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시대 맞게 역할 위상 정립해야

정부가 기금을 출연해 설립한 국책연구기관은 총 45개에 이른다.재정경제원 산하 한국개발연구원을 비롯, 통상산업부의 산업연구원(KIET), 보건복지부의 보건사회연구원, 농림수산부의 농촌경제연구원 등이 여기에 속한다. 또 교통개발연구원(건설교통부)과 여성개발원(정무2장관실)도 국책연구기관의 하나다. 이밖에 대덕연구단지에 입주해 있는 과학기술 관련 연구소들도 대부분 국책연구기관이다. 하나같이 정부정책을 뒷받침하고 주요 국책사업에 대해 이론적토대를 제공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연구소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을 움직이는 싱크탱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역할과 영향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이들의 위상이 과거만 못하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심지어 이젠 한계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책연구소는 간이역?국책연구기관의 대표주자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때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로서 성가를 드높였다. 71년 닻을 올린 이 연구원은 개발시대로 일컬어지는 70~8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정책 수립의 주역으로서 경제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다. 연구결과는 국가 경제정책의지침이 됐고 민간 기업의 경영활동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권위도 대단해 연구결과에 대해 감히 다른 기관이나 기업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도였다. 자연히 경제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최고의 인재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연구원으로서의 그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현재 경제 각 분야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경제계 리더들의 상당수가 이곳을 거쳤을 정도다. 특히 관변연구기관 및 민간경제연구소를 거의 장악, 경제연구계의 KDI시대를 활짝열었다. 산업연구원의 이규억 원장과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의 김중웅원장을 비롯해 주요 관변, 민간 연구소의 9개 수장자리를 차지하고있는 실정이다. 또 정계와 관계, 재계에도 많은 인재를 배출했고대학교수만도 1백명이 넘는다. 산업연구원 역시 한국 경제를 이끌어온 견인차다. 지난 76년 설립이후 국내의 산업과 통산, 무역 관련 연구소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인정받으며 험난한 세월을 헤쳐왔다. 정부가 기금을 출연해 설립한다른 43개의 국책연구소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국가 정책의 이론적토대를 제공해주는 연구소로서, 또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국책사업의 싱크탱크로서 소임을 다해왔던 것이다. 특히 이공계열 연구소들은 짧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 개발의 산파역을 충실히 소화해왔다.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이들 국책연구소의 위상은 과거에 비해 다소 처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연구소의 외형적인 규모가 한계점에 다다른데다 우수한 인재들이 들어오기를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일부 연구원들의 경우 기회만 닿으면 대학이나 민간연구소로 나가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연구원들 스스로 이젠 국책연구기관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위해 거쳐가는 간이역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라이벌로 떠오르고 있는 재벌그룹의 민간연구소들은 풍족한 자금을 바탕으로 우수한 인재를 대거스카우트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그렇다면 국책연구기관들이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내부적인 요인에서 몇가지를 찾을 수 있다. 그 하나가 자유롭지 못한연구소의 분위기다. 현실적으로 정부가 요구하는 프로젝트만을 수행해야 하는 까닭에 연구원들 나름의 연구를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물론 연구 초기단계나 진행과정에서 자기의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그런 까닭에 우수인력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하나둘 연구소를 떠나는 결과를 초래하고있다. 산업연구원에 근무했던 K씨는 『과거에는 위에서 내려오는분야만을 연구해야 하므로 갈등이 심했다』며 『그런 면에서 대학교수인 지금은 하고 싶은 일만을 골라 할 수 있어 학문적으로 무척자유롭다』고 말한다.국책연구소가 자꾸 처지는 또 다른 이유는 연구원들에 대한 빠듯한처우에서 비롯된다. 급여수준이 대학이나 민간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어 연구원들의 불만이 높다. 국책연구소 가운데 비교적 여건이 낫다는 한국개발연구원의 경우 박사학위를 받고 들어오면 대략 2천7백만원 안팎의 연봉을 받는다. 반면 민간기업 연구소에 가면 3천5백만원은 거뜬히 받을 수 있다. 연봉액수만으로 단순비교를하더라도 20%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따라서 국책연구소 연구원들의 경우 기회만 있으면 떠나려 하고 실제로 90년대 들어 적잖은우수인력이 빠져나갔다. 최근에도 이런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연구소측의 설명이다. 외부적인 요소도 무시 못한다. 80년대 하반기 들어서 경제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진데다 개방의 파고가 밀려들면서 종전처럼 정부의 통제나 지시가 먹혀들 여지가 줄어들었다.경제개발계획의 의미가 퇴색하고 정부가 내는 보고서의 약효도 떨어지게 되면서 국책연구소들은 자연 예전같은 강한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책연구소들이 급격한 환경변화에 수수방관만 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주어진 여건 아래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예전의 위상을 회복하기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과거의독보적인 위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나름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만큼은여전히 갖고 있는 것이다. 한국개발연구원은 지난해부터 박사급 연구원에 한해 연봉제를 도입했다. 연구실적과 대외적인 활동을 종합적으로 평가, 그 결과에 따라 연봉을 지급하고 있다. 연구원 운영에 본격적인 경쟁의 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집중근무시간제등으로 업무효율 높인다또 감량경영에도 힘을 쏟고 있다. 일반 관리직 직원을 중심으로 지난 94년부터 직원수를 줄이기 시작, 2년간 무려 1백여명을 줄였다.또 웬만한 일은 모두 외부 용역회사에 맡기고 있다. 다른 국책연구소들도 상황은 비슷해 산업연구원의 경우 올해부터 박사급 연구원에 대해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다. 특히 산업연구원은 업무의 효율을 높인다는 차원에서 일부 부서를 중심으로 집중근무시간제를 도입, 성공리에 운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국책연구소가 최근 몇년 사이 직원을 거의 뽑지 않는 등 대략 정원의 80% 선에서 인력을 운용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국책연구기관의 변신을 위한 몸부림은 정부논리만을 대변한다는 비판에 대해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올해상반기 한 국책연구기관은 이란 연구보고서에서 우리나라 정부와 공무원의 비효율을 정면으로 비판해 파문을 일으킨 일이있다. 정부정책을 일방적으로 뒷받침하던 과거와 달리 아슬아슬한수준까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례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국책연구소들은 한때 정부의 나팔수라는 불명예스러운 소리를들었다. 정부입장을 옹호하기에 급급한 연구를 진행했던 까닭이다.그러나 이제는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분위기가 감돈다. 문민시대에어울리게 정부의 눈치를 보던 모습이 많이 사라진 느낌이다. 실제로 각 연구기관들은 최근 들어 정부의 눈치를 안보고 독자적인 결과물을 내놓는 사례가 늘고 있다. 때로는 해당 부처와 의견충돌을빚는 일까지 생겨나고 있다. 예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젊은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달라져야 산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한데다 관리자(연구원장)들 역시 이를 인정해주고 있는 것이다.전문가들은 열린 경제시대를 맞아 국책연구기관의 역할과 위상을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 한국개발연구원 출신의 상명대 백웅기 교수(경제학)는 정부가 발주하는 연구를 전체연구물량의 50%정도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나머지 50%는 자율성과 경쟁력을 높여주는 의미에서 연구원 개인에게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다.경제를 비롯한 사회 각 분야에서 정부의 역할이 줄어들고 있다. 반면 민간 부문의 영역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경제민주화도 급격히 확산되는 분위기다. 사회 분위기에 걸맞는 국책연구기관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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