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작가 나래 펼 토양 주겠다"

금호미술관 박강자 관장(55)은 요즘 잠을 설치기 일쑤다. 나이가든 탓도 있지만 기대반 걱정반으로 뒤척이다 보면 날이 밝는다. 아무리 잠을 이루려 해도 숙면을 취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낮잠을 즐길 수도 없다. 하루하루 처리해야 할 일이너무 많다보니 시간을 내기가 여의치 못하다.박관장은 최근 종로구 사간동에 금호미술관을 새로 지어 개관했다.3년의 고생 끝에 꿈에 그리던 미술관을 마침내 완공해 일반 사람들에게 공개한 것이다. 특히 박관장은 산고에 버금가는 고통을 감내하며 이룬 것이라 감회가 남다르다. 부지를 물색하러 발이 부르트도록 인사동과 사간동을 누볐던 기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신축 미술관은 지상 4층, 지하 3층 규모로 전시관만도 4개나 된다.초대형 미술관은 아닐지라도 전시회를 소화하는데 부족함이 없을정도로 비교적 넉넉하다.◆ 동호인 미술강좌·국내외 미술관 순회도 가져박관장은 미술계 경력이 좀 독특하다. 그녀가 처음 미술작품에 손을 댄 것은 미국에서였다. 미국생활을 하며 틈나는대로 전시회를구경다니며 작품을 감상했다. 마음에 꼭 드는 것이 보이면 한두점씩 사두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난 82년 귀국과 함께 본격적으로 수집에 나섰다. 주로 유망한 신인작가의 작품을 구입했는데 지금의금호미술관 소장품의 모태가 되고 있다.미술관 경영은 89년 금호미술관의 문을 열면서 시작했다. 박관장이실질적으로 미술에 몰입한 것이 7년여밖에 안되는 셈이다. 미술을업으로 삼아 평생을 몸바쳐온 정통 미술계 인사들에 비하면 아주짧기 그지없다. 하지만 경력만으로 그녀를 평가하기엔 이른감이 있다. 그녀는 이미 미술 평론가들로부터 역량있는 미술계 인사라는평가를 받고 있다. 직접 붓을 들고 창작활동을 하지는 않지만 미술관 전문 경영인으로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국내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사로서 손색이 없다. 게다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안목만큼은 전문가와 비교할 때 전혀 빠지지 않는다는 얘기를 듣는다. 선천적으로 예술가 기질을 타고난데다 그동안 미술관을 운영하며 갈고닦은 안목이 아마추어 경지를 넘어섰다는 얘기다.박관장은 당초 성악가를 꿈꾸던 여학생이었다. 전남여고 재학 시절부터 음악을 꾸준히 갈고 닦아 성악 실력이 동료들에 비해 출중했다. 59년 여고를 졸업한 소녀는 다음해인 60년 이화여대 음대에 진학한다. 본격적으로 성악을 하기 위해서였다. 본인 뿐만 아니라 집안 식구들 모두 원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은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전공으로서의 성악 역시 그녀에게 그다지 많은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결국 진로를 바꿨다. 고심 끝에 선택한 곳은 숙명여대 의류학과였다. 의류학은 그녀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배울수록 재미도 느꼈다.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본격적으로 의류학을 공부하기 위해 도미, 미 레드포드대학에서 66년 의류학 학사 학위를 받는다. 또 5년 뒤인 71년에는 미 오클라호마 대학에서석사학위를 땄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박관장이 미술관 경영자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따지고 보면 젊은 시절에 배운 의류학이큰 밑받침이 됐다. 미학적인 감각을 기르는데 많은 도움을 줬던 것이다.박관장은 미술관을 연 이후 많은 일을 무리없이 처리해오고 있다.전시회만도 이제까지 무려 2백11회나 개최했다. 평균 한달에 두세번씩 행사를 가졌던 셈이다. 다른 미술관들이 보통 1년에 3~4차례씩 갖는 것에 비하면 놀랄만한 진기록이다. 이미 97년 전시일정도완전히 잡혀 있다. 요즘은 98년 일정을 짜느라 분주하다. 미술동호인들을 위한 미술강좌도 수년째 잘 이끌어오고 있다. 학기별로 대학교수 등 전문가를 초빙, 금호미술관 산하 화요팀과 목요팀 회원들을 상대로 한 강의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또 지난 상반기에 회원들과 함께 프랑스 등 유럽 3개국의 미술관을둘러본데 이어 10월에는 백제문화권 지역을 1박2일 코스로 다녀오기도 했다. 하지만 미술관을 운영하다 보면 안타까운 일도 부지기수다. 특히 전시공간이 제한돼 있어 모든 작가에게 문호를 개방할수 없는 점이 항상 마음에 걸린다. 작가들에게 최대한 배려를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열에 아홉은 기회를 얻지 못하는 형편이다.박관장은 이론적인 부분보다는 현장을 중시한다. 항상 하루에도 몇번씩 전시장 구석구석을 둘러본다. 이번 미술관을 새로 지을 때도현장에서 살다시피했다. 공사 진행 요원들이 제발 믿어달라고 하소연(?)했을 정도다. 전시회 때도 사무실을 지키기보다는 주로 전시장에 나와 관람객이나 미술계 인사들과 얘기를 나누며 하루를 보낸다. 물론 3명의 큐레이터가 있어 가급적 작품해설은 이들에게 맡기고 있지만 때로는 자신이 직접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박관장은 그러나 때론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특히 자신을 재벌가 여장부(그녀는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이다)정도로 바라볼 때는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또 미술관 운영을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냐며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경우도 가끔있어 속이 상한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박관장은 일체의 대관료를 받지 않는다. 물론 입장료도 없다. 대신 열흘쯤 전시공간을빌려주는 대가로 작품 한점을 답례품으로 받고 있는 정도다.박관장은 인복이 많다. 특히 집안의 어른인 박명예회장은 물적,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다. 이번 미술관 신축에도 박명예회장의도움이 컸다. 특히 박명예회장은 예술적인 조예가 깊어 미술관 운영에 조언을 많이 해준다. 주로 비판보다는 격려성 발언이 주류를이룬다. 미국 유학중에 만나 결혼한 남편(강대균 신광전자 회장)도성심껏 외조를 해준다. 원래 말이 별로 없는 성격이라 일일이 챙겨주지는 않지만 항상 뒤에서 말없이 바람막이가 돼 준다. 미국에서살고 있는 1남2녀의 자녀들도 틈만 나면 전화로 힘을 북돋워준다.박관장은 신진작가와 지방작가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려고 노력한다. 중견작가나 유명작가에 비해 지명도가 떨어져 장소를 빌리기가극히 어렵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이는 그녀의 인생 철학과도 일맥 상통한다. 그녀는 항상 모든 일에 감사하는마음으로 산다고 말한다.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을 바라보고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현실에 만족하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물론 이는 어찌 보면 재벌가 출신이라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모른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은 이것이 절대 가식은 아닐 것이라고얘기한다. 미술관의 한 직원은 평소 재벌가 출신답지 않게 무척 겸손하다고 설명한다.박관장의 하루는 무척 분주하다. 한 집안의 주부이기도 한 박관장은 아침 10시만 되면 어김없이 사무실에 나온다. 집이 강남에 있어삼청동 입구에 위치한 미술관까지는 1시간 남짓 걸릴 정도로 멀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출근시간을 지킨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곧바로 하루 일과가 본격 시작된다. 10명의 미술관 식구들과 회의도하고 전시일정도 체크한다. 전시회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전시현장을 둘러보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또 수시로 들르는 미술계인사들을 만나는 것도 주요 일과 가운데 하나다. 여기에다 요즘에는 미술관 마무리 작업을 챙기느라 일이 크게 늘었다. 집에는 빨라야 오후 7시는 돼야 들어간다. 보통 5시쯤 퇴근하는데 교통이 막혀아무리 서둘러도 7시 이전에 들어가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한가지 아쉬운 점은 요즘 들어 시간이 모자라 명상과 기공을 못한다는 것이다. 1년전 천지수련회라는 모임을 통해 시작했는데 마음이 맑아지고 정신이 집중되는 등 많은 효과를 보고 있다.박관장은 국내의 미술계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서양미술이 들어온지 1백여년밖에 안돼 서구 여러 나라들에 비해 역사는 아주 짧지만 가능성만큼은 무궁무진하다고 믿고 있다.게다가 최근 들어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창작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듬직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들 신진작가들에게 맘껏 일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는 것은 자신들의 몫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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