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없는' 싱가포르서 배우라

요즘 우리 경제는 고임금·고금리·고지가·고물류비·고소비·다규제 등 소위 「5고 1다」 현상으로 인하여 일종의 복합불황의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이와 관련, 각계 각층에서는 다양한 진단과처방을 내놓고 있다. 재계에서는 감량경영의 기조하에 명예퇴직과감원 선풍이 불고 있으며, 정부에서도 내년도 고급공무원 봉급과공공요금의 동결 방침을 선언하고 나섰다.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할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고비용·저효율 현상은 단순히 어제 오늘에생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난 수십년간 고도성장의 뒤안길에서 누적된 정치·경제·사회 구조적 차원의 병리현상과 깊숙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민간부문 경제활동의 수족을 묶어두고 있는 수많은 행정규제, 성장일변도 전략하에서 생성된 돈과권력의 밀월현상, 부패의 먹이사슬에 얽혀있는 천문학적 숫자의 검은 돈(비자금), 노사간의 갈등과 대립속에서 실종된 산업평화, 1만달러 소득의 환상에 도취되어 무분별하게 탕진하는 소비 행태와 호화외유 등 수많은 병리현상들이 상호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우리경제의 비효율성은 점점 깊어만 가고 있다.이같은 상황하에서는 임시방편적인 처방보다 오히려 포괄적이고 체계적·장기적 처방으로 접근하여 당장 힘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그 뿌리원인부터 치유해 나가는 것이 바림직할 것이다. 그 일환으로 오늘날 세계에서 「국가경쟁력 종합순위 1위」를 기록하고 있는싱가포르의 「저비용·고효율·저물가·고성장」의 이면에 숨어있는 비결을 찾아 보자.주지하는 바와같이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도시국가로서서울특별시만한 면적(6백41㎢)과 인구 3백만명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는 전후 세계경제사상 유례없는 높은 수준의 안정적 고속성장(1965∼95년 평균GNP 8.9%)을 이룩하고 오늘날 제3세계에서 가장 먼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고 있다.◆ 작지만 강력하고 능률적인 정부그렇다면 도시국가의 이같은 저력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그것은 한마디로 「투명하고 안정된 정치, 작으면서도 강력한 정부, 능률과 실질을 중시하는 행정, 노조-기업-정부의 일체화, 안정성장론에 입각한 일관성있는 국정운영」등 도시국가 특유의 생존전략에서 비롯되고 있다.싱가포르는 일찍부터 「Mr.Clean of Asia」라고 불릴 만큼 아시아에서 가장 맑고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고 있다. 물론 싱가포르도 한때는 암시장의 행정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부정부패가 극심한 적이 있었지만 1959년 이광요 인민행동당(PAP)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먼저 PAP 리더십은 강력한 「부정부패방지법」(1960)의 제정과 「부패행위조사국(CPIB)」의 권한강화 등을 통하여 관료적 부정부패와의 전면전쟁에 돌입하였다. 아울러 윗물 맑기 운동이 동시에 추진되었는데, 이것은 최고지도자 스스로의 청렴한 생활로부터 시작되어 당조직의 경량화와 당운영비의 최소화, 값싼 선거풍토의 제도화, 정경유착의 고리 단절 등으로 이어졌다.모든 경제정책은 정치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며 모든 민원은 「급행료」나 「상납」 없이도 신속하게처리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싱가포르 경제의 경쟁력과 효율성은무엇보다도 정부부문의 「CLEAN SYSTEM」에서 나오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한편 싱가포르 정부는 국내 최고 엘리트들이 총집결한 우수 두뇌집단으로 국정 전반에 걸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1959년부터 현재까지 장기집권하고 있는 PAP정부는 일종의 강성일당체제로서 당내외의 어떤 세력으로부터도 완벽한 자율성을 누리고 있다.내부적으로도 정부 지도층은 상호 동화·단결되어 있어 지금까지단 한번도 특정 정책을 둘러싼 이념적 논쟁이나 정치적 대립 등 내분현상이 표출된 바 없다. 이같은 최고 지도층의 내적 단결은 예하관료조직에까지 파급되어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처간 정책대결 또는 부처이기주의 행태는 찾아볼 수 없다.그렇다고 정부 규모가 비대하거나 방만하게 운영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정부부문에도 「철저한 비용개념」을 적용, 정부조직을 「소수정예」로 편성·운영하면서 정부인력을 철저하게 활용하고 있다.예를 들어 우리나라 금융당국의 경우 4천여명의 인력으로 1백89개의 금융기관을 관장하고 있는데 비하여 「싱가포르금융당국(MAS)」은 겨우 5백명(정규직원 2백63명)으로 5백개 이상의 금융기관들을 모두 관장하고 있다.그 결과 싱가포르는 현재 「세계에서 정부규제가 가장 적고 경제활동자유가 가장 잘 보장된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지난해Heritage Foundation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세계 1백1개 국가중에서싱가포르와 홍콩이 공동1위이고 미국이 4위, 일본·대만이 5위, 그리고 한국과 말레이시아가 13위를 차지하여 우리나라는 비교적 경제 개방·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로 분류되었다.PAP정부는 집권과 동시에 다원적이고 정교한 사회공학을 통하여 모든 시민·단체들이 오직 국가생존과 경제발전에만 이바지할 수 있도록 사회구조 자체를 재편하였다.PAP정부는 노동임금의 급격한 상승을 막기 위하여 정부·노조·기업의 3자 대표로 구성된 「국가임금회의(NWC)」를 설치·운영하고있다. NWC는 노동생산성과 경제성장 전망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매년 임금인상률을 결정하고 이것을 기업부문에 추천하고 있다.그런데 대부분의 기업과 노조는 특별한 이의없이 NWC안을 수용하기때문에 싱가포르의 임금수준은 「노동생산성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안정적으로 인상되고 있다.무자원국 싱가포르의 경제운영법칙 제1조는 「미래를 지향한 인력개발과 인프라 대국 건설」이다. 처음부터 인력밖에 가진 것이 없는 싱가포르는 국가생존전략의 초점을 인적자원의 개발에 두고 전문기술 인력의 양성과 노동자들의 기술훈련 강화 및 노동생산성 향상에 집중 투자하였다. 따라서 싱가포르의 연간 기술자 양성·배출비율은 인구 1만명당 38명으로서 세계 최고수준이며, 노동의 질에있어서도 스위스 일본 독일 홍콩 대만 한국 등 모든 나라를 제치고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다.오늘날 싱가포르는 연속 10년간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공항으로 선정되는 창이공항, 세계 최대의 물동량을 처리하는 싱가포르항, 국토전역을 연결하고 있는 8개의 고속도로망, 러시아워가 없는 시내 교통망, 값싸고 풍부한 전력공급, 세계 최고수준의 정보통신망 등을갖춘 인프라 대국으로서 아시아의 물류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교통체증과 항만시설, 공항터미널 부족 등으로 인해 길바닥에 뿌리는 연간 물류비는 무려 71조원(매출액 대비14.3%)에 달해 국제경쟁력 하락과 수출부진의 원흉이 되고 있다.이와함께 싱가포르는 세계최소의 도시국가로서 국제경제환경의 변화에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감안, 경제안정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고속성장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싱가포르 특유의 「안정적 고속성장」 전략은 다양한 경제정책도구들의 효율적 조합과 탄력적 집행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미래지향의 인력개발과 SOC 육성먼저 PAP정부는 긴축금융과 팽창재정의 적절한 조합을 통하여 거시경제적 차원의 안정성장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 그 중에서 금융정책부터 보면 비교적 낮은 통화공급과 높은 이자율로 물가억제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금리정책에 있어서 싱가포르 정부는 최소한의 실질금리만은 반드시 보장해 주는 정책으로 일관하고있는데(1965~93년 평균 실질금리 1.9%) 이것은 국내저축을 장려,물가억제 및 국내자본형성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일석이조의 전략으로 보인다. 반면 우리나라의 금리정책은 일관된 기조도 없이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면서 때로는 경기침체를 부추기고 때로는 투자촉진을 유도하는데 요즘 상황이 바로 「지나친 고금리」로 인하여 고비용 구조가 심화되고 있는 단계이다.다음 국가재정을 보면 싱가포르 정부는 매우 알뜰한 살림을 하고있다. 민간부문의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조세부담률은 비교적 낮게유지하면서도 우리나라와는 반대로 경상재정수지는 항상 흑자기조로 유지하고 있다. 아울러 정부는 「중앙공제기금(CPF)」 이라는일종의 「강제저축제도」를 통하여 민간부문의 저축을 증대시키고있다. 그 결과 오늘날 싱가포르의 국내저축률은 GDP의 48%(한국34%)에 이르고 있으며 이것은 곧 「발전기금」으로 다시 들어가국가개발사업에 장기 재투자되고 있다. 이에 싱가포르는 외채의 누증이나 물가상승의 압력으로부터 해방된 가운데 고속성장을 계속누리고 있다.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같이 싱가포르의 높은 경쟁력과 효율성은 무엇보다도 정부부문에서 비롯되어 민간부문으로 파급 확산되면서 끝없는 선순환을 이루고 있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먼저 위로부터의「맑고 깨끗한 정치」는 「작지만 강력하고 능률적인 정부」를 낳았고 이것은 다시 「질서있고 질적으로 고등화된 사회구조」를 태동시켰으며, 나아가서는 경제의 효율성과 경쟁력으로 연계되었다.그 사이에 싱가포르는 세계 최고수준의 안정적 고속성장을 이룩하고 이제는 생존의 차원을 넘어 번영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한편경제기적은 중산층 사회와 참여지향적 시민문화를 창출하여 정치부문으로 환류되면서 정치 개방화·민주화를 촉진시키고 있다.여기에서 싱가포르 정치 경제의 선순환과 상승적 발전에 내재하는국정체계를 재조명해 보면 모든 경제정책들은 일관된 국가 전략구도하에서 상호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일관성있게 추진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부정부패 척결, 실적주의 인사철칙, 강제저축제도, SOC육성, 안정성장론, 세계화 전략 등 모든정책은 어느날 갑자기 급조된 것이 아니라 자치정부시절 또는 독립당시부터 시작되어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융통성 있게 조정·보완·발전된 것들이다.엄밀한 의미에서 의약의 세계에 만병통치약이 없듯이 정책의 세계에도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특효성 비법은 있을 수없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복합불황의 국면을 헤쳐나가는데 있어서도 단편적·일시적인 처방만으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해결하겠다는 성급함에서 우선 벗어나야 할 것이다. 물론 감원·명퇴·봉급동결은 당장의 비용절감 효과는 가져오겠지만 장기적으로는오히려 고용불안과 노동생산성 저하, 실업증대와 정치사회적 불안정 등으로 이어져 뜻하지 않았던 부작용을 낳고 말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부·기업·가계 등 모든 경제주체들의 경제활동이 서로 같은 방향으로 조응하여 선순환을 낳을 수 있도록 보다 포괄적·입체적으로 접근, 문제의 뿌리 원인을 차례 차례로 치유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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