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식' 깨달았을 땐 이미 늦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요즘 대기업의 분위기를 이 말처럼 잘 전달해주는 것은 없다. 빚이라도 좋으니 늘려놓고 보자던 대기업들은지난해 중반이후 체중감량에 정신이 없다.대부분 기업들이 계열사를 통합한다느니, 매각한다느니 야단법석이고 금싸라기처럼 여겼던 부동산도 팔겠다고 나서고 있다. 일부 그룹은 장사가 안되는 한계사업은 과감히 철수한다는 방침을 정하고옥석기업가리기에 분주하다. 대기업들 사이에서 사업구조조정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것이다.이 대열에는 올해들어 겁없이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던 중견기업들도 가세한 상태다. 과거 기업경영풍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기현상이다. 지금까지 우리 기업들은 몸집부풀리기에 혈안이 됐다. 시너지효과라는 그럴싸한 논리를 내세워 사업성 유무를 따지지 않고마구잡이로 기업들을 사들이며 새로운 업종에 진출했다. 본업과 관련이 없는 건설, 부동산, 유통, 레저업이 주된 진출업종이었다. 대기업들은 우선 몸집을 불려놓고 보자는 생각에 은행돈,사채 가리지않고 끌어다 썼다. 막대한 금융비용은 나중문제였다.◆ 부동산이 애물단지 변모이런 대기업의 경영방식은 우리 경제가 고도성장을 구가할때는 어느정도 먹혀들어갔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지난해이후 우리경제는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고 이 그림자는 언제 걷힐지 기약이 없는 상태다. 단순히 경기순환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황이 아닌 우리 경제의 취약성이 한데 어울어진 복합불황이기 때문이다.이로인해 언젠가는 큰 재산이 될 것으로 믿었던 부동산은 이제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애물단지가 됐고 사업다각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늘려놓았던 계열사는 적자늪에서 허우적거렸다. 왕성한 「식욕」이 배탈을 일으킨 것은 당연.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으로믿었던 부동산과 새로 벌여놓은 사업및 계열사는 「역부메랑효과」를 내며 본업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대기업들은대대적인 사업구조조정작업을 펼치고 있다. 어찌보면 사업구조조정은 무모한 사업다각화에 대한 뒤늦은 반성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반성문은 현재 몸집덜기를 통한 체질강화, 한계사업철수를 통한 21세기 유망업종진출이라는 두가지 방향에서 진행되고 있다.대기업중에서 몸집덜기를 통한 체질개선에 나섰던 대기업은 진로그룹. 진로그룹은 지난 94년 창립 70주년을 맞아 물, 환경, 유통등4개부문으로 사업구조를 단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진로의 이같은 선언은 어찌보면 자승자박의 결과였다. 진로소주가 애주가들 사이에서 히트를 치며 사세를 키워오던 진로는 「술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맥주시장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미국 쿠어스맥주와 합작으로 맥주시장에 신규 진출한 진로는 막대한 시설투자를 단행했고 기존시장을 파고들기 위한 판촉전 또한 치열하게 전개했다. 쏟아부은 돈만도 3천억원 가량이 된다. 진로는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건설, 유통업에도 손길을 뻗쳤다. 법정관리상태에 있던 세림개발을 인수, 경영정상화를 위해 2천여억원을 투자했으나 부동산경기가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오히려 그룹경영을 압박했다.부랴부랴 2차로 계열사를 통폐합하고 부동산을 매각키로 하는등 사업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했으나 그룹의 운명은 이미 루비콘강을 건넌 뒤다. 진로는 부도방지협약으로 인해 간신히 공중분해는 면하고있을 뿐이다. 사업구조조정을 통해 본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진로측의 설명이나 이것이 성공할지는 아직 미지수다.면방 및 유통업종의 대표주자인 대농그룹 역시 무리한 사업다각화가 화근이 돼 사업구조조정에 나선 케이스. 대농그룹은 면방업종이침체기미를 보이자 유통,정보통신사업으로 다각화를 모색했다. 이같은 대농의 프로젝트는 성공하지 못했고 급기야는 본업인 미도파백화점의 경영권마저 흔들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신규로 진출했거나 주력이 아닌 계열사의 매각을 통해 사업구조조정에 나서게됐다.진로와 대농은 몸집덜기에 실패한 경우지만 두산그룹은 비교적 성공한 사례에 속한다. 지난 95년부터 구조조정에 나선 두산그룹은지난해부터 경쟁사인 조선맥주에 의해 맥주시장이 급속도로 침식당하면서 구조조정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증시에서는 부도설이 끊이지 않았다. 과감하게 사업정리에 나선 두산그룹은 두산종합식품등5개 계열사를 다른 계열사에 통합하고 한국 네슬레등 비주력업종에투자한 지분 매각을 단행했다. 이 결과 재계 순위는 떨어졌지만 지분매각을 통한 돈은 전액 주력업종에 재투자돼 현재 위기국면은 벗어난 상태다. 두산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 수익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사업은 과감히 손을 뗄 방침이다.재계순위 5위권이내 그룹들 또한 사업구조조정에 열심이다. 그러나사업구조조정의 방향은 다르다. 진로,두산그룹 등이 막다른 골목에몰려 살아남기 위한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벌이고 있다면 5대그룹들의 구조조정은 이런 차원을 벗어난다. 한계사업은 이들 그룹과 같이 철수는 하지만 여기에 쌓인 여력은 21세기 유망업종에 다시 진출하는 방식으로 사업구조를 단행하거나 모색하고 있다.5대그룹중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곳은 LG그룹. LG그룹은구본무회장이 취임한후 선택과 집중을 골간으로한 사업구조조정작업을 본격화하고 있다. 현재 그룹회장실을 중심으로 한계사업에 대한 옥석구분작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으며 이를 통한 여력을 정보통신, 차세대반도체개발에 집중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무리한 사업다각화 원인제공현대,삼성,대우그룹도 계열사통폐합작업을 통한 사업구조조정작업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그룹의 사업구조조정은 LG그룹과비교해볼 때 추진력이 뒤떨어진다. 몇해전에 계열사를 통폐합한다고 발표해놓고서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하나도 없는 상태다. 삼성그룹의 경우 그룹 주력업종과 관련이 없는 계열사를 오히려 늘렸을뿐더러 현대그룹은 사업구조조정보다는 경비절감에 경영력을 집중하고 있다. 현대는 일관제철사업진출등 신규사업진출과 기존사업의확대에 오히려 관심이 많다.최근 들어서는 내수포화로 불황의 골이 깊은 자동차회사들도 구조조정작업에 뛰어들었다. 극심한 자금난으로 삼성자동차와 한때 인수 협상을 진행했던 쌍용자동차는 대대적인 계열사 통폐합작업과함께 인원감축을 시도하고 있다. 대우의 공세경영으로 2위자리에서밀려날 위기에 봉착한 기아자동차 역시 비주력계열사 매각 등 불황타개책 마련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재계관계자들은 『현재 대기업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업구조조정은 자승자박일 뿐』이라며 사업구조조정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 성장산업위주로 진행되어서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사업구조조정은 판을 다시 짜는 제2의 창업으로 진행돼야 한다는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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