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가입자 벼락맞나

보험이 불, 바퀴와 더불어 인류의 3대 발명품이라는 주장은 다소이색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기실 날카롭다. 온갖 불안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좀 심하게 표현해 「생애 곳곳이 지뢰밭」이라고해도 지나치지 않을 일부 개도국에서 보험은 짝을 찾기 힘든자구적 대비책이다.보험 가운데에서도 연금보험은 그 사회의 인간존중 수준을 말해주는 사회보장제도라고 할수 있다. 이미 유교에서 5복중의 하나로 고종명(考終命·제 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음)을 제시했듯이 사회가 그 구성원들의 말년을 배려해준다는 것은 실로 뜻깊다고 하지않을 수 없다.현실 생활에서 노후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한 「빽」으로 작용한다. 은퇴 뒤가 불안하냐 그렇지 않느냐의 여부는 중장년기의 사고와 행동을 상당부분 좌우하는게 작금의 현실이다. 개인연금 보험을 선전하는 광고 카피는 당연히 이런 부분에초점을 맞추고 있고, 생활설계사 역시 『연금에 가입한 고객들은하나같이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어요』라며 거의 종교 권유에 가까울 정도의 설득공세를 펴고 있음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노후가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또한 대단한 즐거움과 여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외국 여행때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외국노인들의 부부동반 관광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유명 관광지를 다니다보면 퇴직한 것이 분명한 노부부들과 다반사로 마주치게되며 평일의 골프장에서는 노인들만이 드넓은 초원을 점거한 채 한가로이골프채를 휘두르는 모습을 볼수 있다. 독일인들의 사는 낙 가운데하나는 은퇴한 뒤 「지상 최후의 낙원」 인도네시아 발리섬을 찾는것이라는 말도 있다. 서유럽 선진국 같은 경우 퇴직 뒤 최종 소득의 상당부분을 다달이 받고 있는만큼 연금만으로도 이러한 질 높은삶의 추구가 가능한지도 모르겠다.믿기 힘들겠지만 노후를 대비케해주는 연금에 관한 한 한국도 제도상으로는 가장 잘 갖춰진 나라중의 하나로 꼽힌다. 60년도에 처음도입된 공무원연금을 비롯해 63년 군인연금, 75년에 사립학교 교직원연금이 순차적으로 시행됐고 지난 88년 1월부터는 국민연금이 실시돼 올해로 만 10년째를 맞고 있다. 국민연금의 경우 당초 10인이상 사업장 가입자를 대상으로 했다가 5인 이상 사업장(92), 농어촌 지역(95)으로 각각 확대됐으며 98년부터는 도시 자영자까지 포함할 계획이다.또한 최근 신한국당에서는 연금 가입 자격이 없는 전업주부와 농어촌 여성, 학생, 실업자들을 대상으로 「기초연금제」의 신설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이 계획이 현실화될 경우 모든 국민이 연금에 가입하는 「1인 1연금제」가 확립된다. 공무원과 군인,사립학교 교직원 등 이미 연금에 가입해 있는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제도가 국민연금이므로 한국도 전국민 개보험시대를 맞이하기 직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98년부터 도시 자영자 연금 수혜 가능내용적으로 볼 때도 서구 선진국에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는게 관계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국민연금의 경우 △연금 급여시 평균이하의 소득자에 플러스 알파 항목을 부여함으로써 연금 혜택이 저소득층에게 상대적으로 많이 돌아가도록 하는 소득 재분배 기능을담았고 △급여에 물가변동률을 반영함으로써 미래의 통화가치 하락에 따라 실질 구매력이 상실되는 폐해를 막았다. 또한 △임금 대체율(퇴직 이후의 연금 급여액과 재직시의 급여를 비교한 비율.1백%면 연금이 봉급과 완전히 동일하고 50%면 봉급의 절반을 연금으로 받는다는 의미)도 다른 나라보다 높은 수준으로 책정한 것 등도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4개 공적(公的)연금제도는 출범 당시의 좋은 취지와발상 등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문제점들은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손질로써 상태가 호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연금 자체가 구조적·재정적·정치적·시기적으로 결점과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연금 전반에걸친, 대대적인 수술을 해야 한다」는데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이일치되고 있다.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기금 고갈의 우려다. 한국의 연금제도는가입자로부터 보험료를 갹출해 기금을 적립, 운용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수입보다 지출이 많으면 당연히 적자가 발생하게끔 되어 있고 적자가 발생할 경우 다음 예상되는 수순은 연금 지급불가, 즉 「연금 부도」다. 현 세대는 내기만하고 받지는 못하는것이다.우선 군인연금을 보자. 소급 적용으로 인해 시행 초기부터 연금 수급권자를 낳는 등 사실상 3공화국의 정치적 고려에 의해 출범했다고 볼수 있는 군인연금은 지출이 수입보다 더 큰 기형적 구조를 보이면서 지난 77년에 이미 기금이 고갈돼 버렸다. 95년에 6천5백억원의 적자를 냈으며 현재 매년 갹출 수입의 2.5배가 넘는 상당액수를 중앙정부 일반회계의 경상지원을 받아 메우고 있다. 병역자수는변동이 없어 고정적인데 반해 연금 수급권자는 매년 늘어나고 있어적자규모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는 한 적자 보전을 위한 중앙정부의 재정 부담은 그에따라 끌려갈 수밖에 없다.공무원 연금도 아직은 흑자를 유지하고 있으나 구조적인 추세는 군인연금과 비슷하다. 즉 초창기에는 갹출료 수입이 급여지출보다 많았지만 연금을 받아가는 대상자가 많아지면서 급여지출 증가율이갹출료 수입 증가율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공무원 연금은 올해 약 10억원의 적자가 예상되는 것을 시발로 98년도 1백24억원 등적자규모가 계속 확대돼 오는 2009년경에는 기금이 완전 고갈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사립교원 연금 또한 전반적인 추세는 두 연금과 같아 2015년 적자, 2022년 기금고갈의 전철을 밟을 것으로 예측된다. 총무처는 이같은 연금 문제를 뒤늦게 인식, 96년부터 보험료율을 기존의 11%에서 13%로 인상했으나 그 효과가 지속적일 것이라고 보는 관계자는 아무도 없다.◆ 내기만 하고 받지는 못하는 연금?국민연금의 경우 아직 도입 초기 단계이므로 여타 연금과 달리 적립기금이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급여지출이 본격적으로 늘어나면서부터는 적자발생이 불을 보듯 분명하며그에 따라 기금고갈 사태 또한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추산으로는 2023년 적자, 2033년 기금고갈이라는 시나리오가 제시되고 있다. 얼핏 너무 먼 미래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연금이60세부터 지급되므로 이 기사를 읽는 30대의 독자라면 바로 자신의노후에 해당되는 얘기다. 국민연금은 특히 규모가 원체 큰데다가연관된 가입자가 많기 때문에 적자문제가 발생할 경우 엄청난 파급효과를 불러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이처럼 큰 폭의 적자가 나는 이유는 한마디로 수입과 지출의 불균형 때문이다. 현행 제도는 가입자의 보험료 납부 부담에 비해 급여혜택이 상대적으로 크게 되어 있어 장기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것이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추정에 따르면 본인이 낸 갹출금과 향후 받게될 퇴직급여를 현재가치로 비교한 차이(기대수익률)는 국민연금의 경우 1.4∼2.6배, 공무원 및 사학연금의 경우 3배, 군인연금은 5배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즉 가입자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납부한 총갹출금의 2배 이상을 기금 외부에서 조달해야 한다는 의미다. 외부조달이라는 것은 결국 정부보조를 받는다는 뜻이고 이는 연금재정의 홀로서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연결된다.연금간의 형평성 문제도 심각하다. 국민연금의 경우 임금수준이 높아질수록 납부금에 대한 상대적 연금혜택이 감소하면서 공무원, 군인, 사학연금 등 3개 특수직역 연금 가입자와의 혜택 차이는 더 벌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더구나 공무원 및 사학연금 가입자의 연금혜택 수준은 국민연금 가입자의 저소득층과 비슷하며 군인연금가입자의 경우는 국민연금 저소득층보다 월등히 높다. 제도간의 형평성뿐이 아니라 소득계층간에도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얘기다.KDI의 문형표 박사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데 대해 『3개 직역연금이 구체적인 재원조달 계획은 마련하지 않은채 제도 발족 이래 급여 내용을 경쟁적으로 확충해왔기 때문』이라면서 『이로 인해 가입자가 연금 갹출 부담에 비해 과다한 연금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구조적인 적자가 「숙명」이라면 잘못된 구조는 고쳐져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연금 갹출률의 조정, 지급개시 연령의 제한, 소득추계방식(퇴직후 재취업했을 경우에는 연금혜택을 삭감 또는 연기하는 제도)의 강화, 연금 급여의 조정 등이 거론되고 있다. 예컨대지급개시 연령과 관련, 외국에서는 65세부터 지급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 한국은 평균 40대 중반(군인)이나 50대 중반(공무원 및 사립교직원)부터 연금을 받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형편이다. 「한창 일할 나이에」 연금을 수급하는만큼 연금급여 부담이 가중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갹출률도 한국은 9%(98년부터)에 지나지 않으나 선진국은 10%선을 훨씬 넘는다.◆ 구조적 적자 개선의 마지막 기회더욱이 98년 7월부터는 국민연금제도가 도시 자영자에게까지 확대될 예정이어서 연금 적자구조의 심각성을 더해줄 것으로 보인다.이는 95년 7월부터 실시된 농어민 연금의 사례를 보면 잘 알수 있다. 농어민 연금은 시행한지 1년반이 지났음에도 아직 가입률이라든가 징수율이 극히 저조한 실정이다. 한 예로 농수산부가 조사한평균 농가 소득은 95년에 1백88만원이었는데 신고 소득 평균은58만원에 지나지 않았다.소득이 정확히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 지역은 소득 파악이 더 힘들다. 직장도 빈번히 이동하고 자산조사도 쉽지 않다.징수관리가 더 어려울 것은 불문가지다. 결국 현행 제도의 보완없이 도시 자영자에게 확대 적용할 경우 재정위기는 더욱 가속화될수밖에 없다.그러나 연금의 「적자 숙명」을 개선하는 문제는 결코 쉽사리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갹출료의 인상이나 지급개시 연령의 연장, 급여액 삭감 등의 조처는 집권자 입장에서 볼 때 정치적 생명이 걸린 문제다. 유권자들의 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공무원 역시 마찬가지다. 『하필이면 내가 담당하고 있을 때 비난받아 가며 제도를 바꿔야 할 이유가 뭐냐, 자리를 옮기면 그만인데...』라는게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물론 연금이 안고있는 문제점을 정부가 인정하지 않고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총리실 산하에 연금 전반에 관한 문제 등을 검토하기위한 「사회보장심의위원회」라는 기구가 구성되어 있기는 하다.하지만 이 기구는 아직 한 차례도 소집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금제도 개선 문제가 「뜨거운 감자」임을 보여주는 실례다.그럼에도 제도개혁은 더 늦출 수 없다. 곪을 곳은 놔두면 상황만더 악화될 뿐이다. 국민연금 도입 15년이 지나는 오는 2003년이면약속한대로 60세 가입자에 대한 노령연금이 지급된다. 그때 가서지급연령을 60세 이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할 순 없다. 갹출료도 한번에 대폭 인상할 수 없다. 그때 예상되는 반발의 강도는 지금 당장 개선할 경우의 반발에 비할 바가 아니다. 지급연령을 바꾸려면단계적으로, 즉 2년에 한 살씩, 또는 3년에 한 살씩 지급연령을 늦춰나가야 한다. 그래야 반발이 적다. 그런 계산식이라면 5살을 연기하기위해 10∼15년이 소요된다는 결론이 나온다.지금 제도를 개선해야 할 이유는 또 있다. 정치권의 속성상 선거를앞두고는 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새정부의 초기에 하라는 것이다.98년 정부가 아니라 2003년 정부에 맡기는 것은 너무 늦다. 곧 연금이 바닥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드시 내년에 들어설 정부가 메스를 들어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제도개선에 관한 전국민적 의견을 수렴해야한다. 그리고 그 추진 주체는 당연히 최고 행정 책임자인 대통령이 되어야한다. 「자리를 옮겨 다니는」 직업공무원이 스스로 나서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지는 못한다. 오직대통령만이 공무원을 움직일 수 있다. 차기 대통령이 연금의 현황을 솔직히 얘기하고 양해를 구함으로써, 제도개선에 대한 국민적공감대를 형성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방안이다. 그리고 마지막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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