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으로 새 판 짜야 비리 재발 없다"

「썩은 물에서 꽃이 핀다」 올들어서 최대 유행어는 뭐니뭐니해도「빅뱅」과 「한보」다. 겉으로는 두 단어 사이에 아무런 상관이없다. 내포된 의미도 별로 연관이 없다.그러나 금융과의 함수관계에 이르면 이들은 남남이 아니다. 빅뱅은1월 8일 정부가 「금융개혁위원회」설치를 들고 나옴으로써 생명력을 부여받았다.우연하게도 같은날 오후 조흥 제일 외환 산업등 한보철강 4개 채권은행장들은 서울시내 모처에서 한보에대한 1천2백억원 협조융자를결정했다. 한보의 몰락이 공식화되는 시점이었다. 이날로부터 정확하게 보름후 한보는 풀썩 쓰러졌다.차이가 난다면 하나는 태어났고 다른 하나는 죽었다. 그러나 「빅뱅」과 「한보」는 금융개혁이란 관점에서 보면 일맥상통한다. 한보로 인해 금융계와 정부는 예견됐던 개혁작업을 내부에서 외부에서 활발하게 진척시키고 있다.한보로 인해 「우·불량은행」이 더 분명해지고 있다. 불과 2년전까지 리딩뱅크를 자처하던 제일은행이 당분간 회생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은 것이다. 한보로 인한 타격은 아니지만 서울은행도한참 뒤처져있다. 작년중 건영부도에 휘말린 서울은행은 최악의 경영성적표를 보였다. 서울은행은 은행결산결과 사상최대인1천6백68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반면 부도폭풍에 휘말리지 않은 상업 한일은행등이 반사적으로 우량은행으로 부상하고 있다. 상업은행은 이미 일찌감치(95년말)자구노력을 완성한 채 선두은행 탈환을 노리고 있던 터였다. 한일은행의 경우 작년 결산실적이 썩좋은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부실이 없는 은행」이다.◆ 금융기관 대형화=효휼성 증대?정부는 이같은 은행간 우열을 의식했음인지 지난해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을 만들었다. 금융기관 대형화를 위해 합병·전환을 적극 유도한다는게 골자였다.우량금융기관간의 자발적 합병에는 조세감면등 정책적인 지원방안을 강구하고 부실금융기관의 경우 강제합병도 검토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법률은 오는 3월부터 시행에 들어간다.기회만 닿으면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금융기관을 대형화시키겠다던정부엔 더할나위없는 좋은 기회다. 물론 「대형화=효율성증대」라는 명제는 아직까지 제대로 검증된 적이 없다. 즉 규모의 경제라는원칙이 은행산업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가 확실하지 않은 상태다.그래도 정부는 대형화에 온갖 기대를 걸고 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입을 계기로 금융산업 개방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는데다2001년까지 자본거래자유화일정이 촘촘하게 짜여져있기 때문이다.이같은 분위기 때문에 금융가에선 요즘 심심치않게 은행합병설이나돌고 있다. 처음엔 「국민+외환」식의 모델이 유행했으나 최근들어선 서울 제일 등 경영실적이 부진하거나 대형부실을 안은 은행중심으로 합병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물론 현실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채 단지 소문 차원이다. 그러나관련은행및 직원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예사롭지 않다. 그만큼 개연성 높은 시나리오라는 점이 공감을 얻고 있는 셈이다.정부는 더구나 금융개혁일정을 최대한 앞당기겠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31일 김영삼대통령은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하면서 금융개혁을조기에 단행하겠다고 천명했다. 금개위도 지난 1일 열린 4차회의에서 이를 대폭 수용했다. 금개위는 당초 금융기관 업무영역개편을6월말까지 확정,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이었으나 이번에 단기과제로포함시켰다. 단기과제는 3월말까지마련돼 4월초 대통령에게 보고된다. 또 9월말까지 완료, 내년에 법개정을 할 방침이던 소유구조 개편문제의 경우도 소유구조는 당장 건드리지 않더라도 지배구조를 어떻게든 손질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2월 주총부터 은행에 도입되는비상임이사회제도를 주주위주로 대폭 바꾸어보겠다는게 금개위의구상이다. 이런 점에서 지난 12일 한국은행이 보인 화답도 흥미롭다. 한은은금개위에 제출한 「금융개혁과제와 추진방향」에서 일반은행의 소유제한을 철폐하고 5대계열기업군도 은행 비상임이사회에 진출할수 있게 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재정경제원등 정부측이 「산업자본의 금융업지배불가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한은의 발언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그러나 조금만 곱씹어보면 이 모든 것이 정연한 각본하에 진행되고있다는 느낌이 든다.사실 각본 운운은 금개위 출범시부터 흘러나왔다. 금개위에 참여하는 면면이 결코 금융개혁을 주도할 성향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단지 거수기일뿐 금융개혁 밑그림은 정부가 이미 다 마련해놓은 상태란 얘기였다. 그도 그럴것이 정부는 금개위를 만들면서 금융연구원이 지난 93년1월 만든 「금융제도개편연구」란 두권의 책자를 들고갔다고 한다. 두 책자는 국내 금융산업개편 방향에 대한 청사진을 말끔하게 정리해놓고 있다. 정부는 단지 일정을 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은행소유구조 문제같은 중요사안에 대해 조금 골머리를 앓으면 금융개혁의 틀은 짜여지는 것이다.문제는 얼마나 확고한 의지를 갖고 추진하느냐인데 이를 한보가 자극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강렬하게. 당장의 금융개혁은 이번은행주총부터 가시화될 전망이다. 은행감독원은 이달말로 예정돼있던 조흥 제일 서울 외환 등 4개시중은행의 정기주총을 다음달 7일로 연기토록 권고했다. 은행주총 연기는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은감, 금융계인사의 소빅뱅 예고강신경 은감원 부원장보는 주총연기를 지시한 배경에 대해 특검결과 한보철강 부당대출에 연루된 임원들이 주총에서 연임 또는 승진하는 사례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은감원은 이를 위해 현재 진행중인 특검을 이달말까지 끝낼 계획인데 특검결과는 은행 임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문책선풍으로 이어질것으로 예상된다. 일부에서는 외부행장 영입론도 거론되고 있다.행장등 한보관련 임원들이 무더기 물갈이되는등 금융계인사의 소빅뱅이 예고되고 있는 시기다.은행이사회 또한 이번 주총부터 달라진 모습으로 운영된다. 종전까지는 이사회가 형식적인 껍데기에 불과했으나 앞으로는 명실상부한은행경영의 최고기구가 된다. △경영목표및 평가 △정관변경 △임직원보수를 포함한 예산·결산 △해산·영업양도·합병 등 조직의중요한 변경등을 심의·의결한다. 또 은행 자기자본의 5%이상 부실이 발생했을 때, 2%이상의 손실이발생했거나 예상되는 금융사고가 있을 경우 이를 보고받고 토론하게 된다. 한보철강에 대한 대출처럼 2~3천억원을 은행장 혼자서 주무르는 사태는 예방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은행들 또한 금융관행을 바꾸기 위해 부지런한 모습이다. 여신의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영업점내에 여신협의회를 설치하는가 하면새로운 여신관리모델을 도입하는등 환골탈태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또하나의 패션인양 진행되는 빅뱅국면을 우려하는 시각도적지않다. 늘 그래왔듯이 용두사미형의 개혁이 되지 않을까하는 시선이다. 이 점에서 개혁이라는 것은 개혁주체가 개혁할만한 토대를갖고 있어야 하고 의지도 있어야한다는 한 시중은행 임원의 말은귀담아들을 만하다.정부가 선진국을 흉내내기라도 하듯 국내에 긴급히「빅뱅」을 수입해왔지만 새로운 졸속을 하나 더 만들지는 않을까하는 걱정들도 만만치않다. 은행합병 문제만해도 우리의 경우 「서울+신탁」의 예에서 보듯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면이 더 강하게 드러났다. 현재 활발히 검토되고 있는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도 선진국마저 시행을 꺼리고 있는 사안이다. 임원인사를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투명하게 하도록 유도한다고 하지만 주총시즌만 다가오면 줄대기가성행한다. 한보부도로 한 쪽에선 은행장이 구속되지만 다른 쪽에선「줄잡고 별자리에 오르려는」 관행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상황이다.한보사태는 분명 정부와 금융가에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외부로부터 시작된 빅뱅에 한보는 내부로부터 빅뱅할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빅뱅의 명분이 그만큼 확보된 셈이다. 금융개혁 과정도 현재로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정부가 의도하는 「은행 책임경영체제」와 「금융개혁」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화사하게 꽃피어날지 예단하긴 아직 이른 감이 있어보인다. 한보부도라는 홍역을 다시 앓지않기위해서라도 정부와 금융계가 지혜를 짜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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