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강을 벗긴다

철강산업은 국가의 원동력이다. 작은 바늘에서부터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안쓰이는 곳이 없다. 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철을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근대에 와서 가장 먼저 철강공업이발달했던 영국이 산업혁명 이후 백여년간 세계사를 주도했고 19세기 말의 독일과 20세기의 미국도 그러했다. 또 최근 몇십년간 세계경제를 주무르며 최고급 가전제품과 자동차, 기계류를 만드는 일본의 힘도 따지고 보면 철강산업의 발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철강산업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3천8백90만t 생산으로 세계 6위. 지난해 국내 철강업계가 올린 성적표다. 양적으로 보면 이미 세계적인 철강강국의 위치에 와있다는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철강강국이라고 해도전혀 손색이 없는 수준인 것이다. 더구나 지난 73년 포항제철이 일관제철소를 세운 이래 불과 4반세기 만에 올린 성과란 점에 비춰보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외국에서 한국의 철강산업 발전에대해 큰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얘기도 과장된 것만은 아닌듯하다.◆ 지난해 재고 철근만 49만9천t그러나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외형만큼 내실이 있어 보이지는않는다. 철강업계 전반에 걸쳐 많은 문제점이 내재돼 있는 상황이다. 어떤 부분은 곪을대로 곪아 있다. 또 상태가 더욱 심해 이미터져버린 경우도 있다. 우선 날로 높아가는 생산비의 상승으로 업계 전체가 큰 시름을 앓고 있다.통계를 보면 지난 10여년간 거의 2배 가량 올랐다는 분석이다. 자연 대외경쟁력이 크게 떨어지는 후유증을 낳고 있다. 국제시장에서상대적으로 저렴한 러시아와 중국산에 밀려 설자리를 잃고 있는 것도 여기서 비롯된다. 상황이 이쯤 되다 보니 국내 업체들도 해외시장에 울며 겨자먹기로 싼 값에 제품을 내놓고 있는 실정이다. 냉연강판의 경우 지난해 중반만 해도 t당 수출가격이 5백10달러선이었으나 하반기에는 4백90달러로 무려 20여달러나 떨어지는 상황을 연출했다.과잉투자 역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철강업계 경영난의 주범이기도 하다. 최근 몇 년 사이 각 업체들은 경쟁적으로 설비투자를 크게 늘려왔다. 80년대 후반 이후 철강경기가 호황을 누리자 구체적인 계획없이 마구잡이로 투자를 서둘렀던 것. 그러나 이런 기대와는 반대로 철강경기는 지난 89년을 정점으로 하락세를 걷기 시작했다.또 93년 이후 점진적으로 회복세를 보였지만 그 증가치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지난해만 해도 세계적으로 불과 0.9% 성장하는 데그쳤다는 분석이다. 국내시장의 경우엔 이보다는 좀 낫지만 공급이수요를 초과해 재고를 크게 늘렸다. 내수는 7.5% 늘었지만 공급은전년도에 비해 무려 8.4%나 늘었다. 이같은 불균형 때문에 국내 철강업계는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재고가 철근 49만9천t을 비롯해 형강 12만7천t, 냉연강판 11만8천t, 강관 30만t에 이르는 실정이다.최근 재계 전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한보철강의 부도파문과삼미의 일부 사업군 매각도 업계의 이런 고질적인 문제와 밀접한관련을 맺고 있다. 두 업체는 잘못된 수요 예측과 능력을 벗어난무리한 투자로 화를 자초한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는 평을 듣고있다.특히 한보는 상식을 넘는 비상식적인 공장 신설과 방만한 경영으로철강업계는 물론이고 국가 경제에 큰 상처만 남긴채 쓸쓸히 쓰러져갔다. 한보를 위탁관리하기 위해 포철에서 파견돼 당진제철소에 대해 실사를 벌이고 있는 경영진들 역시 한결같이 5조원씩이나 들여가며 어떻게 이렇게 지었는지 알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설계는 물론이고 공법과 기반시설 자체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설명이다.올해의 철강경기 역시 전망이 그다지 밝지 않다. 길고 긴 터널의연속이라고나 할까. 특히 그동안 투자해온 것에 비해 수요가 별로늘지 않을 것으로 보여 업체들의 시름을 깊게 하고 있다. 국내 경기가 바닥상태라 수출로 이를 뚫어야 하나 별로 가망이 없어 보인다. 경기 자체가 비관적인데다 올해 역시 수요가 공급을 밑돌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공급은 지난해에 비해 11% 가량 늘 것으로보이지만 수요가 이를 따라주기는 힘들 것이라는 얘기다. 더욱이지난해의 재고분도 상당한 수준이라 업체들을 한층 더 조일 것으로전망된다.◆ 위기지만 희망은 있다새해들어 국내외적으로 상황은 나쁘지만 철강업체들의 의욕만큼은대단하다. 인천제철의 한 관계자는 새해 시무식을 하면서 전직원이일하는 자세를 새로 다졌다며 상황이 상당히 어렵지만 경영혁신을통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으리라 본다고 말했다.지난 94년부터 경영혁신을 추진해온 포철이 올해를 고객만족의 해로 정한 것도 이런 분위기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다. 특히 포철은지난 3년간 펼쳐온 경영혁신이 지난해의 위기에서 빛을 발했다는자체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에따라 그간의 여세를 몰아 올해도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고 서비스를 강화할 방침이다. 다른 업체들도상황은 비슷하다. 경영혁신과 함께 서비스를 대폭 강화해 새로운수요를 창출할 계획이다.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던 방식에서 벗어나소비자를 찾아 현장으로 달려간다는 의미다. 이제 철강업계에도 고객만족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셈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국내 철강산업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기술개발에 과감히 투자해 국내의 철강 기술력을 한단계 높여야 한다고지적하는 의견이 많다. 종합적인 장치기술이 필요하므로 관련 산업기술이 필수적이라는 것.따라서 제강, 제선, 계측제어, 표면처리 등에 대한 기술투자가 적극 이루어져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와 함께 혁신철강기술에 대한관심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번한보사태에서 문제가 됐던 코렉스도 꼭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장단점에 대해 철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우리의 철강산업은 짧은 기간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포철을 빼곤 아직 세계 정상권과 거리가 있다. 또 보통강은 그래도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지만 특수강 분야는 취약점이 많다고지적하기도 한다.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하는 목소리도 많다. 금융지원을 충분히 해주고 금리도 낮춰줄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다. 또 공장을 지을때 도로나 항만 등 SOC(사회간접자본)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여러모로 배려를 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철강산업은 어디까지나 국가기간산업인 까닭에 정부 차원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경쟁력을 높일수 없다는 것이다.특히 개도국들이 저가공세를 펴고 있는 상황에서 철강강국으로서의자존심을 지키려면 정부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설명이다. 생산성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철강업계 사람들은 올 한해가 위기임에는 틀림없지만 희망은 있다는 입장이다. 이미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일부 품목에 대해 생산량조절에 들어간데다 하반기부터는 경기가 상당히 호전될 것이라는기대 때문이다. 특히 얼마전에는 인천제철 등 몇몇 전기로 업체들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재고가 가장 많은 철근의 감산 문제를 깊이 논의하기도 했다. 여기에다 포철의 삼미 일부 사업군 인수와 위탁관리를 받는 한보의 재기노력도 업계에 생명수를 공급하는데 한몫할 것이란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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