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도입 틀에 박힌 허물 벗는다

올해 들어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이미지에 큰 변화를 주어 눈길을 끈다. 직원들을 만나 격의없이 대화를 나누고 마주앉아 깡소주도 마신다. 한 모임에서는 여직원과 마주보고 서서 팔을 엇걸어 생맥주를 들이켜기도 했다. 또 계열사 직원들과 함께 밀어주고 끌어주며 지리산 등반을 다녀왔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김회장은 지난해까지만해도 너무 권위적이라는 평을 들어왔던 터다. 변화의 물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김회장은 머리스타일도 부분적으로 바꿨다. 그는 총수 취임 이후 줄곧 올백형 머리를 고집해왔다. 그러나 올해부터 이를 약간 바꿔 옆으로 자연스럽게 빗어내리는 형으로 변화를 주었다. 편안한 인상을 주자는 의도였다.이런 노력의 결과일까. 요즘 김회장을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예전의 딱딱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 직원들 역시 편안하게 대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일부 직원들은 부드러운 남자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더 나아가 그룹 전체의 이미지가 밝아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형제간의 재산권 분쟁 등으로 쌓인부정적인 이미지가 상당 부분 씻겨내려갔다는 얘기다. (주)한화의한 평사원은 『회장님의 이미지가 바뀌니까 그룹 전체의 분위기가밝아진 듯하다』고 설명한다.기업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요인은 많다. 무엇보다 우선 기업이 추구하는 경영이념이라든지 도덕성을 들 수 있다. 아무리 기업의 덩치가 크고 매출액이 많다해도 이념이나 도덕성이 건전치 못하면 소비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없다. 또 사회적인 기여도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것도 꼭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각 기업들이 복지재단 등을 통해 사회사업을활발히 벌이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지 관리와 무관치 않다. 여기에다 최근에는 총수의 이미지가 중요한 변수로 자리잡아 가는 추세다. PI(President Identity)라는 말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특히 총수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된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의견이다. 그런 까닭에 국내 대기업들은 총수의 이미지 관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총수이미지 따라 기업·직원 사기 좌우지난 3월 신임 정보근 회장을 맞은 한보는 최근 대대적인 이미지변신을 노리고 있다. 10월초부터 이례적으로 텔레비전에 그룹 이미지 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또 신문광고에도 서울대 대학원생을 모델로 기용, 세계로 뻗어가는 기업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특히 한보는 정회장이 총수치고는 매우 젊다는 점을 감안, 젊은 기업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정회장 자신도 일하는 회장으로서의이미지 심기에 분주하다. 매주 한차례 이상 당진제철소에 내려가직원들을 독려한다. 헬밋을 쓰고 불덩어리가 치솟는 작업현장에도수시로 나타난다. 또 전임 회장과는 달리 언론을 멀리하지 않는모습이다.한보는 최근 몇년 사이 수서사태와 비자금 파문 등 큰 일을 두 번이나 치렀다. 그것도 정태수 총회장이 인신구속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룹의 이미지는 맨 밑바닥에 떨어졌고 직원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었다. 그룹의 외형은 날로 커져만 갔지만 정작 중요한 이미지는 자꾸만 추락했던 셈이다. 무엇보다 얼굴격인 정 총회장이 부도덕한 인물로 낙인찍혀 직원들의 낯을 뜨겁게 만들었다. 결국 올해 3월 총수자리에 2세인 정 회장을 앉혔다. 이미지 관리를 맡고있는 그룹 홍보조직도 대거 바꾸었다. 그리고는 최근까지 줄곧 그룹 전체와 총수의 이미지 개선 작업에 몰두해왔다.LG는 지난해 2월 구본무 회장이 취임한 이후 줄곧 도전 최고 정도를 강조하고 있다. 전임 구자경 회장 시절에는 들을 수 없었던 단어들이다. 구회장도 대외적으로 말끝마다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를 강조한다. 2005년에는 1등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의지도 자신만만하게 피력한다. 그래서일까. 요즘 LG직원들의 표정은 전에 없이 밝고 도전적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뭔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배어난다. 회장의 한마디에 그룹 전체가 역동적인 모습으로탈바꿈한 것이다.국내 대기업 가운데 총수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기업으로는 삼성과 대우가 꼽힌다. 그룹의 파워가 강한 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상대적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잘 한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그 가운데서도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이미지를 상당히 체계적으로 관리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비서실을 중심으로 삼성이 추구하는 경영이념인 인간존중의 이미지를 뿌리내려가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 회장의 지시로 시행중인 학력철폐다. 지난해부터 그룹 공채시험의 문호를 활짝 연 것이다. 학력에 관계없이 나이만 맞으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게 해 수험생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삼성은 또 이회장이 재계를 리드하는 지도자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도 힘을 쏟는다. 실제로 이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나라를 걱정하는 발언을 해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데 주력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대우의 김우중 회장은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뛰는 총수로 통한다. 바쁜 사람으로 이미지가 굳어진 결과다. 물론 실제로도 그는아주 부지런하다. 해외에 나가 있다 싶으면 어느 사이 국내에 들어와 현장을 누빈다. 요즘엔 아예 외국에서 상주하다시피 한다. 국내에는 가끔 일이 있을 때만 들어온다. 물론 들어오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출국한다. 대신 국내경영은 윤영석 총괄회장에게 맡겨두고 있다. 지난해 비자금 파문으로 총수들이 줄줄이 소환될 때도 그는 외국에서 급거 귀국해 검찰에 출두했었다. 그런 까닭에 일각에서는 그에 대한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해외에 나가 국익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였다.◆ 기업 특성·총수 캐릭터 따라 결정해야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그룹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공격경영의대명사 현대는 정몽구 회장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바꾸는데 주력하고 있다. 반면 쌍용은 올해초 대권을 물려받은 김석준 회장의 이미지를 강화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러면서 전임 김석원 회장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일도 병행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신임 회장의 그룹 장악력을 높이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대외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거평 역시 나승렬회장에게 붙어있는 부동산재벌이란 달갑지 않은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분투중이다.국내에 개인 이미지 메이킹이 본격 소개된 것은 지난 87년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출마자들 대부분은 전문가를 동원, 이미지 관리에 적극 나섰었다. 특히 노태우 후보는 기획단계에서부터 이를 도입했다. 교수와 광고전문가 등을 참모로 두고 선거가 끝날 때까지 조언을 받았다.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적어도 노후보는 그랬다. 이들 참모들이 만들어낸 보통사람이라는 이미지는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후 개인의 이미지관리는 재계로 번져나갔다. 90년대 들어 각 그룹들은 앞을 다투어PI를 도입했다. 일부 그룹들은 전문가를 초빙, 체계적인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요즘도 이미지관리연구소 등 몇몇 컨설팅 기관이 기업들과 손잡고 활발히 활동중이다.요즘 각 그룹들은 지난해의 비자금 파문으로 얼룩진 총수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어내는데 열중하고 있다. 그룹의 간판인 총수가 법정에 출두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업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부 그룹들은 이런 모습이 해외공사에 영향을미치지나 않을까 해서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세계경영에 힘을쏟고 있는 대우는 해외사업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분위기다. 또 리비아 대수로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동아도 적잖이긴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총수의 이미지를 한차원 높이는 비결은 무엇일까.전문가들은 모든 기업에 다 적용되는 특별한 공식은 없다고 설명한다. 기업의 특성과 총수의 개인적인 캐릭터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가장 부정적으로 비쳐지는 것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한다. 이와 함께 상징조작등의 방법으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할 것을 주문한다. 여기서 상징조작이라 함은 특단의 조치로 틀에 박힌 이미지에서 탈피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나약한 모습으로 비쳐지던 총수가 어느날 갑자기 공격경영을 발표하며 사장단 인사를 전격 단행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미지관리연구소 최재현 소장은 『기업의 대외적인활동 폭은 총수의 이미지에 의해 판가름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만큼 총수의 이미지에 대한 더욱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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