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역사 문화 등 한국서 비롯됐다"

일본어로 7권의 책을 발간, 일본에 모두 1백만권의 책을 판매한 작가. 일본내에 2천여명의 후원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일본에서 인기있는 한국인. 일본 고대사의 약점을 찌르는 논리적인 주장으로 일본 역사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여인. 일본인도 풀지못한 일본 고대시가를 해석한 장본인. 올해 66세의 이영희씨다.이영희씨는 우리나라의 신라 향가와 비슷한 일본의 고대시가를 모은 시가집인 「만요슈」를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 일본 학계를 놀라게한 사람이다. 이 책은 고대 일본어가 아니라 고대 한국어로 돼있으며 고대 한국어로 풀어보면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이 드러난다는 주장이다.이 주장으로 이영희씨는 우리나라에서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작가이자 고대사 연구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올해만도 일본의 문예춘추사와 90년 전통을 가진 일본 출판사인 강담사를 통해 3권의책을 발간할 예정이다. 일본 출판사가 서로 계약을 맺고 싶어하는베스트셀러작가인 셈이다.◆ 「또 하나의 만요슈」 큰 반향 일으켜이씨가 일본 고대사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데는 3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는 한 일본인의 얘기에서 시작됐다. 이씨가 한국일보 문화부에서 기자생활을 할 때 일본에 취재하러 갔다가 일제시대때 한국에서 경성일보(서울신문의 전신) 사장을 지냈던 요미우리신문 고문을 만나게 됐다. 이 요미우리신문 고문인 이씨와 얘기를 하다 『일본이 아끼는 만요슈는 실은 고대 한국어로 돼있다』고 말했다고한다. 이씨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생각하고는 곧 잊어버렸다 한다. 그러나 이 얘기는 이 책이 있는지도 몰랐던 이씨에게 관심을 갖도록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두번째는 천마총 발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이씨가 고대 한국어를 공부하도록 만들어준 계기가 됐다. 73년 이영희씨가 한국일보문화부장으로 재직할 때 천마총이 발굴됐다. 신라의 지증왕 무덤이라고 추정되는 천마총안에는 흰 자작나무에 그려진 천마도가 있었다. 흰 자작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지 않는 종자라서 이 사건은큰 의문을 불러일으키면서 고대사 연구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씨도 이 때 우리나라 역사를 모르고서는 문화부장을 못하겠다 싶어역사공부를 시작했다. 역사공부 교과서로 이씨가 선택한 책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다. 혼자 한문사전을 찾아가면서 원문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들을 원문으로 읽으면서 이씨는 자연스럽게 이두를 공부하게 됐다.『사람이름이나 관직명 지명 노래 등은 이두로 표기돼 있어서 이두를 모르고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어요.그래서 이두를 공부하게 됐죠. 당시에는 마땅한 이두 교과서가 없어서 삼국사기 지리지를 이두 교과서로 삼았습니다. 지리지에는 한지역 이름이 고려 지명과 통일신라때 지명, 삼국시대때 지명 등으로 3가지가 나란히 실려 있어 우리 말이 어떻게 변해왔나를 연구하기에 적합했습니다.』혼자 독학으로 시작한 공부가 10년이 되니 어느 정도 깨쳐지더라고말한다. 10년 정도 되니까 이두를 읽는데 별 불편함이 없어지더라는 말이다. 그러던 중에 세번째 계기가 찾아왔다. 일본 대마도 속의 한국 문화를 찾는다는 취지의 기사를 쓰기 위해 일본에 갔을 때였다. 일본 신사를 구경갔다가 일본 신사 이름을 보게 됐는데 그글자가 한자이긴 한데 한자로도 해석이 안되고 일본어로도 해석이안 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사를 지키는 주인에게 뜻을 물어보니 자신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한다. 자기네 조상신의 이름도 모르는 꼴이니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재미삼아 우리나라 이두식으로 그 신사 이름을 풀어봤다. 그랬더니 어디어디에서 건너온 누구라는 식으로 해석이 되더라는 것이다.『저 자신도 깜짝 놀랐지요. 우리말로 푸니까 일본 신사 이름이 해석된 것에 대해서요. 이 일로 일본 고대어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게다가 옛날에 요미우리신문사 고문이 만엽집은 고대 한국어로 돼있다고 한 말이 생각나 무작정 이 책을 연구해 보겠다고 덤비게 됐습니다.』이런 과정을 거쳐 이씨는 89년에 문예춘추사를 통해 「또 하나의만요슈」라는 책을 내놓았다. 당시 이 책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 책을 장사 결혼식 제사 등 의식을 치르는과정을 담은 민속에 관한 노래집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이씨가여기에 반기를 든 것이다. 만요슈는 고대 한국어로 돼있으며 표면적으로는 성과 사랑에 관한 내용을 얘기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정치와 반란 음모, 쿠데타 계획 등을 담고 있는 이중구조의 정치시라는게 이씨의 주장이었다.이씨는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요미우리신문사 고문도이 책이 한국어로 돼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왜 학계에서는 일본어로만 해석하고 있었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이씨는 『아마도일본 역사와 고대시가 해석에 있어서 조직적인 왜곡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명치유신 이후 일본 고대사와 고대문헌 해석에 있어서 치밀한 왜곡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나하나 파헤쳐보면 일본의 역사와 문화 언어 풍속 등이 모두 삼국시대때 한국에서 건너간 한국인들로부터 출발됐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씨는 자신의 만요슈 해석이 옳다는 증거로 「침사(枕詞)」라는것을 든다. 침사란 만요슈를 해석하다가 해석되지 않는 글자에 대해서 일본 학계에서 「일본의 옛날말로 별 뜻이 없으니 해석을 하지 않고 버려도 좋다」고 인정한 말들이다. 이씨는 『만요슈에 실린 시는 한 편이 대개 25자 내외다. 25자 내외의 글자 중에서 일본학계가 침사로 인정하고 있는 글자가 시 한 편에 대개 5∼6개씩 있다. 한 시에서 20%이상의 글자를 버리고 나머지만으로 해석한다는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말한다. 이씨는 일본인이 해석하지 못한 침사를 순 우리말로 해석, 「침사의 비밀」이란 책을 펴냈다.일본에서 해석하기를 포기한 시구를 해석한 것이다.일본 학계에서는 이씨의 만요슈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씨의 만요슈 해석은 일본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단적인 예로 이영희씨의 만요슈 해석이 나온 이후로 일본 대학시험에서 만요슈에 실려 있는 만요시 해석 문제가 없어졌다는 점이다.『만요슈는 일본에서 대단히 중요한 책입니다. 그래서 매년 대학시험에 만요시 해석에 대한 문제가 꼭 한두문제씩 출제됐습니다. 그러나 책에 대한 재해석이 나온 이후로는 대학시험에 출제되지 않고있습니다.』이씨는 일본 문부성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내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고 학교에서 이전 해석대로 가르치는 것은 좋다.그렇지만 시험에는 내지 말라. 만약 어떤 학생이 내 해석을 받아들여 내 해석대로 답을 썼다가 틀렸을 경우 행정소송을 걸면 이길 자신이 있느냐』 이후 대학시험에서 만요시 해석 문제가 사라졌다.이씨는 이것을 일본 학계에서도 자신들의 만요시 해석에 대해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일본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일본의 일반 독자들은 이씨의 주장에 큰 호응을 보내고 있다. 이씨의 책이 지금까지 1백만권 가까이 팔렸다는 것과 2천여명의 일본인이 이영희씨를 후원하는 후원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일본내에서 이씨의 인기를 알수 있다. 이씨는 『후원회원들 중에는 과학자나 수학자 변호사 중고교 교사들이 많다』며 『이 중에서 중고교 교사들이 많다는 점이가장 뿌듯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최소한 자신의 해석을 염두에 두고 가르칠 것이 아니냐는 설명이다.이씨가 지금까지 일본 문예춘추사를 통해 발간한 책 7권 가운데4권은 문고판으로 다시 발간됐다. 문예춘추사의 문고판으로 발간됐다는 말은 반영구적인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음을 의미한다. 이씨는 지난 3년간은 일본에 책을 내지 못했다. 국내에서 책을 내느라 시간이 나지 않아서였다. 그동안 국내에서 「노래하는 역사」와 「달아 높이곰 돋아사(전4권)」를 펴냈다. 올해는 다시 일본에서 책을 발간할 예정이다. 우선 문예춘추사에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담은 에세이집을 낼 예정이고 강담사를 통해서는 만요시에 대한책과 일본의 전설적인 화가 사라꾸에 대한 책을 낼 계획이다. 사라꾸는 일본 에도시대때 잠깐 나타나 10개월간 1백40여점의 그림을남긴뒤 사라져 버린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이씨는 이 사라꾸가 한국의 김홍도였다는 주장을 담은 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이미 문헌상에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확보해 놓았다.◆ 일본에서 해석 포기한 시구 풀어내기도지난해 우리나라에서는 시오노 나나미란 일본 작가가 인기를 끌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르네상스 얘기를 재미있게 풀어내 국내 독자들을 열광시킨 작가다. 이영희는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시오노 나나미 같은 존재다. 다른 점은 시오노 나나미가 우리나 일본과는 별 관계없는 이탈리아 얘기를 하고 있는 반면 이영희는 일본 고대사와 고대 문헌에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 일본 역사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영희가 우리에게 소중한 작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일본이 우리나라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한 후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조선사를 새로 편찬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왜곡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우리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우리 역사를 바로연구하는데서 시작한다. 그러나 일본 역사를 무시하고는 완전한 해석이란 있을 수 없다. 일본을 무시하지만 말고 진지한 태도로 일본고대사에 접근, 우리 고대사를 복원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이씨는재삼 강조한다. 자신이 시도한 한일 고대사 연구가 계속 깊어지고넓어지도록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게 이씨의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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