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꺼진 용광로엔 찬바람만

한보철강 당진제철소는 부도 전인 지난 1월 중순까지만 해도 살아움직이는 거대한 공룡에 비유됐다. 하루 종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1천여대의 수송용 차량이 드나들었고 생산라인은 지칠줄 모르고 철물을 뿜어댔다. B지구 공사현장 역시 올해 5월 완공을 목표로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3천여명의 직원들은 살갗을 에는 듯한 추운바닷바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회사일에 매달렸다. 임금이 한두달씩 밀리기 일쑤였으나 이를 불평하는 직원은 거의 없었다. 다른 곳에는 다 있는 노조도 없었다. 열심히 일해 제철소를 완공한 후 만들자는 의견이 우세해 무노조 상태였다. 그러나 그후 50여일. 드나드는 차량이 눈에 띄게 줄었고 공사현장에는 찬바람만 몰아치고 있다. 현장을 오가던 건설근로자도 온데간데 없다. 지난 1월23일 회사가 쓰러진 후 두달 가까이 됐건만 당진제철소 전체가 여전히 미궁을 헤매는 모습이다. 포철이 위탁경영을 맡아 보전관리인이 선임되고 채권관리단이 가동에 들어갔지만실적은 미미하다. 아직 한보철강에 대한 실사가 끝나지 않아 구체적인 경영계획은 나오지 않고 있다. B지구 공사를 맡아왔던 협력업체들은 인내심을 갖고 상황을 주시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할지 몰라 애를 태우고 있다.한보철강 관계자들은 우선 자금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한다. 돈이있어야 고철도 들여오고 생산라인도 정상대로 돌릴 수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말한다. 얼마전에는 퓨즈가 없어크게 고생한 웃지못할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유분이 전혀없는 상태에서 퓨즈가 끊어지는 바람에 생산라인이 한참 동안이나서는 일이 있었다. 예전 같으면 각종 물품을 충분히 갖춰놓고 공장을 가동했으나 요즘엔 사정이 다른 것이다. 게다가 급한 일이 생겨물건을 구입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해도 손을 못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금을 쓰려면 자금관리단에 보고하고 법원의 허가를 받아야하는 등 복잡한 결재라인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적잖다. 심지어 임직원들의 숙소에 휴지가 부족해 이들이 크게 불편을 겪고 있을 정도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실사 덜 끝나 본격적 지원 없어자금지원이 상당 부분 막히면서 공장가동 상태는 자연 크게 떨어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약 65%의 가동률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A지구에 있는 열연공장 A라인과 봉강공장 라인은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반면 열연공장 B라인은 멈춰 있다. 덩달아생산량도 크게 줄었다. 부도전인 1월22일 하루 7천t에 이르렀던 것이 2월15일에는 3천9백t으로 40% 이상 줄어들었다. 출하량은 아예제로상태다. 부도 전만 해도 하루 평균 1만여t씩 출하했으나 최근에는 생산량 전체를 창고에 쌓아두는 형편이다. 부도 여파로 예전의 영업조직이 완전히 붕괴됐기 때문이다.이에 따라 재고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만들기만 하고 팔지는 못하니 당연한 결과다. 부도일인 1월23일 26만t이던 상태에서지난 2월11일 마침내 30만톤을 돌파했고 2월15일에는 31만7천t을기록했다. 공장 구석구석에 재고가 쌓여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회사관계자들은 재고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부도전에는 자금부족에 몰리면서 덤핑으로 제품을 내다파는 일을 일삼았으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재고로 쌓아두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헐값에 팔지는 않겠다는 의미다. 어차피 쉬어가는 김에 제품에 대해 정당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야한다는 설명이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싸구려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회사관계자들은 진짜 문제는 재고보다는고철공급이라고 지적한다. 공장가동이 전체적으로 크게 떨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고철 등 원료공급 차질로 조업이 부진한 까닭이라는 것. 3월5일 기준으로 고철재고는 4만t으로 7일분 밖에 남아있지않다.B지구 공사가 완전히 멈춘 것도 한보철강이나 당진경제를 고려할때 큰 타격이다. 부도 전까지 공사진척도는 전체적으로 95%수준을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부도 이후 자금지원이 중단되면서 건설장비의 기계소리가 멈추었다. 한창 건설중일 때는 1만여명에 달했던 하청업체의 일용직 근로자들도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부도 후유증으로 자신들을 고용한 하청업체들이 큰 피해를 보면서 일한 대가를받을 수 없는데다 공사를 재개하라는 지시도 없어 아예 현장에 나오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완공을 눈앞에 둔 공장의 기계에 녹이끼는 등 후유증이 상당히 심각하다. 쇳물 대신 녹물을 쏟아내는 흉물로 바뀌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특히 보전관리를맡은 신임 경영진 일각에서 완공해도 채산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어 현장직원들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밀렸던 임금은 거의 해소돼그러나 직원들 입장에서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그동안 많이 밀렸던 임금은 거의 해소됐다는 점이다. 부도 전에는 보통 1개월분 이상은 밀렸으나 포철이 경영을 맡고 자금관리단이 움직이면서 설을전후해 해결됐다. 채권금융기관에서 임금만큼은 제때에 지급하고있는 것이다. 다만 지난 2월25일 지급예정이던 관리직에 대한 2월분 임금이 전산시스템의 에러와 회사측의 실수가 겹치면서 약간 늦어졌을 뿐이다. 이에 대해 한보철강의 한 관계자는 부도 전을 생각해 지급계획을 세웠다가 결재가 늦어지면서 차질이 빚어졌다고 설명했다. 3월10일로 잡혀있는 생산직직원의 임금은 예정대로 지급됐다.회사의 상황은 어렵지만 재기를 위한 직원들의 의지는 의외로 강해보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정든 일터를 다시 살리겠다는 의욕이 넘쳤다. 사무실 복도에서 만난 한 직원은 부도 이후 직원들의 애사심이 더욱 높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부도 이후 지각이나 조퇴는 물론이고 회사를 떠난 이탈자도 거의 없다. 회사가 정상가동이 안돼업무는 줄었지만 정신력 만큼은 더욱 강해진 느낌이다. 회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노력도 현장 곳곳에서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재기의 의지를 담은 현수막도 여기저기에 내걸려 방문자들의 눈길을 끈다. 「우리의 삶의 터전 우리가 지킨다」는 내용이 있는가 하면 「새로운 당진제철소 우리가 만들자」는 주인의식이 담겨있는것도 있다. 이제 믿을 건 우리들밖에 없다는 생각에서다. 「새로운각오 새로운 출발」이라는 문구도 보인다. 솟아나는 봄기운처럼 직원들의 각오만큼 더욱 새로워지는 분위기다.부도 2개월째를 맞으면서 당진제철소에서 오너였던 정태수 총회장일가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구속된 정총회장 뿐만 아니라거의 상주하다시피했던 정보근 회장도 발길을 완전히 끊었다. 직원들 역시 회사꼴을 망친 정총회장 일가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듯했다. 대신 포철에서 파견된 경영진이 일부 상주하며 근무하고 있고 자금관리단에서 나와 상황을 체크하고 있다. 또 충남도와 당진군에서 나온 지역경제과 공무원들이 지역경제의 피해를최소화하기 위해 경영진 및 자금관리단과 수시로 의견을 나누고 있다. 하지만 서로의 의견차가 워낙 커 자주 충돌을 빚는다는 것이주변사람들의 설명이다.당진제철소 직원들은 3월안으로 조업이 정상화되길 기대하고 있다.그렇지 않고 파행이 장기화되면 후유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으로 걱정하고 있다. 공장 역시 생명체와 다를 바 없어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 두면 경쟁력을 잃는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와함께 직원들은 재고로 쌓여있는 제품을 처리한다는 차원에서 영업조직을 살려 그동안 미뤄왔던 판매활동도 재개할 움직임을 보이고있다. 공장정상화를 위한 사전정지 작업의 일환으로 영업조직 복원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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