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시장 꽁꽁, 부도 악몽에 시달려

『어렵다고 말하기도 지쳤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도 꾸려가기 힘든 상황에서 장기간의 불황한파가 겹쳐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지경이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은 사장이라는 직함이 부담스럽기만 하다.』(경기도 안산 서부공단에서 자동차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L사장) 요즘 중소기업사장들을 가장 괴롭히고 있는 것은 언제 이번 불황이 끝날지 모른다는데 있다. 희망이 있어야 일할 마음이 생기는데 언제 부도가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회사경영을 정상적으로 할수있겠느냐고 말한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자금난에 허덕이던 주위의 중소기업 사장들이 하나둘씩 쓰러질 때이다. 그럴 때마다 언제닥칠지 모르는 「사형선고」에 초조해해야 한다.지난 한보와 삼미의 연이은 부도로 은행은 물론 제2금융권까지 위축돼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은 극에 달하고 있다. 물건을 납품하고어음을 받아도 담보가 없으면 할인할 데를 좀체 찾기 힘들다. 결제기간이 한없이 길어지는 것도 문제다. 이제는 4~5개월짜리 어음도감지덕지해야 한다. 그만큼 돈이 돌지않고 있다. 아니 자금을 운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꽁꽁 얼어붙었다.이에따라 거래업체에 어음을 적당한 금리로 할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렇다고 어음을 끊어주는 회사 입장도 꼭좋은 것은 아니다. 서로 섭섭하다는 말이 오간다. 자연히 다음 거래가 매끄러울 수 없다. 서울 독산동에서 금형업을 하는 최용식사장(신생정밀)도 최근들어 그런 요구를 받는 사례가 잦다고 말했다.◆ 자금난, 기술개발은 그림의 떡그동안 융통성있게 신용으로 어음을 할인해주던 파이낸스사들조차최근들어 어음할인을 꺼리고 있다. 일부 파인낸스사들이 한보 등에물리면서 어음할인시장이 급속히 경색된 것이다. 은행 등에 비해할인율이 다소 높지만 중소기업사장들이 편리하게 이용하던 신용금고도 최근들어 대출심사를 엄격히 하고 있다. 경기불황으로 기업들의 경영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심사를 강화한다는 것은 금융기관에서 자금을 차입하기 어렵다는 얘기와 같다. 사업을 확장하고 매출이 증가해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는다. 은행의 논리는 간단하다. 세상이 불안하니 담보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충분한 담보가 없는 사람은 사업을 시작하지도 말라고 당부하는 중소기업사장들이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지난해까지만 해도 충분히 할인받을 수 있는 어음도 최근에는 할인받기 힘든 상황이다. 사채시장도 경색되긴 마찬가지다. 영세기업들이 급전을 조달해오던 사채시장은 신용도를 무척 까다롭게 따지는추세이다. 급전을 꾸다가 월급쟁이 친구들에게 핀잔을 들을 때도적지 않다. 급전을 조달하기 위해선 친인척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없다고 중소기업사장들은 말한다. 중소기업청의 조사에 따르면 올들어 부도를 낸 기업중 20%는 어음을 받았다가 어음할인을 받지 못해 부도를 당했던 것으로 나타났다.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는 중소기업의 경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도 영업을 활성화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꿈쩍하면 돈이 들어가는데 하루라도 더 버티려면 1원이라도 아껴야한다는 생각뿐이다.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에 발맞춰 중소기업들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절묘한 시점에서 꿈쩍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난국에는 보수적인 경영으로 버티는게 성공하는 길이라는 냉소적인 경영관이 확산되고 있다. 어차피 정부의 중소기업정책도 믿을만한게 없다고 여기고 있다. 피부에 와닿는 정책이 언제 있었느냐고 오히려 묻는다. 정부는 한보사태직후 상업어음할인 경영안정자금, 중소기업회생특례자금, 보증지원확대 등의 방법으로 2조6천억원 규모의 지원대책을 내놓았지만 과연 얼마나 지원됐는지 궁금하다고 묻는다.구로동 공구상가에서 유통업을 하는 박영식사장은 『구조조정과정에서 중소기업들이 파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금흐름이 경색되고 건전한 경영관이 소멸되며 우량 중소기업조차 희생을 강요받고 있는게 문제』라고 말한다. 적어도 연쇄부도는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한번 죽은 기업을 되살리려면 새로운 회사를 세우는 것보다 두배세배의 노력이 필요한게 아니냐』고 박사장은 아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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