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터 살리자' 개혁의지 흔들

지난 4월 나웅배 전부총리겸 재정경제원장관이 「기업경영투명성제고대책」을 발표하자 재계는 아연 긴장했다. 전직대통령의 비자금사건에 연루된 대기업총수들이 줄줄이 법정에 서는 상황에서 대기업경영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칼질이 시작된게 아니냐는 시각이 많았다. 특히 집권후반기에 접어든 김영삼정부가 사정의지를 드러내는 상황에서 재계는 반대논리 한 번 제대로 펴지못하고 애만 태웠다.신대기업정책의 주요내용은 △기업공시제도강화 △소수주주권강화△감사제도의 정비 및 기능강화 등이었다. 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할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자는 명분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명분(이론)과 실제(현실)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게마련이다. 이를 어떻게 기술적으로 메우느냐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정부의 고민도 여기에 있었다.정부의 신대기업정책중 기업공시제도는 증권관리위원회의 규정을개정해 이미 시행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외이사제도입이나 그룹연결재무제표작성의무화 등은 보류됐다. 그룹의 비서실 기조실 등의법적지위확립문제도 흐지부지됐다. 현실적인 충격이 우려되거나 규제의 형평성문제가 제기된 것은 대부분 철회된 셈이다.경제력집중억제 및 경쟁촉진적 공정거래제도의 정착을 위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개정안도 입법단계에서 상당히 수정됐다. 특히 계열사 채무보증한도를 2001년까지 철폐하겠다는 채무보증강화방안과 친족독립경영회사개념도입은 사실상 백지화됐다.소수주주권행사요건도 당초 예상보다 강화됐다. 김병대 공정거래위총괄과장은 개정안을 수정한 것이 결코 당초 대기업정책에서 후퇴한 게 아니라고 강조한다. 「종전 방침에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한국개발연구원(KDI)등 연구기관 및 대기업의 입장을 종합적으로고려한 궤도수정이라는 입장이다.◆ 정책 후퇴에 경실련 등 시민단체 반발재계는 이같은 방침변경이 위축된 투자마인드를 회복시켜주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며 환영했다. 가뜩이나 경제침체로 어려움을 겪는상황에서 경영활동에 굴레를 씌우려는 정책을 들고 나온 것은 시의적절하지 않다고 받아들였다. 대기업 기조실의 한 관계자는 어차피 경제난국을 뚫고 나갈수 있는게 대기업뿐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사실 정부의 대기업정책중에는 현실성 측면에서 문제가 있는 것들도 적지않았다. 사외이사제가 대표적인 경우이다.주주들의 목소리가 경영에 제대로 반영되지않는 상황에서 회사밖에서 한두사람을사외이사로 영입한다고 해서 회사의 의사결정과정이 달라지고 공익성이 제고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미국의 GE처럼 사내이사보다 사외이사수가 많아 경영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풍토가 조성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그러나 경제정의실천연합은 정부가 친족독립경영회사개념도입을 취소하고 아무런 감시장치없이 현행 지분율 3%미만인 계열분리조건을5~10%로 완화하고 상장회사 기업결합신고의무비율을 10%이상에서15%이상으로 후퇴한 것등은 개정취지를 무력화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경실련의 박병옥실장은 이같은 조항없이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제고할 수 없고 경제력집중을 억제할수 없다고 설명했다.경실련은 지난 10월 성명서를 통해 정부의 정책후퇴는 경제를 볼모로 해서 독과점이익을 취하고있는 재벌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의 경제난이 근본적으로 재벌중심의 외형성장정책에 기인한 구조적위기인 만큼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게 경실련의 입장이다.사실 정부의 대기업정책은 개혁추진과 후퇴를 거듭한 측면이 없지않다. 이는 김영삼대통령의 고민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김영삼대통령의 대기업에 대한 인식은 간단하다. 대기업도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한경쟁시대에 국가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선 중소기업과 대기업간 협조적 관계를 강화해나가는 한편 대기업의 건전한 발전을 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지난 2월 중소기업청을 신설하고 공정거래위원회의 위상을 장관급부서로 격상시킨 것도 이같은 인식에 따른 것이다. 정경유착도 단절돼야 한다는 점을 기회있을 때마다 천명했다. 취임초 청와대에서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밝힌 것도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는의지를 반영한 것이다.그러나 93년말 30대대기업집단의 총수들을 청와대에서 잇따라 면담하면서 재벌개혁에 대한 의지가 어느정도 가라앉는 모습이었다. 대통령과 대기업총수의 만남으로 현장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되고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없지않았다.◆ 신대기업정책, 경영투명성 제고 초점올봄에 나온 신대기업정책은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그런 취지가 아니었다. 그동안의 대기업정책이 여신관리 업종전문화에 초점이 맞춰져있었다면 이번 정책은 경영의 투명성확보에 무게중심이 실려있다.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들의 경영활동을 보장해주는 대신 우월적지위남용및 불공정거래 등은 단절시키겠다는 취지였다.그러나 기업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규제로 비춰지는 경향이 있다. 대기업들은 새로운 정책이 기업의 힘(경쟁력)을 악화시킨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최근 국제경쟁이 치열해지며 대만에서조차 기업집단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대기업에 부담을 주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강한 목소리도 있었다. 정부의 신대기업정책이 현실의 목소리에밀려 어느 정도 후퇴한 것으로 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한승수 부총리는 지난 9월3일 「경기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기업활력회복차원에서 공정거래법을 재계의견을 수렴해 합리적으로 개정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이때부터 신대기업정책의 방향이 선회된 셈이다. 수출 및 투자가위축되고 경상수지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기업의욕을 저하시킬 수 있는 제도를 굳이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가 당정에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정치논리로 보나 경제논리로 보나 재검토가 불가피했다.그러나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정부의 대기업정책이 혼선을 빚고있는게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정부가 바람몰이식으로 정책을 발표하고 후유증을 우려해 다시 후퇴하는게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차제에 신중하게 정책을 검토한 후 발표해야한다는 지적도 있다.국가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정부기관이 한건주의식으로 정책을 발표하고 또다른 이유 때문에 철회한다면 정부의 신뢰성이 떨어질 수있다는 우려도 있다.물론 대기업들도 그룹내 공정거래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주주위주의 경영개념도 서둘러도입해야한다. 다만 정부의 대기업정책은 규제를 최소화하면서 기업경영투명성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펼쳐져야한다는게 국민들의 바람이다.서공렬 대우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기업활동위축을 고려, 경제력집중억제를 위한 급격한 조치는 당분간 자제될 것으로 전망했다. 대통령선거가 있는 97년의 경우도 대기업관련 특단의 조치는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부당내부거래, 위장계열사보유등 그룹내 상호보조행위 및 집단적 행위는 강도높은 규제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기업소유 및 지배구조에 대한 논의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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