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 성실로 "뭔가 보여주겠다"

인천시 서구 계좌동 속칭 「가구공단」에서 연간 20억원 규모의(주)천일로단조를 경영하는 정윤언 사장(52). 그는 요즘처럼 온도차가 심하거나 회사일로 밤샘하고 나면 오른쪽 무릎인대가 아파서어쩔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지난 93년 4월부터 6개월간 인천구치소에서 보낸 악몽이 떠오른다. 탄탄하게 굴러가던 회사가 원청업체의 부도와 과잉시설투자로 부도나면서 「부정수표방지법」위반혐의로 팔자에도 없는 구치소 생활을 한 것이다. 좁은 감방에서 「양반자세」로 늘 앉다 보니 무릎인대가 늘어났지만 구치소에서 제대로치료를 못해 지병이 돼 버렸다.◆ 부도로 구치소 생활까지정사장은 지난 75년부터 가열로와 용해로 등 각종 노(爐)와 자동차부품 기계부품 등을 생산하는 업체를 운영해 왔지만 중소기업들에흔히 있는 「부도」를 남의 얘기로만 치부했다. 전체 매출액의 60%이상을 차지하는 타워크레인용 부품 등 산업용부품에 대한 기업체의 수요가 잇따랐다. 자동차부품 3차 벤더였지만 영업력과 가격면에서도 경쟁력을 갖췄다고 자부했다. 또한 창원공단에 있는 삼미특수강에 대형 가열로를 20여개 납품하는 등 기술력도 인정받았다.반응이 좋은 만큼 매출도 꾸준히 늘었다. 종업원들의 급여수준도「가구공단」내에서는 높은편에 속했다. 89년에는 인천시 빙상경기연맹회장을 맡는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서도 기여하기도 했다.수천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수백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대기업체 사장들이 남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결국 정사장도 「부도」라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하고 말았다.내실있게 성장하던 회사가 지난 92년 (주)한양이 부도나면서 흔들렸다. 당시 정사장은 한양 계열사인 (주)한양공영에 타워크레인 부품을 납품하고 있었다. 전체 매출액의 70% 이상을 이 회사에서 올렸는데 모기업의 부도로 한양공영이 흔들리자 천일로단조도 연달아경영이 어려워졌다. 월평균 2억원대에서 5천만원대로 매출액이 뚝떨어졌다.설상가상으로 공장을 옮길 계획으로 경기도 시화지구에 3억5천만원을 주고 1천4백여평을 매입했는데 이것도 매입시점이 적절치 못했다. 토지에 돈이 묶이면서 회사운전자금이 빡빡하게 돌아갔다.게다가 모든 것을 낙관적으로 바라본 정사장의 판단미스는 회사를더욱 코너로 몰고 갔다. 정사장은 자신의 판단잘못을 처음에는 인정치 않다가 구치소에서 겨우 오류를 발견할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부도를 낸 중소기업경영자들이 가장 인정하기 싫은 것이경영자의 오류지만 이를 냉철히 분석할 때만 재기할 수 있다고 충고했다.이같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마침내 첫부도가 났다. 정사장은 92년 2월 18일 한일은행 인천지점에 돌아온 2천5백만원짜리당좌수표를 막지 못했다. 겨우 뒷수습을 해서 최종부도는 막았지만이것도 미봉책에 불과했다. 1차부도 이후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경기도 계속 나빠졌다. 회사는 사채에의존할 정도로 악화됐다. 처가에 손을 내밀기도 했지만 결국 정사장은 손을 들고 말았다. 93년 2월 1천만원을 막지 못하고 최종부도처리된다.그는 즉각적으로 「부정수표방지법」위반 혐의로 「기소중지」즉수배자가 됐다. 『20년간 성실하게 일한 결과가 이것밖에 안되는가』라는 회의로 의욕을 상실하기도 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설악산 지리산 오대산 등을 오르내렸다. 등산을 하면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러나 정사장은 93년 4월 마니산에 다녀오는 도중 불심검문에 걸려 구속수감된다.이 대목에서도 정사장은 많은 아쉬움을 표했다. 지금은 부도가 나도 1개월간 채권자들과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주지만당시는 붙잡히면 「맞아 죽는」험한 분위기였다. 정사장은 고의로부도를 내지 않았으면 재기가능성여부를 먼저 검토하는 것이 채권자들한테도 유리하다도 말한다. 또한 부도업체 사장들도 채권자들한테 「고양이앞의 쥐」처럼 행동하지 말고 재기의사를 떳떳이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충고한다. 나아가 「팔기회」등 사회단체의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현명한 방안이라고 권한다.하여튼 정사장의 구속은 인천사회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회사는 87년 국민은행의 「중소유망업체」로 선정됐고 91년에는병역특례업체로 뽑힐 정도로 내실있다고 알려진 업체였다. 또한 사업을 하면서 정사장은 「신용 하나만은 확실하다」는 인상을 심어줬다. 게다가 빙상경기연맹회장을 맡는 등 지역사회발전에 기여한점 때문에 그의 구속을 안타깝게 생각했다.이같은 분위기와 20여년간 사업을 하면서 뿌려놓은 인맥이 재기의밑거름이 됐다. 구치소 수감중에도 재기를 도와주려는 손길이 잇따랐다. 무엇보다 종업원들이 동요하지 않고 사태수습에 나선 것이가장 큰 힘이 됐다. 물론 부인이 사채를 끌어들이면서까지 급여를제때 지불한게 종업원들의 이탈을 방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주거래은행인 국민은행 숭의동지점은 재기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했다. 정사장과 천일로단조의 재무구조와 신용상태에 대해 누구보다잘 알고 있었다. 지점장은 채권단이 경매에 부친 공장을 다시 인수할 수 있게끔 자금을 융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팔기회’등 사회단체 도움 요청하라하늘도 그의 편이었다. 93년 8월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됨으로써타인명의로 대출을 받아내는게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듣고 『이제모든 게 틀렸구나』라고 자포자기했을 때 면회온 아내가 『금융실명제가 발표되기 하루전에 3억 6천만원의 대출을 받았다』고 알려줬다. 사형수가 무기로 감형되는 것 이상의 심정이었다.마침내 정 사장은 93년 10월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융통한 1억원과 대출금을 합해4억6천만원에 다시 공장을 사들였다. 부도가 난 4억여원의 당좌수표도 주변의 도움으로 변제했다. 그런 다음 『두번 실패는 있을 수없다』는 각오로 50여명에 달하던 종업원을 읍참마속의 심정으로절반으로 줄였다. 은행이자 등 경비절감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조치였다.정사장은 확실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착수했다. 그는 이른아침부터 거래처를 찾아 뛰어다닌다. 한개라도 더 물량을 확보하기위해서다. 귀가시간도 12시를 넘기기 일쑤다. 부도전보다 절반으로떨어진 매출액을 끌어올려 공장을 정상가동시키기 위해서다. 영업력을 강화하는 것 외에도 신제품과 신기술을 개발하는데도 더욱 박차를 가했다.현재 특허청에 출원중인 「그랜드」란 단조밸브는 이같은 노력의결실이다. 스테인리스 분말을 압축시켜 불에 구워 낸 이 제품은 기존 제품보다 압축강도와 재질이 균등해졌다는 평을 듣고 있다. 가격도 30%나 낮출 수 있었다. 이밖에도 가격과 기술경쟁력을 갖춘자동차부품 등을 개발, 시판할 예정이다.요즘같은 연말연시면 정사장은 자신처럼 산으로 지방으로 도망다니는 중소기업사장들을 더욱 생각한다. 언론기관의 인터뷰에 응하고각종 좌담회에 나가는 것도 이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나눠보자는 마음에서다. 일종의 동병상련이라고 할까.새해를 맞는 정사장의 각오는 남다르다. 불황앞에 의기소침하기 보다는 R&D 투자를 늘리고 적극적인 시장개척으로 확고한 발판을 구축하겠다는 의욕에 차있다. 불황은 위기이자 기회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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