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벤처시대의 사장감

지난 95년 국내 굴지의 건설업체였던 Y사가 힘없이 무너졌다. 불과3~4년전만 해도 잘나가는 업체로 꼽혔던 터라 재계의 관심은 단연그 배경에 모아졌다. 물론 건설경기 불황이 주요인의 하나였다.그러나 Y사를 잘아는 주변사람들은 최고경영진의 미숙한 경영전략도 부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진단했다. 당시 Y사는 불과서른살의 2세가 경영권을 승계한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 있었다. 특히 이 회사는 창업자인 전임 회장이 돌연 세상을 뜨는 바람에 2세승계가 대단히 빨리 진행됐었다. 자연 2세는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서 경영권을 이어받았고 경영수업 역시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후 그는 기존의 임원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고 경영에서도 무리수를 두었다. 결국 얼떨결에 사장 자리에 올랐던 나이어린 비운의 2세는 자신의 꿈을 펴보지도 못한채 재계에서 사라졌다. 회사역시 다른 그룹에 넘어가 이름이 갈리는 아픔을 맛봤다.◆ 부드럽고 지식·정보 갖춘 사장 요구된다한 조직 안에서 사장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사장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위상이 바뀐다. 한단계 발전하느냐 아니면 그대로 주저앉느냐도 최고경영자 하기 나름이다. 고속성장을 거듭하던 회사가 최고경영자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거나 죽을 쑤는 사례도 얼마든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사장 한분 잘모셔 쑥쑥 크는 회사도 적잖다. 구태여 외국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영업을 생명으로 하는 회사의 경우 사장의 역할에 따라 회사이익이 천당과 지옥을 오갈 수 있다는얘기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경제사에서 지난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사장하면 흔히권위주의적인 인물로 묘사됐다. 어딘지 모르게 근엄해 보이고 접근하기 힘든 존재였던 것이다. 자연 사원들과 사장이 직접 만나는 기회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까지만 해도 사회 밑바닥에 권위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배어 있었다. 사장뿐만 아니라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힘깨나 쓰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흔히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물론 실제로도 사장들은 목에 힘을 잔뜩 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기업의 지방공장에 근무하는 직원이 일년 내내 사장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경영방식도 요즘과는 상당히 달랐다.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각광을 받았다. 항상 앞에 서서 나를 따르라는식으로 조직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사장 자질이 있는 것으로 평가받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사장의 조건으로 카리스마적인 통솔력이으뜸으로 꼽히곤 했다.또 하나 로비력이 뛰어난 사장이 다른 자질을 갖춘 사람에 비해 우대받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정정당당히 경쟁해 실적을 높이기보다는 편법을 동원하는 데 더 많은 힘을 기울이는 경영자들이 부지기수였다.물론 요즘이라고 이런 로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우리 경제를 좀먹는 독소로 남아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또 요즘같은 지구촌시대에 사장이 갖춰야 할 조건으로 로비력을 내세우는 사람은많지 않은 듯하다. 로비력 역시 구시대적인 사장의 자질로 기억될뿐이다. 그렇다면 요즘은 어떨까. 앞서 말한 나를 따르라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사장이 과연 얼마나 배겨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아마 오래가지 못한다일 것이다. 절대 노(NO)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적잖을 것이다. 90년대 들어 사회의 전반적인 민주화 분위기와 발맞춰 재계에도 근본적인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까닭이다.특히 사장에게 필요한 리더십의 본질이 바뀌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강하면서도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고 지식과 정보가많으면서도 행동력을 겸비한 사장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짜 사장이라는 얘기다. 국내 굴지의 재벌총수들이 현장경영을 강화하고 가급적 직원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계열사 사장들 역시 사내 식당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등 사원들의 입장에 서서 합리적으로 기업을이끌어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 문영구 교수는과거의 경험만으로는 사장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며 정보력을 갖춘 합리적인 사장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강조한다.사장에게 요구되는 자질이 바뀌면서 나타난 새로운 흐름 가운데 하나가 사장 공채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장 자리는 오너나 자사에서 쭉 근무해온 임원의 전유물이었다. 오너가 사장자리에 앉지 않을 경우 연공서열에 따라 기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외부인사가 날아와 기존 임원을 제치고 사장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그러나 지난 94년 대웅제약이 국내 처음으로 사장을 공개채용을 통해 뽑은 이후 이 방식이 유행병처럼 재계 전체로 번져나갔다. 최근에도 중견기업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특히 나산, 거평 등 떠오르는 신흥그룹들은 사장공채를 인재확보의파이프라인으로 활용하고 있을 정도다. 이들 기업의 인사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능력을 갖춘 경영자를 모시는데 공채만큼 효과적인 수단이 없는 것 같다고 만족감을 표시한다. 물론 일부 기업에서 오너와의 갈등으로 공채사장들이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중도하차한 예도 있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대세는 역시 사장의 공개채용이다.◆ 사장 공채도 일반화보통 사람이 사장이 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가지다. 먼저 자신이직접 오너가 되는 것이다. 부모로부터 사업체를 물려받거나 창업을하면 자동적으로 사장 자리에 오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평사원으로 입사해 맨 꼭대기에 있는 사장 자리를 차지하는 방법이다.통계를 보면 이는 보통 20년 이상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나이로 치면 50대 초반이 돼야 최고경영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그러나 자신이 오너가 아닌 이상 사장 자리는 흘러가는 물과 같다.언젠가는 강 하류로 떼밀려가야 한다. 특히 최근에는 국내외적으로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단명하는 사장이 속출하는 분위기다. 임기를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사장이 한둘이 아닌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즈니스맨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사장을 꿈꾼다. 오너사장이건 월급쟁이 사장이건 말이다.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는 만족감과 함께 막강한 권한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급여 등다른 면에 있어서도 2인자였을 때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많은 혜택이 돌아온다. 그렇지만 어느 회사건 사장은 대개 한사람뿐이다. 요즘 몇몇 기업에서 복수의 대표이사를 두고 있지만 이는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희소 가치면에서도 사장자리는 최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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