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따라 '판본' 변화무쌍

「38따라지」. 해방과 6·25를 전후해 북에서 남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대개가 재산을 북에다 두고 온 빈털터리였다. 이러한 월남자들을 화투로 하는 놀이인 「도리짓고 땡」에서 끝발없는 패에 불과한 것에 비유한 말이다. 당시 남북을 가르는 경계선인 북위 38도선을 따라 내려왔다고 그렇게 이름 붙였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화투가 사회현상에 대해 은유로 등장한 최초의 용어다.「사이비고스톱」. 고스톱에서 흑싸리(4)·매조(2)·비(12)의 패4장씩 모두 12장을 차지하면 판돈으로 내놓은 돈과 딴 돈을 모두상대방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규칙의 최신판이다. 「아가동산」사건이 터지고 나서 새로 생겼다는 고스톱판본이다. 사이비종교의 폐해를 꼬집은 것으로 패의 숫자와 앞글자만 따서 발음대로 사이비고스톱으로 이름붙여진 것이다.화투는 더 이상 노름이나 도박의 소도구도, 소일거리나 친목도모의매개체도 아니다. 이제 화투는 시대를 암시하는 「암호」가 되는가하면 사회상을 반영하는 「메타포」가 됐다. 서울정도 6백년을 기념하는 타임캡슐에도 화투는 버젓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두산그룹의 창립 1백주년기념행사로 그룹내 고스톱 최고수뽑기가 열리기도 했다.화투는 「누구라도 알아들을 수 있다」, 즉 「이해」를 전제로한메타포이거나 암호다. 그만큼 화투는 전국적인, 남녀노소 가릴 것없이 누구나 알아듣고 고개를 끄떡일 수 있는 하나의「두운(頭韻)」인 셈이다.48장 또는 일종의 와일드카드인 조커를 포함해 48장이상의 화투패로 즐길 수 있는 게임은 도리짓고 땡·아도사키·월남뽕·민화투·육백·삼봉 등 다양하다.그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즐기는 화투게임의 대표주자는 바로 고스톱. 「셋만 모이면 고스톱」이라는 말은 이제 귀에 박혔다. 둘이앉아 「맞고」라도 칠 정도다. 「고스톱망국론」까지 나올 정도로일상에 깊이 파고들었다. 소소하게는 친구·동료들끼리의 밥값내기부터 시작해 상갓집의 밤샘에 이르기까지 사람모이는 장소에 없어서는 안될 강력한 흡착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스톱이 이런 흡인력을 갖는 데에는 판본이 업그레이드가 가능해 나름대로 게임방법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데 있다. 이러한 판본의 변화는 시대상을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이른바 고스톱판본의 시조라는 전두환고스톱에서부터 최신의 사이비고스톱에 이르기까지 등장한 다양한고스톱판본은 곧 그때그때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정도 6백년 타임캡슐에도 한자리 차지고스톱의 다양한 판본이 등장하게 된 데에는 대개 정치·사회적 사건이 주요한 동기가 됐다. 80년대의 최고인기 고스톱이었던 이른바전두환고스톱은 고스톱이라는 게임의 일정 테두리 내에서 성립되는게임규칙을 완전히 무시한 최초의 변형판본이다. 깔린 패를 「싹쓸이」한 참가자가 다른 선수의 패 가운데 가지고 싶은 패를 아무거나 빼앗아 올 수 있다는 룰을 가진 전두환고스톱은 12·12와 광주민주화항쟁을 거치면서 신군부의 전횡과 폭력에 가위눌린 힘없는민초들이 화투판에서 울분을 풀어제낀 일종의 자위였다.전두환고스톱이 승자의 권력을 비꼰 비아냥거림의 고스톱이라면 패자의 무기력함을 빗댄 동정의 고스톱도 있다. 바로 최규하고스톱이다. 판쓸이를 한 사람이 오히려 자기 것을 상대편에게 모두 줘야하는 주객이 역전된 게임규칙을 가지고 있다. 신군부세력의 위세에눌려 대통령의 권한과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비친 최규하전대통령의 신세를 점수가 나고도 눈치를 봐야한다는 게임방법으로 통렬히 비꼰는 한편 동정심이 가는 애교어린 고스톱이다.점수가 난 사람이 고냐 스톱이냐의 여부를 상대편에게 물어보고 결정해야 하는 이민우고스톱은 지난 85년 2·12총선에서 거센 야당바람을 일으켰지만 양김씨의 와중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민우전신민당총재를 빗대서 만들어진 판본이다.6공때에는 오공비리고스톱과 6·29고스톱(일명 노태우고스톱)이 인기를 끌었다. 이전까지의 고스톱판본은 판 전체의 룰이 변하는 특징이 있다.반면에 6공이후에 등장하는 고스톱판본은 특정패를 이용해 고스톱에 변화를 줘 판본의 이름만으로도 대충 어떤 화투패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게끔 만들어진 고스톱들이 주류를 이뤘다.오공비리고스톱은 5공청문회를 계기로 나타난 것으로 화투패중 난초(5) 공산(8) 비(12) 매조(2)의 열끗패를 모두 먹으면 보너스점수를 인정해주는 규칙을 갖고 있다. 6·29고스톱은 화투패중 목단(6)열끗, 매조(2) 피, 국진(9) 피를 먹은 사람이 상대방에게 일정점수를 주는 내용의 고스톱판본이다.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삼풍백화점붕괴사고를 빗댄 고스톱도 등장했다. 단풍패 3장(삼풍)이 들어 온 사람은 부실공사의 책임을 져 상대편에게 무조건 판돈을 내준다. 또 다른 삼풍고스톱은 단풍패 석장을 패로 받은 사람이 이를 상대방에게 내보이면 상대편 두사람은무너지는 시늉과 함께 기본점수에 해당하는 돈을 물어내고 패를 돌린 사람은 부실공사의 책임을 물어 두사람분의 벌금을 물어내는 방법의 고스톱이다.풍(10) 열끗짜리하나와 벚꽃(3) 패의 하나가 같이 들어 온 사람이참가자 전원의 패를 모두 본 다음 한명을 지명해 「팽(烹)」 할 수있는 권한을 갖는 YS(영삼)고스톱, 3점이 난 후 고를 외치더라도다음 순서에서 점수가 안 나거나 불리해지면 고한 것을 번복해 애초 점수대로 판돈을 가져 갈 수 있는 DJ고스톱, 비 석장을 들고 흔들었다가 폭탄으로 비 넉장을 모두 확보하면 상대편으로부터 패2장씩을 가져오고 점수가 나면 룰에 따라 정한 일정한 배수이상의돈을 받지만 비 석장을 흔들고 점수를 못 내면 상대편에게 일정액의 벌금을 내는 비자금고스톱 등도 있다. 모두 92년 대통령선거후에 만들어진 신종판본들이다.이러한 고스톱판본의 변화에 있어 가장 큰 특징은 고스톱에 특정인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 현실에서 저항하기 힘든 권력을 깎아내림으로써 일종의 보상이나 만족을 얻으려는 심리에 기인하는 것으로해석이 가능하다.화투의 원산지를 가리는 국적설도 한창 논란이 되고 있다. 포르투갈상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유입된 「카르타놀이딱지」가 변형돼 하나후다(花札)라는 일본화투가 됐으며 하나후다가 조선말(또는 일제강점기)에 대마도의 상인들을 통해 한국으로 흘러 들어와 현재에이르렀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던 화투의 유래다.그러나 「신선이 남긴 동양화」라는 책을 쓴 정영모씨는 책에서 화투가 한국 것이라며 화투의 일본국적설을 전적으로 부인한다.심지어 지난해 3월 MBC-TV의 「화투」라는 3·1절특집프로그램에서화투가 일제의 잔재인양 묘사된 것을 문제삼아 프로그램의 방영중단을 요구하는 신문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만큼 화투의 한국국적설에 확신을 갖고 있다.◆ 다른선수 패 빼앗는 ‘전두환고스톱’ 인기정씨는 『현재 일본화투인 하나후다를 제대로 알고있는 사람은 국내에는 없으며 일본화투는 거의 소멸됐다. 또 우리화투에만 있는오광의 광(光)이라는 글자가 일본화투에는 없으며 그림의 내용이나패를 부르는 이름이 한국산임을 증명해주고 있다』며 화투의 한국국적설을 주장하고 있다. 정씨는 또 『한국과 일본의 화투는 얼핏보면 그림이 비슷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확연히 다르다』며 『곧 발간될 신선이 남긴 동양화 제5권에 「화투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화투의 한국국적설을 증명해보이겠다』고 밝혔다.화투에 대한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화투놀이의 대표주자인고스톱을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인 사법처리기준이다. 어디까지가도박이고 어디까지가 오락인지 일반인들로서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서울경찰청의 김용태경위는 『현재 검찰에 고스톱을 하다 걸린 도박사범에 있어 상습성여부, 판돈, 딴 돈의 사용처, 장소, 인원구성등 정황에 따라 입건·즉심·훈방 등 수사상의 기준이 있는 것으로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93년 7월 서울 형사지법항소심에서 기본 3점당 5백원, 추가 2점당 5백원의 고스톱은 무죄라는 재미있는 판결이 나왔다. 당시 재판부는 88년에 내려진 같은조건의 무죄판결에 이어 두번째로 무죄판결을 내린 것이다. 당시법조일각에서는 3점당 5백원이하는 무조건 봐주고 그 이상이라고무조건 처벌할 수는 없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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