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방 수천, 전화방 3백개 '후끈'

촉촉히 비가 내리는 어느날 오후. 독산동의 한 중소기업에서 근무하는 L씨(34)는 신림동쪽에 영업을 나왔다가 신림사거리 한켠에 있는 전화방 「텔레시스」를 발견한다. 마침 우울하고 외롭다는 생각이 들때였다. 말로만 듣던 전화방을 찾아 미지의 여인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면 일상의 스트레스가 말끔히 풀릴 것 같았다. 물론 망설임도 있었다. 전화방의 음란 퇴폐영업에 대한 지적을 대중매체에서접한 적이 있어서이다. 그러나 망설임은 잠깐, 잠자고 있던 호기심이 막연한 기대감과 어깨동무하고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밑져야본전이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호기도 발동했다.4층의 전화방에 들어서자 아르바이트를 하는 젊은이가 선불을 요구했다. 통화가 개시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1시간에 1만원이고 10분초과할 때마다 1천5백원의 추가요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친절한 설명도 뒤따랐다. 나이도 물었다. 전화가 걸려오는 여성과 연결시켜주는데 필요한 유일한 정보이다. 그리고 방배치를 받았다. 1평 남짓한 방에 들어서니 침침하고 으슥한 분위기였다. TV화면에는 유선방송이 켜져 있었다. 자그마한 테이블에는 재떨이와 성인만화 두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편안한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리자 전화벨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전화를 걸어온 여자가 33살인데 나이를 물으면 36살로 답하고 대화를 나누라고 한다. 「여보세요」 상대여자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이내 머쓱해진다.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전화방이 처음이어서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L씨는 대화가 이내 단절되는데 미안한 감이 들었다.◆ 전화방, 음란스러운 내용이 중심화제상대 여자는 개포동에 사는 애라엄마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비도 오고 마음이 허전한터에 벼룩시장 광고를 보고 전화를 했다는것이다. L씨는 따로 물어볼 말을 찾지 못하고 왜 허전하냐고 무심코 물었다. 『결혼 5년째인데 이태전부터 회사원인 남편과 정상적인 잠자리를못해요.』 한마디로 남편이 남자구실을 못해 자신의 성욕을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위도 하고 별짓을 다해보지만 외로울 땐 미칠 것같다고 너무나 과감하고 솔직하게 말한다. 남편은 헤어지자고하지만 불쌍해서 떠날 수 없다는 등 신파조의 말투도 간간이 곁들여졌다. 그리고는 이내 유혹이 시작됐다. 자신의 키는 얼마고 얼굴은 어떻고 해서 길을 갈때면 뭇 남성들이 한번씩 자신을 훔쳐본다고 자신의 미모자랑을 장광스럽게 늘어놓았다. 심지어 성관련 부위에 대한 세세한 묘사도 농도있게 전개됐다. 음란스러운 내용이 대화의 중심화제가 됐고 그렇게 시간이 30분가량 지났다. 그리고 애라엄마는 너무 흥분이 돼서 목욕이라도 해야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L씨는 황당했지만 재미도 있었다. 잠시후 40대초반의 세딸을 둔 가정주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지만 이전 전화내용에 비하면 재미가떨어졌다. 전화방을 나오면서 L씨는 다소 낯은 뜨거웠지만 1만원이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상대가 전화방에서 고용된 주부였을 수도 있지만 그랬다 해도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 싶었다. 이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주위의 친구들에게 전화방경험을무용담처럼 늘어놓기도 했다.이 전화방을 찾는 남성은 하루에 60~70명정도 된다. 30대가 가장많고 20대 40대들도 심심치않게 들른다고 전화방 아르바이트 청년은 설명했다. 전화를 걸어오는 여성도 30대가 많으며 하루에 2백여통정도 된다고 한다. 대화에 실패해 2,3분만에 통화가 끝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30, 40분이상 대화를 나눈다는게 전화방측의얘기다. 전화방이 국내 도심에 처음 들어선 것은 지난해 11월 성남 태평동에 「텔리클럽」이 생기면서부터였다. 4년전부터 일본에서 「테레쿠라」라는 이름으로 성업하던게 국내에 상륙한 것이다. 일본의 테레쿠라에서는 음란전화 폰섹스는 물론 여중고생의 매춘이 성행, 사회문제화되기도 했었다. 현재 전국에서 영업중인 전화방은 서울1백30여곳, 경기 60여곳 등 총 3백여곳으로 추정된다. 경찰청은 최근 전화방이 음란 퇴폐성 대화의 온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전기통신사업법(32조 2항)을 적용해 집중 단속토록 지방경찰청에지시했으나 아직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골방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골방은 서로간의 만남과 건전한 대화를 전제로 한 공간이 아니다.도시인들이 지쳐서 밀폐된 공간으로 숨어들어가는 현상을 반영한것이다. 새로운 방이 생겼다 하면 도심에서 무언가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이 그곳을 찾는다. 정보화가 급진전되고 사회가 다원화 다기화되면서 사회구성원들이 유리알처럼 흩어져 자신의 골방을 찾아들어가 두꺼운 콘크리트 벽을 치는 것이다. 공동체에서 친밀감을형성하려는 노력은 이미 포기한지 오래다. 심리학자들은 청소년기에 자아정체감을 형성하지 못한 이들이 사회속에서 융화하지 못하고 자신을 폐쇄공간에 밀어넣는다고 해석한다. 즉각적인 쾌락만을 추구한다. 책을 읽는다든지 친구와 건전한대화를 나누면서 인격을 함양하기에는 끈기가 부족하다. 무엇에도만족하지 못하고 고립무원에 자신을 파묻는다.말초적인 신경을 자극할 수 있는 골방들은 돈을 벌게 돼있다. 골방도 유행을 타기 마련이다. 4,5년전부터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한비디오방은 전국에 수천곳이 넘는다. 그만큼 수요가 뒤따른다.10년전부터 서울 안암동 대학가에서 비디오대여점을 운영해오던K씨는 비디오방에 고객을 다 빼앗겨 전업을 고려중이라고 말했다.그만큼 비디오방이 도심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특히 웃돈을 얹어주면 음란 영화를 보여주는 비디오방은 젊은이들 사이에 은밀히 회자되며 성업중이다. 나홀로 찾는 방은 부담이 없어 좋다는게 젊은이들 생각이다. 연인과 영화관을 찾으려면 어떤 프로그램을 볼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근처의 골방을 찾는데는 아무런 고민이 따르지 않는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즐기고 만족하면 그만이다. 물론 아베크족들이 은밀한 데이트장소로 비디오방을 이용하는 사례도많다. 요즘에는 노래방을 혼자 찾는 샐러리맨들도 적지 않다. 남눈치볼 필요없이 뽑고 싶은 노래 원없이 불러제칠수 있어서 좋다.일시적으로나마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했다는 만족을 얻을 수 있다.노래방에서 무료함을 느끼면 비디오방을 찾고 이곳에서도 만족할수 없으면 전화방을 찾는 식으로 외로운 도시인들의 「방」사냥이시작되고 있다. 스트레스를 풀 목적으로 찾은 도심의 골방이 탈선의 도화선이 될수도 있다.도심의 골방은 어쩌면 이처럼 무궁무진한 잠재수요가 있기 때문에속속 생기는지도 모른다. 섹스산업의 주시장도 이들의 욕구를 해소시키는 방향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주위에 마땅한 놀이공간이없는 우리 현실에서 이들 골방은 도시인들의 유일한 대피처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신촌이나 영등포등 유흥가에는 지하 노래방1층 술집 2층 비디오방 3층 전화방을 골고루 갖춘 빌딩들을 쉽게찾을 수 있을 정도이다. 주위에 이런 방들이 많아야 가게도 잘된다는게 근처 상인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변태영업을 하는 터키탕 안마시술소 및 사창가 등은 이제는 구태의연한 도심의 유물로 사라질지 모른다.물론 방중에는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전문방도 없지 않다. 대표적인게 「컴퓨터 공부방」. 4,5대 정도의 컴퓨터와 각종 소프트웨어를 구비해 놓고 학생들이 자신들의 능력에 맞춰 공부를 할수있게 하는 신종 독서실이다. CD녹음방도 원하는 이들에게 CD녹음을전문으로 해주는 곳이다. 음주가무를 즐기는 한국인의 취향을 반영한 신종 사업인 셈이다. 그러나 컴퓨터 공부방이나 CD녹음방은 숫자도 많지 않고 이용객도 제한적이다.섹스산업의 새로운 비즈니스로 확산되고 있는 각종 「방」에 대한일반인들의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사회를 문란하게 하고 젊은이들의 정서를 해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등포에서 전화방을 운영하고 있는 C모씨는 거리를 방황하는 도시민에게 짧지만 안락한 순간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고 강조한다. 획일적인 단속보다 퇴폐여부를 가려 옥석을 구분해야 섹스산업이 건전한 방향으로 육성되지 않겠느냐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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