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 간판 내리고 '자질' 깃발 올린다

지난해 7월 삼성그룹은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학력제한을 철폐하겠다고 밝혔다. 단편적인 지식과 학력위주의 채용기준을 버리고 채용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능력을 중점적으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다.「학벌간판주의」의 고질적인 병폐를 극복하고 실력위주로 사람을뽑겠다는 의도에서다. 이후 삼성그룹에서는 「대졸신입사원 채용」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삼성그룹이 학력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대학졸업장으로 기업이필요로 하는 인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물론채용제도를 바꿔 사회구조적 병리현상으로 지탄받고 있는 학력위주의 구습을 타파하겠다는 그룹의 의지도 깔려 있다고 채용연구실관계자는 설명했다. 그러나 삼성의 채용제도 변경은 대학교육에 대한불신도 어느정도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명문대졸업장=능력 자질 ?실제로 「명문대졸업장=능력,자질」이란 공식은 깨져가고 있다. 명문대 출신 고등실업자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같은 현실을입증한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대학교 커리큘럼은10년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떻게 대학교육만을 믿고 경쟁력있는인재를 뽑을 수 있겠는가.』(D그룹 인력관리팀 관계자) 또 명문대 출신들이 팀워크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적지않다. 물론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자질이 뛰어나 개인적인 업무성취도는 높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팀워크가 부족해 공동업무에 있어 문제가 발생하기 일쑤이다(L건설업체 인사담당 상무). 대기업인사담당자들은 팀워크가 부족한 이유를 대학에서 그룹활동이 태부족한데 따른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학생들이 A학점을 따기 위해 도서관에서 파묻혀 지내는 대학교육상황에서 단체활동에 필요한 소양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고등학교에서조차 사회봉사 등의 활동을 중시하는 추세인데 대학에서는 일부 학생들이 동아리활동을하는 것을 제외하면 단체활동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일부기업체 인사담당자들은 부서별로 명문대 출신들이 몰리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정도이다. 우수인력을 선발하는것도 중요하지만 효율적인 업무수행을 위해 직원간 화합도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명문대출신들은 뚜렷한 대안없이 회사를 마구잡이식으로 비판, 업무분위기를 헤치는 경향이 많다』는 투신사임원의 푸념은 이러한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중소기업들도 명문대 출신들을 고용하는데 조심스러운 입장이다.명문대출신들이 회사에 대한 소속감과 애사심이 부족해 언제든지보따리를 싸기 때문이다. 1, 2년 열심히 가르쳐서 쓸만해지면 경쟁대기업체로 자리를 옮기는게 예사다. 상대적으로 우수인력을 쓰기어려운 상황에서 고급인력을 빼앗기는 것은 보통 큰일이 아니다.경기도 안양에 있는 중견 전자통신업체 L사장은 명문대 출신의 사외유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병역특례로 1년에 두명정도의 최우수대학원출신들을 고용하지만 5년만 채우면 절반이상이 회사를 그만둔다. 결과적으로 이들에 대한 교육투자비도 제대로건지지못하는 형국이라는게 L사장의 설명이다. 대학에서 소양교육이 부족해 직장에 대한 인식이 예전같지 않다는게 중소기업사장들의 한결같은 얘기이다.최근들어 증권회사 임원들간에도 명문대무용론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증권사의 경우 영업이 중시되는 업종특성상 누가 고객을 더많이 유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최근 약세장에서 명문대 출신보다 비명문대 영업맨들의 수완이 돋보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이제는 학벌보다 개인적인 자질을 중시하며 사람을 뽑겠다는 증권사가 늘고 있다. 성격이 활달하고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 브로커업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한진투자증권의 유인채전무는 기획 조사업무를 제외한 영업부서의경우 명문대여부에 관계없이 개인적인 자질을 중시하는 방향으로전형이 이뤄지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더욱이 앞으로 증권사들은 개인적인 창의력을 중시, 전공에 관계없이 이공대쪽 채용도 검토하겠다는 방침이다.특히 선물 옵션 등이 활성화되면 수학도들도 많이 필요할 것으로예상된다. 기술적분석그래프인 그랜빌차트를 만들어 세계적인 명성을 날렸던 조지그랜빌도 전공이 피아니스트였다는 점에 비춰볼 때굳이 전공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그러나 전공을 따지지않는 풍토는 취업자의 입장에서 보면 곤혹스러운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체는 신입사원의 전공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엄밀한 적성검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인 의사도 무시되고 적당히 안분하는 형식으로 배치가 이뤄진다.◆ 명문대 팀워크 부족해 직원화합에 방해K대 무역학과를 95년에 졸업한 김모씨는 상사맨을 꿈꾸고 국내 굴지의 무역업체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씨의 꿈은 이내 깨지고 말았다. 두달여동안 연수를 마치고 김씨가 배치를 받은 곳은 관리부.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부서에 배치된만큼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퇴근후 같은 회사에 다니는 학교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놨다.한부서에서 적어도 2년정도 근무하는게 일반적이라는 얘기를 들었을뿐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입사 6개월만에 사직서를 쓰고 말았다. 취업 1년내 회사를 그만두는 신입사원들이 증가하는 추세도 신입사원들의 이같은 불만을 반영하는 것이다.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는게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국내에서는 잦은 이직은 다시 취직하는데 약점으로 작용한다. 특히 공백기간이있으면 사용자측에서 고용을 꺼리는 경향도 적지않다. 재취업이 그만큼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입사원들은 울며겨자먹기식으로직장생활을 이어가게 마련이다. 쌓여가는 불만을 참아가면서 말이다.기업체 인사담당자들의 한결같은 불만은 대학교육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다는데 있다. 기본적인 소양도 부족하고 업무를 수행하기위한전문지식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론과 실제 어느 쪽도믿을 수 없는 지경이다. 다시 말해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이 두가지를 모두 교육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이같은 현실을 반영, LG그룹은 그릇의 반만 채워오면 나머지 반은회사에서 채워주겠다는 이미지광고를 싣기도했다. 어찌보면 기업에서는 완벽한 대졸취업자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서 적응할수 있는 소양만 갖추면 된다고 여기는 기업들도 있다.그렇다고 해도 전공별로 소질이 어느정도 차별화돼야 한다. 그러나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경영학과나 법학과간 무슨 차이가 있고 법학과와 문과대, 사대출신은 어떤 특색이 있느냐는 것이다. 기껏해야 전문 자격증이 없으면 전공을 구분할 필요성이 없는게 우리의현실이다.대학에서 최소한의 노력을 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 교수들도 맡고있는 과목이 현실에서 어떻게 응용될 것인가를 한 번쯤 생각하는풍토가 조성돼야한다. 이론은 어디까지나 실천을 전제로 가치를 발휘해서이다. 이론이 중시되는 학교가 있으면 실무에 밝은 대학교도있어야 기업들이 구미에 맞게 인력을 끌어다 쓸 수 있다. 그래야대학별로 특색을 갖고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커리큘럼도 시대변화에 맞게 적절히 바뀌어야 한다. 대학생들의 다양한 단체활동프로그램도 마련돼야 한다. 지금처럼 말로만 이뤄지는 인성교육만으로 기업들이 요구하는 대학인상을 기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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