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과 열정으로 쌓은 신화 ‘월드 베스트’ 꿈 무럭무럭

‘거인 골리앗과의 싸움에 나선 청년 다윗의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패기와 도전의 기록이자 싱싱한 땀냄새와 타오르는 열정으로 가득한 수많은 명승부에 관한 연대기.’정동일 샌디에이고 경영대 교수는 이라는 책에서 신한은행의 성장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다소 과장된 듯 보이지만 실제가 그렇다. 소수의 작은 영업점포에서 시작한 것은 다른 은행과 다르지 않지만 불과 24년 만에 ‘신한금융그룹’(이하 신한)이라는 국내 2위의 금융그룹으로 성장한 것이다. 금융사들이 무더기로 문을 닫던 외환위기 시절에도 신한은 끄떡없었고 외국계 금융사의 잇단 진출에도 신한은 주눅 들지 않고 성장해 나갔다.라응찬 회장, 본격 성장 견인차신한의 모태인 신한은행이 설립된 것은 1982년이다. 이희건 현 신한금융지주회사 명예회장을 비롯한 본국 진출에 뜻을 둔 재일교포들이 창업공신들이었다. 이들은 77년 ‘제일투자금융’이라는 단기금융회사를 차려 이미 한국에 진출해 있었지만 은행설립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투자에 제한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81년 금융자율화와 국제화 바람이 불면서 은행을 세우겠다는 이들의 꿈은 현실로 이뤄졌다.신한은행은 국내 최초의 순수민간자본으로 설립되는 은행이라는 의미가 적지 않았지만 기대보다 우려가 많았다. 총직원 280명 남짓, 자본금은 은행법상 갖춰야 할 최저액인 250억원 규모에 불과한 병아리 은행이 경쟁에서 살아남겠냐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한은행의 첫날은 화려했다. 영업 첫날 명동 코스모스빌딩에 위치한 본점 영업부에만 1만7,520명이 방문했다. 신규 계좌는 4,200개, 수신고는 357억4,800만원을 기록했다. 국내 은행 역사상 전례가 없는 기록이었다.신한은행은 그후 거칠 것 없는 성장을 이어갔다. 이는 이 은행의 총자산액, 당기순이익 등 주요 재무현황 추이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첫해 1,856억원이던 총자산액은 87년 2조8,329억원으로 5년 만에 15배 이상 불어났다. 같은 기간 당기순이익은 9억원 적자에서 222억원으로 증가했다. 다시 5년 후인 92년엔 총자산 12조7,227억원, 당기순이익은 1,252억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97년엔 최단기간 수신고 25조원이라는 신기록을 작성했다.신한은행의 눈부신 발전은 운이 좋았다거나 우연이 아니다. 계획적인 전략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84년 신한은행은 ‘새로운 금융문화 창조’를 기치로 제1차 5개년 경영계획을 추진한다. 전국은행으로 확고히 자리잡기 위한 경영기반 구축, 정예주의의 정착, 고객종합지원체제의 확립, 미래은행 시스템의 지향이라는 4가지 과제를 성공시켜 89년까지 총자산 7조369억원, 국내외 지점 75개, 직원 3,500명을 달성하자는 내용이었다. 결과는 목표에 근접했다. 총자산 6조4,161억원, 지점 80개, 직원 2,722명이 89년 신한은행의 모습이었다.91년 라응찬 현 신한금융지주회사 회장이 제4대 은행장으로 취임하면서 신한은행은 또 다른 도약기를 맞게 된다. 라행장은 6대 은행장까지 역임하는 8년 동안 ‘리테일 혁명’을 주도하며 신한은행의 면모를 업그레이드시켜 나갔다. 신한은행의 ‘리테일 혁명’은 새로운 금융환경에 대한 신한은행적인 대응이었다. 이는 법인이나 기업 등을 대상으로 하는 홀세일(Whole Sale)과 대별되는 개념으로 개인이나 개인사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금융서비스다. 말하자면 은행영업의 범위를 한 단계 넓혀나가자는 것이었다.하지만 경쟁은행에 비해 영업점이 적은 신한은행으로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인프라가 부족하니 결국 무기는 열정과 신선한 아이디어, 발품일 수밖에 없었다. 수천명의 행원들이 거리로 나가 시민들에게 전단을 나눠주고 행장과 임원들은 영업점과 거래처를 돌며 고객을 만났다. 이런 노력은 90년 수신고 4조원, 91년 5조원의 성과로 돌아왔다.신한에 어두운 기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위기는 IMF 외환위기 시절이었다. 제2금융권에서 불기 시작한 파산의 물결이 신한에도 닥쳤다. 98년 신한은행의 모태였던 제일종합금융이 청산된 것이다. 제일종금의 주주였던 신한은행은 당초 1,200억원의 증자를 통해 위기를 넘기려 했다. 하지만 2,100억원에 달하는 추가증자와 900억원의 후순위채권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결국 증자를 포기했고 제일종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에 이른다. 이는 자사의 동반부실과 계열사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결정이었다.외환위기는 반대로 신한은행에 기회로 작용하기도 했다. 부실은행을 인수하며 덩치를 키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은행의 체질을 개선,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외환위기 시절 IMF와 정부는 5개의 부실은행을 정리하기로 결정하고 인수할 은행을 선정했다. 신한은행이 떠안을 곳은 동화은행이었다. 동화은행 인수로 신한은행은 249개의 지점, 4,420명의 직원, 56조5,000억원의 자산을 보유한 대형은행으로 부상했다. 동화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지점은 118개였다.부실은행을 떠안는 것은 결국 기업의 리스크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한다. 신한은행은 조직개편을 단행하며 추가적인 위기 돌파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개편의 핵심은 고비용구조를 개선하고 핵심부문에 역량을 집중해 수익구조를 안정화시켜 국제경쟁력을 강화하자는 것이었다. 우선 6개의 사업본부로 조직을 개편하고 독립채산제를 도입해 책임경영체제를 확립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일반은행의 적자규모가 12조5,000억원에 달했던 98년 신한은행은 590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초대형 금융그룹의 탄생신한은행은 한 번도 안주하거나 쉬지 않았다. 은행 고유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도 전력을 다했지만 다른 금융사업으로도 끊임없이 영역을 넓혀나갔다. 역량이 적을 때는 적은 대로, 클 때는 큰 대로 신한의 영역확장은 중단 없이 이어졌다.85년은 신한은행이 ‘종합금융그룹’이라는 장기비전을 위한 첫 삽을 뜬 해다. ‘동화증권’을 인수, ‘신한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하면서 증권업에 진출한 것이다. 신한증권은 2002년 굿모닝증권을 합병하면서 굿모닝신한증권으로 사명을 바꿨다.90년에는 생명보험업계로 영역을 확대했다.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국내 보험시장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경제발전에 따라 보험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신한은행도 신시장 진출계획을 구체화해 나갔다. 하지만 86년 한·미 통상협상의 타결로 외국계 생명보험사의 국내진출이 가능해져 경쟁환경은 악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신한은행은 보험사 설립을 포기하지 않았고 89년 ‘신한생명보험’을 일으켜 세웠다. 이 회사는 95년 보험업계 최단기 총자산 1조원을 돌파하고 2004년에 총자산 4조원을 달성하는 등 견실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91년에는 신한리스를 세워 리스시장에도 진출했다. 10월에 서울사무소를 개설하고 이듬해인 92년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93년에는 납입자본금을 200억원에서 300억원으로 확대했다. 해가 갈수록 영업실적은 눈에 띄게 향상됐다. 첫해인 91년 1,318억원이던 영업실행액이 93년 2,575억원으로 2년 만에 갑절 가량 불어났다. 당기순이익은 5억원에서 38억원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신한리스는 2001년 신한캐피탈로 사명을 변경했다.‘신한투자신탁운용’을 설립하며 투자신탁업에 진출한 것은 96년이었다. 신한이 70%, 농협이 30%를 출자한 회사였다. 2002년 지주회사의 전략적 제휴사인 BNP파리바가 50%의 지분을 인수하면서 신한비엔피파리바투신운용으로 이름을 바꿨다.신한금융그룹의 역사에서 2001년은 영원히 기억될 해다. ‘신한금융지주회사’를 설립하며 명실상부한 종합금융그룹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것이다. 지주회사의 설립은 신한으로선 미래를 위한 최적의 묘수였다. 국민은행 등 초대형 은행의 탄생, 외국계 은행의 진출 본격화에 따라 보다 치열한 경쟁이 예상됐고 이에 따라 신한도 경쟁력 확보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합병을 통한 덩치 키우기는 혼란을 피할 수 없고 개별 계열사의 힘만으로는 험난한 파도를 넘기 힘들었다. 신한은 지주회사를 설립, 겸업화를 통해 핵심 자회사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길을 택했다.2001년 지주회사에 포함된 회사는 7개사였다. 신한은행, 신한증권, 신한캐피탈, 신한투신운용 등 4개의 자회사와 신한은시스템, 신한종합연구소, 신한금융유한공사 등 3개의 손자회사가 그들이었다. 신한생명은 주식에 대한 가치산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대상에서 일단 제외됐다. 이 회사가 지주회사에 합류한 것은 2005년 12월이었다. 지주회사의 지분에 참여한 기업은 신한은행을 비롯한 4개의 자회사와 전략적 제휴를 맺은 BNP파리바그룹 등이었다.지주회사가 출범한 후에도 신한의 팽창은 계속됐다. 우선 제주은행이 지주회사의 일원이 됐다. 2000년 정부는 자본의 70% 가량이 잠식된 상태였던 제주은행의 인수합병을 신한은행에 제안했다. 제주은행을 합병했을 때 신한은행은 제주지역의 안정적인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초 제안인 합병이 아니라 위탁경영 후 지주회사 편입이라는 방법을 택했다. 제주은행은 2002년 지주회사에 편입됐다.신한카드가 지주회사에 편입된 것도 2002년이었다. 87년부터 운영해 오던 신한은행의 카드사업부가 분할되는 동시에 자회사에 포함됐다. 신한은행의 카드사업부는 회원수가 97년 100만명, 2001년 200만명을 돌파하며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은행에 소속된 사업부의 한계가 있어 운신의 폭이 넓지 않았다. 독립을 통해 신한카드는 합작, 제휴, 인수합병 등 다양한 경영을 펼칠 수 있게 됐다. 굿모닝증권이 신한증권과 살림을 합치면서 지주회사의 가족이 된 것도 2002년의 일이었다.신한이 국내 2위의 금융그룹으로 부상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신한은행과 조흥은행의 합병이었다. 2003년 정부는 조흥은행의 매각을 결정한다. 조흥은행은 외환위기 이전 한보그룹, 삼미그룹, 기아그룹 사태를 연이어 겪으며 극도로 부실해졌다. 외환위기 이후 회복의 조짐을 보였지만 대우그룹 사태가 또다시 발목을 잡아 결국 매각 대상이 됐다.신한에 조흥은행과의 통합은 초대형 은형으로 약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조흥은행이 갖고 있는 전국적인 유통망과 자산, 노하우를 더하면 단번에 국내 최정상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신한은행은 정부의 매각 제안을 받아들였고 2003년 조흥은행의 지분 80.04%를 인수했다.하지만 신한은행은 제주은행과 그랬던 것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이질적인 두 조직의 결합으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절차를 끈기 있게 밟아나갔다. 2년간의 공동경영기간을 두면서 두 조직의 유전자를 하나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지난 4월1일 통합과정을 마무리하고 새출발을 했다. 이로써 신한은행은 총자산 163조원, 946개의 지점, 1만1,000명의 직원을 거느린 초대형 은행으로 재탄생했다.신한금융그룹의 성장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2008년 은행부문 1위, 증권 2위, 카드 3위를 목표로 삼고 있다. 그들의 성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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