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제 기능 없는 정부의 '거수기'

국민연금이 총체적인 위기국면을 맞게 된 데에는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위원장 재정경제원장관)의 「견제기능 부재」 「관 주도 운영」도 한몫을 하고 있다. 국민연금법 84조는 기금운용에 관한 중요사항을 심의·의결하기 위해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이하 운용위)를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운용위는 엄연히 최고의사결정기구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같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미리결정한 기금운용 계획을 잠깐 읽어보고 그대로 통과시켜주는 「거수기」 노릇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통화신용정책에 관한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운영위원회가 재경원과 한국은행이 마련한금융정책을 추인하는 역할에 머물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운용위의 이같은 한계는 지난 93년 명백히 드러났다. 당시 정부는국가경쟁력 강화를 명분삼아 여론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등 신규 조성되는 연기금 여유자금의 대부분을 공공자금관리기금으로 예탁받아 △중소기업 지원 △사회간접자본 확충등에 투자한다는 내용의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을 우여곡절 끝에 제정했다. 정부는 공자법 제정이 논란을 빚자 9월 운용위회의를 소집조차 하지않은채 서면결의로 94년도 연금기금운용계획을 통과시키는「폭거」를 자행했다. 괜한 말썽을 원천봉쇄하자는 심산이었음은물론이다. 13명의 위원중 반대의견을 낸 위원은 노총위원장과 금속노련위원장등 사용자외 가입자 대표 2명 뿐이었다. 당시 서면결의서를 통해 박종근노총위원장은 『연금기금 운용방식의 중대한 변화사항을 서면결의하는 것은 있을수 없다』며 『위원회를 즉각 소집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뒤에도 운용위는 매년 두차례 가량 열리는 회의에서 정부가 제출한 전년도 결산안과 익년도 계획안을 일사천리로 의결하고 있다.이같이 운용위가 「허수아비」 노릇밖에 못하는 이유는 선임기준및 위촉과정부터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현재 위원수는 총 15명.위원장인 재경원장관과 부위원장인 보건복지부장관을 비롯, 농림부장관 통상산업부장관 노동부장관등 5명의 장관은 당연직 위원이다.여기에다가 사용자단체장 2명, 사용자외의 가입자 대표로서 노총위원장 산별노련장등 2명, 농어민 및 농어민외 지역가입자 대표자3명, 국민연금관리공단이사장(1명), 관계전문가 2명이 포함된다.정부가 임명하는 국민연금관리공단이사장, 「정부와 가까운」 사용자단체장과 전문가를 포함하면 범정부측 위원이 10명으로 과반수를크게 넘는다. 공공자금관리기금에 더 많은 국민연금자금을 예탁시키기 위해 정부쪽에 유리하게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국민연금기금의 관리·운영에 관한 연금가입자의 의사가 반영될 턱이 없다. 연금갹출을 부담하는 국민과 기업은 뒷전이고 관리를 책임지는 정부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더욱이 공무원연금이나 군인연금과는 달리 순수한 민간기금인 국민연금을 정부가 재정목적으로 활용하면서 관리운영비 일부와 농어민연금보험료 지원으로 지난 88년부터 96년까지 부담한 금액은2천6백80억원. 이같은 규모는 지난해 국민연금중 공공자금관리기금신규예탁액 4조8천억원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정부·헌법재판소, 운용위 활동은 합헌 주장물론 정부와 헌법재판소는 이같은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재정경제원은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국민연금기금 위헌심판에 대한 의견서」를 통해 『운용위의 의사는 재적위원 과반수의 출석으로 개의하고 출석위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의결한다』며『위원장은 단순히 운용위를 대표하며 그 회무를 통리할뿐 의사결정에 있어 어떠한 특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므로 재경원장관이자의적으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95년7월 농어민연금 실시를 계기로 지역가입자 대표 3명을 추가하고 관계부처장관을 5명에서 4명으로 줄이는등 15명의 위원중 사용자대표, 근로자대표, 지역가입자대표, 수급권자대표 등이 8명으로 과반수에 이르는만큼 가입자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될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밝혔다.헌법재판소도 이와관련 같은해 10월 『재경원장관으로 하여금 위원장직을 맡도록 한것은… (그가) 국가의 경제운영 전반을 책임지고있기 때문』이라며 『재경원장관이 위원회를 자의적으로 주도할수있는 것은 아니며 사용자대표, 가입자대표, 수급권자대표 등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연금가입자들의 기금관리·운영에 관한 참여권이사실상 박탈된다고 볼수 없다』고 판시했다.그렇다면 이같은 정부 주장과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이 과연 맞는지 검증해보자. 국민연금법시행령 54조에 따르면 운용위 위원자격이 있는 관계전문가는 국민연금에 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자로규정돼 있다. 그런데 지난 3월 현재 차동세 한국개발연구원장과 연하청 한국보건사회연구원장이 관계전문가 위원으로 위촉돼 있다.차원장은 경제학박사로서 한국은행임원, LG경제연구소장, 산업경제연구원장 등을 역임한 유명한 이코노미스트이지만 국민연금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것이 재경원관계자들의 평이다. 연원장은 복지정책 입안에 참여한 경제학박사이다. 그렇지만 전문가를 위원으로 포함시킨 당초 이유가 중립적이고 공익적인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었다면 사회복지학 등을 전공한 대학교수들 중에서 위촉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차원장과 연원장이 위원이 된 실질적인 이유는 국민연금을 운용하는 양대부처인 재경원과 복지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의 장으로서 각각 해당부처의 이해를 대변하기에 적절한 인물이기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농어민과 농어민외의 지역가입자 대표에서 3명을 위촉한다는 규정도 대표성 구현면에서 의문이 간다. 현재 이 분야 위원은 원철희농업조합중앙회장과 박종식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장, 함정호 대한변호사협회장으로 한결같이 고위직 인사이다. 정부의 결정에 불만이 있다고 해도 이같은 뜻을 표로 행사할수 있는 위원은 사실상 근로자대표 2명과 변협회장등 5명이하에 머물 공산이 크다.◆ 가입자 권익 극대화 조항도 지켜지지 않아이같은 현실에서 비록 지난해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의 위원 구성방법을 규정한 국민연금법이 공공자금관리기금법등과 같이 헌법재판소로부터 합헌 판결(다수 의견)을 받았으나 이를 납득하기는 힘들다. 당시 10명의 재판관중 유일하게 위원의견을 낸 조승형 재판관만이 국민연금제도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는 평가를받고 있다. 조재판관은 국민연금법 및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이 헌법상 기본권 제한의 한계를 벗어나 국민의 재산권및 행복을 추구할권리를 제한, 헌법에 위반한다고 주장했다. 운용위와 관련, 그는『사용자외의 가입자를 대표하는 자로서 노동조합의 총연합단체장및 산업별연합단체장을 위촉하게 되는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위원들을 정부측에 가까운 인사로 선택, 얼마든지 위촉할 수 있다』며『따라서 운용위가 강제예탁제도를 유명무실하게 할수 있는 막대한기능을 보유하고 있더라도 강제예탁제를 입법까지 하게된 강력한정부측 의사 때문에 운용위의 기능은 형해화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한편 운용위는 국민연금법 정신을 위배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국민연금법 85조에 따르면 운용위는 가입자의 권익이 극대화되도록?공공사업에 사용할 기금자산의 비율 ?공공사업에 대한 기금배분의 우선순위 ?가입자및 수급권자의 복지증진을 위한 사업비등에관한 기금운용지침을 마련할 임무를 갖고 있다. 그러나 1년에 두차례 모이는 회의에서 심도있는 논의는 하지 않은채 정부와 연금관리공단이 작성한 계획안과 결산안에 도장을 찍어주는데 머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국민연금기금의 공공부문 수익률은연 10.30%로 금융부문의 11.86%보다 여전히 1.56% 낮다. 「보건복지부장관은 국민연금 재정의 장기적인 안정유지를 위해 그 수익을최대로 올릴수 있도록 기금을 관리·운용할 의무가 있다」는 동법83조 2항의 정신이 공공자금관리기금법에 밀려 사실상 사문화됐는데도 운용위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연금기금의 파행운용을 방지하려면 위원회 구성방법이 개혁되어야한다. 그 방향은 당연직 위원의 축소와 민간대표의 참여 확대이다.가입자 대표수를 늘리며 관계전문가도 중립적인 입장에 서있는 학자로 뽑아야한다. 실질적인 심의를 위해서는 회의 횟수 확대가 전제되는만큼 위원들을 굳이 단체장에서 선임하기보다는 중간관리자로 낮추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 복지부 및 연금관리공단측은 전년도 운용관련 결산서를 충실하게 작성해야한다. 관리운용비전출금등 사업외비용 등 예산절감이 가능한 분야에 대한 상세한 지출명세서를 제출, 집행과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시도가 뒤따라야한다. 또운용계획서상 지출계획도 보다 자세하게 명시, 철저한 심의가 이뤄질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운용위의 의견이 결산과정에서 반영됐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하는 피드백체제의 구축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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