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상품 물밀듯 몰려온다

이제 「가격파괴」란 말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좋은 품질의 상품을 제조업체가 정한 가격보다 파격적으로 싸게 파는 것을 의미하는이 신조어는 어느새 친숙한 일상언어가 돼버렸다. 그만큼 「가격파괴」현상은 흔하다. 같은 물건이라 하더라도 어느 매장에서 구입했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얼마나 싸게 파느냐가 유통업체의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부상한 것이다.물가는 계속 오른다고 하는데 유통업체에서 가격파괴가 가능한 이유는 뭘까. 일본 전역에 가격파괴 바람이 거세게 불던 94년 여름에일본의 경제주간지인 는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해답을 제시했다.당시 이 주간지가 지목한 가격파괴의 주역은 「수입품」이었다. 표지그림도 상징적이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지의 상품들이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일본에 상륙하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당시 일본 유통가를 휩쓸고 있는 가격파괴 열풍이해외에서 생산된 저가품을 일본에 수입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꼬집고 있다.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할인점 등 대형 유통매장에서 가격파괴가가능한 주요한 이유는 품질좋은 상품을 해외에서 싼값에 수입, 판매하는데 있다. 물론 국산품들도 할인점에서 싸게 팔린다.그러나 가격파괴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든든한 토대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국산품은 인건비나 원자재 등이 저렴한 지역에서생산된 수입품보다 가격을 낮출 수 있는 여지가 적기 때문이다. 국산품만으로는 상품 구색을 다양하게 갖추기에도 부족하다.실제로 가격파괴란 말이 유행하면서 유통업체의 상품 수입은 급격히 늘어났다. 유통전문그룹인 뉴코아의 경우 지난해 11월까지만3백만달러(한화 약 24억원)어치의 소비재를 수입했다. 음료와 제과의류 생활용품 문구류 목욕용품 등 각종 소비제품을 세계 각지에서수입, 자사 할인매장인 킴스클럽에서 판매하다 보니 소비재 수입이늘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저가품·고가품 안가리고 수입비단 킴스클럽만이 아니다. E마트와 프라이스클럽 카르푸 마크로등도 마찬가지다. 이들 할인점의 경우 전체 매출액에서 수입제품이차지하는 비율은 10∼15%에 달한다. 심할 경우 수입상품 비율이20%에 달하기도 한다. 소비자가 1만원 상당의 상품을 구입할 경우2천원은 수입품을 사는데 쓴다는 얘기다. 결국 가격파괴가 유통업체의 수입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유통업체들이 가격파괴를 시도하게 된 원인이 유통시장 개방 때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근본 책임은 유통시장 개방에돌아간다. 지난해 유통시장이 전면 개방되면서 국내 유통업체는 해외 유통업체들과 경쟁하기 위해 「좋은 상품을 싸게」 공급하는 가격파괴를 시도하게 된 것이다. 유통시장 개방이 상품시장의 확대개방을 가속화시키고 있는 셈이다.실제로 대형 유통업체들은 유통시장 전면 개방 직전인 94년말부터좋은 수입상품을 확보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상품 정보를 수집하는해외상품개발팀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팀은 해외상품구매팀 또는 해외상품정보팀 등으로도 불리는데 이름이 나타내듯 세계 각지에서 좋은 상품을 찾아 수입해 오는 일을 하고 있다. 세계 시장을대상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글로벌 마케팅」이 이 팀의 주요 업무인 셈이다.유통업체들이 유통시장 개방 대응책으로 가격파괴를 주도하는 저가의 상품만을 수입하는 것은 아니다. 백화점의 경우에는 할인점과차별화하기 위해 고가의 유명 브랜드 직수입에도 힘을 쏟고 있다.롯데백화점의 경우 프랑스의 유명 식품 브랜드인 「포숑」과 의류브랜드인 「루치아노 소프라니」 「아네스베」 등을 수입하고 있다. 신세계는 「에스까다」 「로렐」 「조지오 아르마니」 등의 고급 의류를 직수입해 들여오고 있다.더 나아가 세계 각국에서 수입해온 목욕용품 향수 등 화장품과 도자기 수예품 액자 등 수입 생활용품을 각각 「크랩트리&이블린」과「재스민」이란 자체 브랜드 매장에서 판매하고 있다.신세계는 또 차별화 전략으로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생산된 상품을 수입, 자체 브랜드를 붙여 팔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신세계 노하우」란 브랜드로 팔리고 있는 의류들이다. 이 제품들은독일 영국 벨기에 등에서 신세계백화점의 주문을 받아 생산된 것들이다.유통업체들이 수입에 앞장선다는 비난에 대해 유통업체들은 할 말이 많다. 『세계 시장에 장벽이 없어지는 상황에서 편협한 시각으로 수입, 수출을 논할 수는 없다. 품질이 좋고 가격이 싸다면 국적을 막론하고 물건을 구입하는 소비성향이 일반화되고 있는데 무조건 국산품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유통업체의 일차적인의무는 소비자에게 좋은 상품을 저렴하게 공급하는 일이다.』(홍충섭 신세계 상품구성사업부 이사) 유통시장 전면 개방은 결국 한국시장의 글로벌화를 의미한다는 지적이다. 유통업체뿐만이 아니라제조업체까지도 삭막한 무한경쟁 상황에 몰려있다는 얘기다.◆ 합리적 가격·고품질만이 국산품이 살길실제로 외국 유통업체의 국내 진출 이후 국내 제조업체는 여러가지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해외 다단계판매업체의진출을 꼽을 수 있다. 95년 7월 방문판매법 개정으로 국내 다단계판매시장은 해외 업체에 완전 개방되면서 외국 다단계업체가 잇따라 진출했다. 현재 다단계판매시장은 90% 이상을 암웨이와 뉴스킨등 외국 다단계회사들이 차지하고 있다.문제는 다단계판매시장을 빼앗겼다는데 있지 않다. 암웨이와 뉴스킨 등 외국 다단계회사들이 주로 취급하고 있는 화장품과 건강식품생활용품 등의 시장이 급속도로 잠식당하고 있다는데 있다.LG생활건강의 관계자는 『지난해 암웨이와 뉴스킨 두 회사가 판매한 화장품 양이 국내 화장품시장의 10% 이상은 충분히 넘는 것으로추정된다』고 말했다.외국계 다단계판매회사의 하나인 렉솔코리아의 경우 한달에 10억원어치의 정수기를 판매하고 있다. 정수기 판매업체인 웅진코웨이측은 『외국 다단계 판매회사의 정수기가 아직까지는 전체 시장에 별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점점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으로예상된다』고 밝혔다.외국 통신판매업체들의 활동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의 샤퍼이미지, 영국의 프리맨스, 프랑스의 라후르뜨 등 외국 통판업체들은 카탈로그 등 상품 안내책자를 통해 국내 소비자들로부터 주문을 받아수입 상품을 제공해 주고 있다. 또다른 수입 경로인 셈이다.해외 전문 유통업체들의 진출이 본격화될 경우 소비재 수입품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현재 국내 진출설이 무성한 외국 유통업체는 미국의 장난감 전문업체인 토이저러스와 미국의 할인점인 K마트, 미국 양판점인 시어스, 일본의 백화점인 다카시마야 등이다.이들 업체가 실제로 국내에 상륙할 경우 그 파급효과는 어마어마할것으로 보인다. 일차적으로는 유통업체가 타격을 받겠지만 궁극적인 피해는 제조업체에 돌아갈 것이 확실시된다. 외국 유통업체를통해 양질의 저렴한 상품이 쏟아져 들어와 소비자들의 수입품 구매를 부추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외국 유통업체와 경쟁하기 위해서 국내 유통업체들이 소비재 수입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것은 분명하다.유통시장 개방은 결국 우리나라 시장이 글로벌시장이 됐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유통시장 개방이 상품시장 개방의 폭을 더욱더 확대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만과 중국 미국 유럽 등의 상품이 뗏목을 타고 일본에 건너가 유통혁명을 일으켰듯 지금 세계 각국의 상품이활짝 열린 유통시장의 문을 통해 국내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와 국산품 애용이니 하는 말은 너무나 진부하고 시대착오적이고 효력도 없다. 그리고 소비자는 좋은 품질의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권리가 있다. 좋은 품질의 저렴한 수입품을 공급하는 유통업체나 그것을 사는 소비자를 탓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일차적인 책임은 상품을 만드는 제조업체가 져야한다. 소비자의 마음을동하게 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의 고품질 상품을 개발하는 것만이 유통시장 개방시대에 국산품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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