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욕심'이 화 불렀다

지난 1월 전국을 강타한 한보사태는 각 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 사회적으로도 파장이컸다. 이 가운데서도 경제 분야에는 일파만파의 파문을 몰고 왔다.오너의 독단적인 경영시스템이 얼마나 위험한지 똑똑하게 보여주었고 정경유착의 불합리성이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다. 정부의 산업정책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특히 금융권의 자금흐름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며 차입경영에 의존해온 기업들에 일대 경종을 울렸다. 남의 돈으로 장사하는 것이 신기루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한보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기업들은 은행권에서 돈빌리기경쟁을 벌이곤 했다.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돈이 돈을 번다며 남의돈으로 문어발식 기업확장에 나서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국내 기업들의 부채비율이 대만 기업의 5배에 이르는 등 지나치게 높다는사실이 이를 입증한다.하지만 한보사태는 이런 관행이 이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역시 부도로 쓰러진 삼미가 주는 교훈도 마찬가지다.지나친 투자로 금융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더 이상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쓰러지기 직전 부도방지협약의 대상으로 선정돼 자금지원을 받고 있는 진로나 대농도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정부가 M&A제도 완비해야 지적도올해 들어 부도가 났거나 곤욕을 치르고 있는 기업들에 대해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불황 외에 사업구조조정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사업구조조정을 외면한 것이 몰락의 길로 접어든 또 다른 원인이라는 얘기다. 이를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두산그룹과 진로그룹은 업종면에서 겹치는 부분이 많다. 두 그룹 모두 식음료 업종을 간판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피할 수 없는 라이벌이란 느낌마저 준다.특히 최근 2~3년 사이 두산이 진로의 아성인 소주에, 진로가 두산의 홈그라운드인 맥주분야에 집중 투자하면서 이런 구도는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요즘 두 그룹의 신세는 하늘과 땅 차이를 실감케한다. 두산은 지난 2년여간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하며 군살빼기를단행, 고비를 비교적 무난하게 넘고 있다.반면 진로는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 있다. 그동안 사업확장에만 열을 올린 탓에 불황이 절정에 달하면서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그룹 임직원들 사이에 한보가 부도나기 전 구조조정작업에 착수했더라면 최악의 상황은 면할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흘러나오는 실정이다.건설업을 전문으로 해온 한보의 경우도 90년대 중반 이후의 철강경기를 낙관적으로 판단하고 무리한 사업을 벌이다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특히 한보는 지나치게 외형만 중시, 장기적인 전망을 무시한채 백화점식으로 사업을 벌이다가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LG경제연구소의 정진하 이사는 『한보부도는 경제 전체의 불황과구조조정 실패가 합쳐져 일어난 상징적인 사건으로 국내산업구조조정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며 『진로나 대농이 몰락한 것도 같은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사업구조조정과 관련해 전문가들은 기업들에 크게 두가지를 주문한다. 먼저 해외생산기지를 효과적으로 개발해 활용하면 장기적으로볼 때 아주 유리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각 업종에 따라 사정은 약간씩 다르지만 자동차, 전자 등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국경을 초월해 경쟁을 벌이는 분야는 반드시 해외생산비율을 높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현재 국내기업의 해외생산비율은 전체적으로 일본의 약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일본기업들이 엔고와 버블경제 극복 차원에서 90년을 전후해 세계각지로 눈을 돌려 해외생산비율을 크게 높였지만 국내 기업들은 이제 막 시동을 건 상태다. 특히 설비과잉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기업들의 경우 이를 뜯어 인건비가 싸고 기업활동을 하기에 여건이좋은 나라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또 기업 차원에서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업분야를 가급적 빨리정리하고 대신 M&A(기업인수합병)를 통해 경쟁력있는 기업을 자기식구로 만드는 것도 구조조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M&A야말로 부도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기업의 체질을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훌륭한 도구라는 얘기다.물론 이를 잘못 활용하면 화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좋은 측면도많은 까닭에 기업구조조정을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한번쯤 고려해볼만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의견이다. 실제로 선진 외국의 경우 활발한 M&A를 통해 구조조정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진입규제 너무 많다하지만 구조조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데는 걸림돌도 많다는 지적이다. 특히 일부 기업들은 당장이라도 사업군의 틀을 대폭 바꾸고 싶지만 여건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망설이고 있다는 후문이다.먼저 진입규제가 너무 많다는 의견이 적잖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데 이런저런 규제조치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막상 시작도 하기전에 제풀에 지쳐 포기하는 일이 있다는 것. 외국에서 선진기술을도입하는 문제의 경우 기술도입 승인 과정에서 브레이크를 거는 사례가 자주 발생, 새로운 일을 벌이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이 기업인들의 하소연이다.또 노동시장이 지나치게 굳어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시장 자체가 유연성이 없어 변신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예를 들어 기업들이 계열사를 매각하거나 새로 살 때 가장 힘든 부분의 하나가 기존의 근로자를 정리하는 문제다. 어떤 식으로든 인력부분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노동시장이경직돼 있어 방법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노동력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도록 노동시장에 유연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마지막으로 M&A시장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국내의 경우 M&A분야가 아직 초보단계라 사업체를 팔거나 사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것이 공통된 설명이다. 특히 사업체의 가격을 결정하는 기준이 너무 모호해 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나서서 M&A 관련 제도를 완비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구조조정은 이제 기업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늦으면 도태된다는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10대그룹을 포함, 재벌들의 판도에도 변화가 생길 조짐을 보이고 있다.한국개발연구원 박준경 박사는 『구조조정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조만간 10대그룹 가운데 3~4개쯤은 자리바꿈을 할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하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발빠르게 변신하는 기업은 한단계 발전하겠지만 우물쭈물하다 기회를 놓치는 기업은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이라는 의견이다. 박박사는 더 나아가『10위권 그룹 가운데도 구조조정에 실패하는 그룹은 30위권 밖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정부의 눈치를 볼 필요가없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 원장은 『이제부터는기업이 외부요인에 구애받지 말고 자율적으로 경영환경변화에 맞춰구조조정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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