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설·폐지 반복 '작은 비서실' 미완

대통령비서실은 흔히 권력의 상징으로 불린다. 국정의 최고 통치권자인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까닭이다. 일반 공무원들에게 최고의 출세코스로 인식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이런 비서실도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른 색깔을 띠어왔다. 대통령의 통치스타일과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왔던것이다. 문민정부 이후의 대통령비서실도 마찬가지다. 김영삼대통령이 내세운 개혁의 바람을 타고 초기부터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연출했다.특히 김대통령은 취임을 하면서 비서실을 축소하는 쪽으로 개편작업을 했고 파견나온 공무원들을 대폭 소속부처에 돌려보냈다. 또위인설관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특별보좌관제도 없앴다. 이와 함께내각업무에 대한 감독 및 점검기능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비서실을이끈다는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축소지향의 비서실 개편은 나중에몇몇 수석비서관실을 새로 만들면서 그 의미가 바랬다.김대통령 취임 이후 대통령비서실은 몇 차례에 걸쳐 기구가 바뀌었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신설과 폐지를 반복했다. 먼저 그 첫번째 변화는 문민정부가 닻을 올리면서 나타났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있었던 사정수석실을 없애고 사정업무를 민정수석실에 흡수시켰다. 또 기구개편은 아니지만 몸집을 줄인다는 의미에서 의전수석비서관 자리를 없앴다. 대신 수석비서관 임무는 선임인 김석우 의전비서관에게 맡겼다. 그러나 김비서관은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수석비서관으로 승진했다. 문민 비서실 출범 때 한가지 흥미로웠던것은 비서실운영의 기본방침과는 달리 정책수석실을 새로 만들어전병민씨를 전격 기용해 인사배경에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깜짝쇼는 불과 하루만에 전씨의 전력이 쟁점으로부각되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전씨가 책임을 지고 임명장도 못받은 상태에서 정책수석직을 사퇴했고 정책수석실 역시 비서실에서사라졌다.이에 비해 이때 새로 만들어진 교육문화수석실은 청와대 기구표에새로 이름을 올리며 김정남 수석을 맞았다. 특히 김수석은 당시 골수 재야출신이 청와대의 수석비서관으로 들어갔다 해서 많은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이어 대통령비서실은 93년 12월 이원종 정무수석 등 4명의 수석비서관이 새로 입성하면서 부분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때 농수산수석실(현 농림해양수설실)이 신설돼 최양부 수석이 임명됐다. 이는 청와대가 점점 어려워지는 농촌문제를 보다 심도있게 다루겠다는 의도에서였다.◆ 최양부 농림해양수석, 3년4개월 롱런94년 12월 한승수씨가 문민정부 2대 비서실장 자리에 오르면서 대통령비서실은 또 한차례 변신했다. 기존 기구에 정책기획수석실이추가돼 서울대 교수 출신 박세일수석이 임명됐다. 정책기획수석실은 김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만들었던 것으로 전병민파동이후1년10개월만에 이름을 약간 바꿔 다시 빛을 보게 됐다.반면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신설됐던 교육문화수석실은 1년10개월만에 간판을 내리는 운명을 맞았다. 김정남 수석 역시 짧지만 결코짧지 않았던 청와대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일상생활 속으로 돌아왔다. 이때 인사에서 비서실장에서 물러난 박관용씨는 대통령 정치특보에 기용됐다. 95년 12월 전임 한승수 실장에 이어 김광일 실장이새로 비서실을 장악하면서도 새 기구 하나가 선보였다. 사회복지수석실이 바로 그것이다. 국민들의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있다는 판단에 따라 새로 출범시켰다. 수석비서관에는 박세일 정책기획수석이 자리를 바꿔 임명됐다.문민정부 이후 대통령비서실은 1년에 한번 꼴로 새로운 기구를 내놓았다. 업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요하다 싶으면 주저없이 만들어냈다. 이는 당초 표방했던 작은 비서실 만들기에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상황이었지만 사회가 점점 다양화되는 마당에 비서실도 전문화를 꾀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해 몸집을 불렸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너무 자주 신설과 폐지를 반복해 업무추진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대통령비서실의 기구가 하나둘 느는 한편으로 일부 수석비서관의위상도 문민정부 들어 다소 상향조정됐다. 장관급인 실장은 별다른변화가 없었으나 96년 8월 차관급이던 정무 및 경제수석비서관이장관급으로 한단계 격상되는 행운을 누렸다. 첫번째 수혜자는 지금은 물러난 이원종 전정무수석과 이석채 전경제수석이었다. 청와대비서실에는 지금도 장관급 3명이 상하관계를 이루며 함께 근무하는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문민정부 이후 대통령비서실의 변화는 하드웨어격인 기구 자체에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는 비서관들도 무수히 새로 들어오고 또 떠나갔다. 지난 93년 2월 김대통령이 취임하면서 함께 들어왔던 수석비서관들 가운데 지금껏 남아있는 인물은 한명도 없다. 1기 수석비서관 가운데 최장수를 기록했던 김석우전의전수석이 지난 96년 3월까지 만 3년간 일하다 교체됐다. 김전수석은 단명시대에 상당히 오랫동안 자신의 위치를 고수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다른 장수 수석은 이원종 전정무수석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전수석은 93년 12월부터 지난 2월말까지 3년 3개월간 일했다. 지금 남아있는 수석으로는 최양부 농림해양수석이 93년12월 들어온 이후 3년 4개월째 롱런하고 있다. 최장수 기록을 스스로 갱신해나가고 있는 셈이다. 박세일 사회복지수석도 94년 12월이후 수석비서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면 최단명은 앞서 말한 전병민 전정책수석으로 하룻만에 물러나는 비운을 맛봤다.수석들 가운데 맨먼저 장관에 오른 사람은 93년 12월 개각때 농림수산장관으로 발탁됐던 김양배 전행정수석이다. 그는 그후 수개월만에 장관직을 물러났으나 95년 12월에 다시 보건복지부장관에 기용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1년도 못돼 한약분쟁파문 후유증으로 그 다음해 다시 교체되는 악몽을 되풀이했다. 그후 박재윤 전경제수석이 상공부와 통상산업부장관으로, 주돈식 전정무수석이 문화체육부와 정무1장관으로 입각했다. 이 가운데 박전경제수석은 얼마전 장관급인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자리를 옮겨 문민정부 이후 줄곧 요직을 맡고 있다는 부러움 섞인 평을 듣고 있다. 또 김영수 전민정수석은 문화체육부 장관으로 있다가 지난 2월개각때 옷을 벗었다. 지금은 외교안보수석 출신의 유종하 외무부장관과 송태호 전교육문화비서관이 문화체육부장관으로 재직하며 정부내 문민 비서실 인맥을 이어가고 있다. 또 강운태 전행정비서관이 내무부장관으로 있다.◆ 교육문화·농수산·사회복지 신설지난해 치러진 4.11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비서관도 상당수 있다. 먼저 수석비서관급 이상으로는 박관용 전실장을 비롯해이경재 전공보수석, 홍인길 전총무수석, 한이헌 전경제수석 등이있다. 또 일반비서관 출신 가운데도 윤원중 전정무비서관과 김길환, 김무성 전민정비서관이 국회로 진출했다. 이밖에 김혁규 전민정비서관이 민선 경상남도지사, 이의근 전행정수석이 민선 경상북도지사로 있다. 또 정종욱 전외교안보수석이 주중국대사, 구본영전경제수석이 WTO대사로 자리를 바꿔 활발히 국제무대를 누비고 있다.문민정부 비서실 인맥은 다소 복잡한데 넓게 보아 3가지로 구분된다. 결코 그 구도가 간단치 않은 셈이다. 우선 김대통령 가신으로대표되는 민주계 출신이다. 1기 비서실장을 지낸 박관용 전실장을필두로 김광일 전실장, 홍인길 전총무수석, 이원종 전정무수석 등이 대표적이다. 또 다른 부류는 교수출신으로 대표되는 전문가그룹이다. 평소 김대통령이 학자와 언론계 인사를 중용한다는 얘기를뒷바침하는 대목이다. 서울대 교수출신 정종욱 전외교안보수석과박재윤 전경제수석, 언론계 출신 이경재 전공보수석이 우선 눈에띈다. 지금도 서울대 교수 출신 박세일 사회복지수석과 이각범 정책기획수석이 청와대에 남아 있다. 나머지 한 축은 정부부처 파견관료로 볼 수 있다. 김석우 전의전수석 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비서관들 출신성분이 다양하다보니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2월28일 비서실장을 포함해 핵심 수석비서관이 바뀐 것도 따지고보면 이들의 불협화음에서 비롯됐다. 또 홍인길 전총무수석과 장학로 전제1부속실장이 비리에 연루돼 잇달아 구속되기도 했다.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힘차게 출발했던 대통령비서실이 집안식구 하나제대로 단속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듣는 것도 이런 내부적인 요인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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