비효율적이고 소비적이며 불량제품을 양산하는 공장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그러나 새로운 지식체계의 생산은 다양한 시각과 노력들이 교차하는 「조직된 혼란(organized anarchy)」속에서 피는 연꽃과 같은것이다. 전혀 상호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아이디어와 사고체계, 경제적 자원, 인력 등이 서로 얽히고 설켜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새로운 이론과 기술이 탄생하는 곳이기도 하다.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대학의 모습을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다운 대학도 존재하지 않고 직업학교다운 직업학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존재한다.첫번째는 대학의 교육내용보다는 대학의 졸업장자체가 중시되는 사회적 풍토 때문이다. 이러한 풍토 하에서 대학은 인재들을 선별해기업에 배분해주는 역할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대학의 교육기능보다 선별기능이 중시되는 것은 「학력병(diploma disease) 」때문이다. 학력병은 우리사회에 널리 가득차 있는 획일성의 원리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는 단지 대학교육만의 문제가 아니고우리나라의 전체 노동시장의 구성원리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교육정책자문회의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 학부모들의96.5%가 아들을 전문대학 이상의 교육을 시키고 싶다고 응답했으며93.7%는 딸을 전문대학이상의 교육을 시키고 싶다고 응답하였다.대학교육에 대한 높은 수요와 일류대학 선호는 학벌이 매우 중요한신호(signal)로 취업시장에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다. 이때 주목할 점은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학벌에 대한 구입은 이미 끝나기 때문에 대학의 교육기능에 대한 수요는 거기에서 중지한다는점이다. 대학교육에 대한 투자보다는 대학과외가 더 중요한 국민적쟁점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응용과학에 대한 편중된 지원은 장애로 작용두번째로 대학입시와 기업의 채용은 신호의 획일성이라는 질병을공유하고 있다. 논리적으로야 한 개인의 능력과 자질을 평가하는데는 여러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으나 이를 측정하는데 드는 비용(여기에는 물질적 비용뿐 아니라 주관적이고 다차원적인 기준을 적용할때 파생될 수 있는 피험자의 불복이나 항의와 같은 심리적 기회비용도 포함한다)을 최소화하는 방향에서 제도가 정착되었다. 대학입시도 한두가지의 신호(수학능력시험점수와 내신성적)에 의해 결정되고 기업의 채용과 임금결정 역시 한두가지의 신호와 지표에 의해 결정된다.놀라운 사실은 미국이나 일본과 비교해볼 때, 우리나라 기업의 임금결정은 몇가지의 신호와 지표로 거의 완벽하게 설명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피용자의 학력과 경력, 그리고 성별 특성 등이 임금의 대부분을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난히 학력간 임금차가크다는 점에서 외국과는 대비가 된다. 이는 우리나라 기업의 직무구조의 특이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우리 기업에서는 광범한 직무순환과 연공서열형적 임금구조가 고용관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이러한 구조하에서는 개인의 개성과 특수한 재능이 중시되기보다는인화와 일반적 지식이라는 특성이 중시된다. 따라서 창의적인 개인보다는 조직생활에 순응하는 사람을 선호한다.세번째로 기업은 대학의 교육기능에 대해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실제로 대학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인색하다.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명문 사립대학들은 등록금에 의존하는 비율이 미미한 대신 기업과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다양한 학문분야를 균형있게 발전시키고 있다. 반면에 한국의 사립대학재정에서 기업의 지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또한 국립대학의 경우에도 기업들은 상징적 수준의 지원, 그것도대학의 연구와 운영을 위한 경비지원보다는, 건물을 지어주거나 기업의 이해관계와 직접 연관된 응용성이 높은 분야에 대한 지원에국한하고 있다.따라서 대학이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필요한 공공재로서의 지적자원을 만들어낸다는데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기능에 대한 무관심과 몰이해가 대학과 기업간의 장기적이고도 유기적인 관계의 심화를 저해하고 있다. 기초과학의 토대 없이 이루어지는 응용과학에 편중된 지원이 가져오는 한계는 이미 우리 사회의 발전을 심화시키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노동력의 최대 수요자로서의 기업은 여전히 장기적 안목에서 알을낳는 거위를 육성하기보다는 자신의 몫의 알을 수거하는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지식집약적인 산업으로 이행하는 시대적인 추세 앞에서, 그리고 지식의 단순한 소비에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창출하는 것이 사회발전의 기축원리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추세에서, 대학의 기초학문분야의 기능강화와 지식생산자로서 학생을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는 대학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전폭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한, 기업은 계속 대학에 대한 불평을 하게 될 것이다.또한 각 분야의 전문화와 지식 및 기술의 심화가 국가의 장래를 좌우하는 상황하에서, 획일성에 근거한 채용관행이 바뀌지 않는 한대학교육의 파행성은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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