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속의 풍요'…문턱 더 높다

돈이 안돌고 있다. 물처럼 흘러야할 자금흐름이 막혀 있다. 그 결과 부도가 속출하고 시중금리는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일부에서는 「4·5월 금융대란설」도 흘러나오고 있다. 자칫 금융위기를 맞았던 멕시코사태가 재현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이다.3월들어 20일까지 공휴일을 제외한 16일동안 서울지역에서 부도로당좌거래가 정지된 업체는 법인기업 2백11개, 개인기업 1백33개 등모두 3백44개에 이른다. 하루평균 22개 업체가 부도를 낸 셈이다.작년 하루 평균 15개는 물론 한보사태후 2월말까지의 평균 18개보다도 훨씬 많은 규모다.더 심각한 현상은 각종 부도설이 난무하고 있다. 이번에는 예전과달라 대기업까지 휘말려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굵직굵직한30대그룹 기업들도 포함돼 있다. 심지어 은행의 도산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금융시장의 총체적 불안이라고 할까.이같은 불안심리를 반영하듯 시중실세금리는 고공행진을 벌이고 있다. 지난주말 금리상승세가 다소 진정되긴 했지만 하락기조로 돌아섰다고 보는 시장관계자들은 드물다. 지난 24일의 경우 회사채유통수익률(3년만기)은 연13.0%를 기록했다. 연13.13%를 나타냈던95년9월18일이후 최고치다.그러나 체감지수와는 달리 정작 자금흐름과 관련된 제반지표나 수치는 이상할 정도로 정상이다. 오히려 자금잉여 상태다.◆ 대기업 CP발행으로 할인율 ‘껑충’먼저 통화를 보자. MCT(총통화+양도성예금증서+신탁)기준 통화증가율은 1월말 18.9%, 2월말 18.8%를 보인데 이어 3월20일18.3%를 기록, 양호한 수준이다. 18.5%수준에서 MCT증가율을 관리하겠다는 통화당국의 의지가 지켜지고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M2증가율은 18.1%(1월말) 19.6%(2월말) 20.3%(3월20일현재)로 급상승했다. 그만큼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다는 얘기다. 올들어 석달동안 풀린 돈만도 13조원을 웃도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대출도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올들어 15일까지 은행의 대출금 증가액은 6조3천8백38억원으로 지난해같은기간(2조5천8백4억원)에 비해 2.5배 늘어났다.은행들의 자금사정 또한 넉넉하다. 지난주의 경우 은행지준은 적수기준으로 1조원이상 남아돌았다. 이에따라 은행들은 한국은행에 자금회수를 요청하기도 했다.그런데도 기업들은 자금을 구하느라 난리다. 기업들의 일시적인 자금수요를 측정하는 지표중 하나인 당좌대출 한도소진율(국민은행제외 14개 시중은행)은 20일현재 27.9%로 작년말의 21.2%에 비해 크게 뛰어올랐다. 6대시중은행의 경우 대부분 30%를 넘어서고있다. 금액기준으론 이달들어 약4천억원의 당좌대출이 일어난 것이다. 이 때문에 당좌대출금리도 연14.70%로까지 올라섰다. 지난2월말 당좌대출금리는 연12.90%였다.특히 일부 대기업들 사이에선 자금가수요가 성행하고 있다. 항간에는 기업들이 올해중 시중자금사정이 개선될 기미가 없다고 판단,연말자금 확보에 나섰다는 얘기도 나돌고 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부도공포증이 금융계와 재계를 휩쓰는 상황이어서 자금확보전이 더욱 치열해진다는 설명이다.30대그룹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삼성·현대그룹도 CP(기업어음)를 발행해 자금챙기기에 나섰다. 실제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은 최근 2천5백억원어치와 1천5백억원어치의 CP를 발행한 것으로 파악됐다.이처럼 CP발행이 대거 늘어나면서 CP할인율도 껑충 오르는 양상이다. 2월말 연13%수준에서 형성돼 있던 CP할인율은 요즘 연일 최고치를 기록하며 연15%로 치솟기도 했다. 그나마 CP를 발행해 자금을 제때 구할 수 있는 기업들은 나은 편이다. 삼삼종금의 한 관계자는 10대그룹에 속하는 대기업이 발행한 CP도 제대로 소화안되는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고 말한다.대기업 사정이 이정도면 중소기업들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다. 삼미처리에서 보듯 부실징후 기업을 대하는 은행의 태도가 종전과 사뭇 달라졌다. 한보로 인해 부실대출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거세진데다 신용대출 취급을 죄악시하는 일부의 태도도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들은 담보를 제시하지 않으면 대출을 아예 취급해주지 않는 「준법대출」로 몸을 사리고 있다. 게다가 최근 한보에 대한 검찰재수사가 진행되면서 업무상배임죄가 공공연히 거론돼은행원들을 「대출공포」로 몰아넣고 있다.은행의 한 임원은 이같은 상황을 역설적으로 말한다. 요즘 같을 때오히려 은행 장사하기가 더 쉽다고 말한다. 예전같으면 한계기업에대한 자금지원을 놓고 고민을 했을텐데 최근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얘기다. 한계기업의 경우 자금지원을 중단, 과감하게 정리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중소기업들의 앓는 소리가 비등해졌음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에부랴부랴 8대시중은행장들은 24일 모임을 갖고 『기업을 흑자도산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자금을 계속 지원하겠다』고 밝혔지만 기업들의 자금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중소기업의 자금난은 대기업의 보수적인 자금운용에서도 비롯되고있다. 앞서 말한대로 대기업들은 최근 집중적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그러나 이를 생산활동에 투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은행의 기업경기조사결과가 이를 증명해준다. BSI(기업경기실사지수)실적치는 1/4분기중 64로 한은이 이같은 조사를 시작한 91년2/4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나타냈다.자금시장관계자들은 기업들이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조달해 주로 달러를 사들이고 있다고 귀띔한다. 실제로 지난해말 14억9천만달러에불과하던 거주자 외화예금이 최근에는 40억달러를 넘어섰다. 불과석달 사이에 외화예금만 25억달러가 늘어났다. 원화로 환산하면 달러를 사는데 2조2천억원 규모가 소요됐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것이 요즘 달러화에 대한 원화환율은 하늘모르고 오르고 있다. 시장 일부에선 환율이 달러당 9백원대를 넘어 9백20~9백30원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을 정도다.◆ 통화당국 환율안정에 무게중심이쯤되면 애써 사업하느니 환투기만으로도 짭짤한 수익을 남길 수있는 상황이다.그러면서도 대기업들은 자금난이 우려된다는 핑계로 중소 하청업체에 대한 어음만기를 가급적 연장시키고 있다. 이는 중소기업청이2백50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보사태이후의 납품대금 결제실태와자금사정동향을 모니터링한 결과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제조업체의 경우 납품대금으로 받은 어음의 평균만기일은 한보부도전에는95.3일이었으나 부도후에는 1백8.1일로 12.8일이나 늘어났다고 응답했다.또 유통업체는 한보부도전에는 수취어음 평균만기일이 78.5일이었으나 한보부도후에는 95.8일로 17.3일이나 길어졌다.그런데 정작 문제는 실세금리의 상승기조가 쉽사리 꺾이지 않을 것이며 높아진 은행 대출문턱이 낮아지기가 현재로선 어렵다는데 있다. 당장 통화긴축이 우려된다. 신탁에선 일반불특정 금전신탁 만기가 대거 돌아오는 마당인데 은행계정에선 연12~13%짜리 고금리상품을 잇달아 선보이고 있다. 계정간 자금이동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M2는 당연히 높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M2의 수치적 목표관리(14∼19%)를 여전히 떨쳐버리지 않는 한은입장에선 부담스런 부분이다.통화당국은 또 물가안정및 경상수지 방어를 위해 민간소비등 총수요관리에 적극 나설 방침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통화당국은 특히 환율이 경제의 기본여건을 반영하는 정도를 넘어 이상급등하는양상을 보이자 환율안정에 통화관리의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박철 한은자금부장도 『유동성관리의 초점을 환투기억제에 두고 있다』며 『단기금리의 일시적인 상승은 용인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물론 2/4분기부터 수출증가율이 상승세로 반전될 것으로 예상(대우·LG경제연구소)되고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제품의수출단가도 회복세로 반전될 것으로 전망되는 등 긍정적 요소가 없지 않다. 그러나 투신 은행신탁 등으로의 자금유입이 저조해 채권매수기반이 아직은 탄탄치 않다.자금시장을 불안에 떨게하는 변수는 또 있다. 한보그룹이 부도직전에 발행한 수천억원대의 융통어음이 그것이다. 한보어음은 3월말부터 만기도래할 것으로 예상돼 자금시장에 제2의 한보쇼크가 우려되고 있다. 특히 한보철강이 발행한 진성어음을 보유한 협력업체에대해 은행들이 일반대출형식으로 빌려준 1천억원에 달하는 자금의만기도 5~6월에 걸쳐있어 위기감은 더 고조되고 있다.이에따라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중소기업과 일부대기업들은 봄이왔음에도 기지개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있다. 지루한 꽃샘추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산업의 혈맥이라는 금융이 언제쯤 제자리를 찾을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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