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빚 순익의 4배…'헛장사' 일쑤

기업이 쓰러지고 은행이 부실화되고 있다. 물론 기업도산의 주범은회복기미를 보이지않는 침체된 경기이다.따라서 불황과 은행부실은어느정도 상관관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금융기관이라고 우리경제와 무관하게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건설경기가 꺾이자 대기업 중소기업 가릴것없이 줄줄이무너졌다.또 철강경기 부진탓에 철강업체들이 너나없이 헉헉대고 있다. 기업부도는 암세포처럼 급속하게 번져가고 있다. 그렇다고 뚜렷한 처방도 없는 실정이다.95년의 경우 2월엔 덕산그룹, 4월엔 유원건설이 터졌다. 96년초엔우성그룹이 고꾸라졌다. 올들어선 사상처음으로 금융기관여신기준10대그룹에 속하는 한보철강이 쓰러졌다.그러다보니 이들기업에 여신(지급보증+대출)을 제공한 은행들이속으로 곪아가고있다. 6대시중은행의 불건전여신을 보더라도 96년말현재 8조3천2백억원에 이르고 있다. 불건전여신이란 공표되는 부실여신외에 6개월이상 연체돼 고정으로분류되는 여신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사실상의 부실채권을 말한다.물론 겉으로 드러난 공식적인 부실여신규모는 96년말현재1조5천7백64억원으로 95년말과 비교해 단지 1백42억원 늘어나는데그쳤다. 그러나 이들 은행들이 떼인만큼 장부상으로 갚은(대손상각처리) 돈은 9천4백92억원이나 된다. 6대시은의 작년 당기순이익합계가 2천1백82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큰 규모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부은행 제외하고 BIS비율 10% 안지켜여기에다 한보철강까지 얹어 생각해보자.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한보철강에 대한 순여신은 △제일 1조7백83억원 △산업 8천3백25억원 △조흥 4천9백40억원 △외환 4천2백12억원이다. 은행들이야 담보를 챙기고 있어 대출금회수에 문제없다고 하지만 법정관리중인기업으로부터 대출금을 거두기란 「부지하세월」이다. 이자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담보라도 충분히 챙겨둔 것도 아니다.제일은행의 담보과부족은 1천5백31억원, 외환은행은 1백58억원이다. 이유야 어디에 있든 특혜대출이란 따가운 지적을 면할수 없게됐다. 그렇다고 사업성평가를 제대로 한것도 아니지않은가.부실채권은 무엇보다 은행의 경영수지를 악화시키는 암적인 요소가되고 있다. 부실채권을 많이 보유하고있는 은행은 이자수입의 감면내지 유예로 해당자금의 조달금리만큼 손실을 그대로 떠안게된다.한보그룹에 대한 은행순여신은 3조4천7백67억원. 한보계열사에 대한 대출까지 합칠 경우 4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은행대출금리를 평균 10%로만 가정해 대충 계산해도 올해 4천억원 가량의 미수이자가 발생하는 셈이다. 기회비용까지 감안한다면 수입차질액이 4천5백억원을 훌쩍 뛰어넘을 전망이다.또 대출금 가운데 2조원 가량으로 추정되는 은행계정대출의 부실에따른 대손충당금 부담규모도 4천억원을 웃돌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한보부도에 따른 은행들의 수지악화규모는 적어도 올해8천5백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그래서 일부에서는 벌써 올해 은행장사를 「다 해먹었다」는 성급한 얘기도 나온다. 제일은행의 경우 한보부도로 인한 이익감소분이2천억원 정도에 이를 전망이고 조흥은행도 줄잡아 1천억원이 된다.은행장사로 벌어들인 돈을 부도기업 뒤치다꺼리하는데 날려버릴 판이다.부실채권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면 자금이 수십년간 고정되고 회전되지 않기 때문에 재투자회전이 이뤄졌을 때보다 상대적으로 손해가 더 커진다. 부실의 늪에서 회복하기가 그만큼 쉽지않다. 부실채권은 또 은행의 안정성을 저해하는 주요요인이 되고 있다. 거액의대손상각과 대손충당금설정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은행의 자기자본을 잠식, 은행 경영상 가장 중요한 안정성을 추락시키는 것이다. 은행들의 자산건전성을 측정하는 지표중 대표적인게 BIS(국제결제은행)기준 자기자본비율이다. BIS비율은 최소 8%는 유지해야 국내에서든 국제무대에서든 은행다운 대접을 받는다. 즉 위험자산에 대한 자기자본비중이 일정규모를 넘어야 「믿고 거래할 수 있는」 은행으로 봐준다는 얘기다. 간단한 예로 국내에서 순이익 1위를 기록하는 국민은행이 해외지점을 제대로 열지 못한 것은 바로 BIS비율이 낮았기 때문이다.한국은행은 국내은행들의 BIS비율을 10%이상으로 유지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신한은행등 극히 일부은행만 제외하고 10%이상의BIS비율을 나타내는 국내은행들은 없다.은행들이 작년중 주식예탁증서(DR)발행등 갖은 방법을 동원, 자기자본비율을 끌어올리려고 노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공룡 한보는 은행들이 공들인 작업을 한순간에 수포로만들어버렸다. 부실발생으로 BIS비율 추락은 불가피해졌다. 은행들은 다시 자기자본확대라는 명분을 걸고 해외시장 여기저기를 기웃거려야하는처지에 빠졌다. 이로 인해 한국물 공급과잉에 따른 또 다른 「코리안프리미엄」이 형성될게 뻔하다.부실채권은 주주에 대한 배당률에도 영향을 미치게 돼 은행이미지와 대외 신인도에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그 결과 나타난 단적인 예가 최근 해외금융시장에서 국내은행들이 겪은 수모다. 한보비리가 터지자 해외에 진출해있는 국내은행들은 현지 감독당국으로부터 유동성리스크 대처능력, 즉 필요자금을 제때 조달해 지급할 수있는지에 관해 집중적인 질문을 받아야했다. 일본은 물론 미국 홍콩 독일등의 감독당국은 현지 한국계은행들을 불러 『한보철강부도로 인한 피해와 유동성대책을 보고하라』고 요구했다. 특히 제일은행은 세계적인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사와 S&P(스탠더드 앤드 푸어스)사로부터 「요주의기관」으로 분류됐다. 국내은행에 대한 이미지가 급전직하 곤두박질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지난달 30일과 31일엔 한 일본단자사(자금중개회사)가 한국계은행에 대한 단기자금공여를 거절했다. 조흥 제일 서울은행등이 자금을제때 막지못해 일시나마 부도위기에까지 몰렸었다. 이에따라 조달금리도 급상승, 제일등 한보관련 채권은행들의 경우 종전보다 평균20bp(1bp는 0.01%)오르는 양상도 나타났다. 은행전체적으로는 조달금리가 평균 5bp가량 상승한 것으로 파악됐다.(이경식 한국은행총재)◆ 부실여신 발생은 금융산업 낙후성이 원인사태가 이같이 흐르자 6대시중은행들은 2월초 부랴부랴 5억달러를일본현지에 긴급히 송금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부실여신 발생에 대한 책임을 은행에만 물을 순 없다. 근본적으론 국내 금융산업의 낙후성에 그 원인이 있다. 정부가 은행장및 임원인사에 직간접으로간섭하는 관행이 사라지지 않는 한 「기업부패→은행부패」는 어쩔수 없는 하나의 고리로 작용한다. 한보에 대한 여신지원을 보면 은행들은 심사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불과 최근 2년 사이에 2조원의 여신을 퍼부어댔다. 일선 점포장들의 반대가 없을리 만무했고말단행원이 봐도 「비정상적인」 금융지원이었다. 부도나기 직전에는 은행장들도 한보에 대한 여신공급을 극도로 꺼려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은행장들은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 한통화에 「OK사인」을 냈다. 만약 이를 거절이라도 한다면 당장 괘씸죄에 걸린다. 이 죄목에 몰린 은행장들의 말로가 어떠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민정부들어 은행장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3개월에 한명꼴로 수갑을 차야했다. 이들중 상당수는 「외압을 외면한 대가」로 옥살이를 했다는 후문도 있다.물론 허술하기 짝이 없는 국내은행들의 여신운용체계와 자금운용방법도 부실을 부추겼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현재 대부분의 은행들은 여신실무자 지점장 임원 은행장 이사회에 따라 여신전결한도를 차등화하고 있다. 보통 30억원이 넘으면 이사회에 회부된다. 그러나 사실상은 은행장이 여신을 주무르고 있다.게다가 국내은행들의 자산 포트폴리오 관리는 아직걸음마단계다.우선 기업이 현재 「잘 나가기만 하면」 은행들은 펑펑 여신을 쏟아부어준다. 신용평가기관들이 있다고 하지만 기업체에 대한 이들의 신용평가를 믿고 따르는 금융기관들은 없다. 그 결과 과다편중여신 현상이 나타났지만 동일인 여신한도라는 제도적장치도 허점투성이였다. 은행들은 또 한번 대출해준 후엔 그냥 팔짱만 끼고 있었다. 대출해준 돈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담보가치는 충분했는지등에 대한 여신사후관리는 찾아볼 수도 없다. 결국 기업부실이 은행부실을 초래해도 은행들은 넋나간듯 가만히쳐다보기만 한다. 정부도 은행장 한둘만 적당히 손보면 또 몇달은그럭저럭 넘어가겠지 하는 생각을 하는듯하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이같은 총체적 금융부실의 구조를 뿌리째 뽑아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당장 내년이면 은행업이 개방되는 터에 곪을 대로 곪은속을 도려내지 않고선 금융개혁도, 금융경쟁력 강화도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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