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개방, 경쟁·구조조정 촉발

지난 80년대 후반 서울을 비롯한 전국각지의 길가 좌판에 진열된앨범들이 초저가로 팔렸던 때가 있다. 문구점에서나 팔리던 앨범이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85년 미국이 한국산 앨범에 대한 반덤핑관세를 부과하면서 미국수출이란 판매루트가 막힌 앨범들이었다. 바로 통상마찰로 시작된 본격적인 한국의 시장개방을 알리는전주곡이었다.앨범사건후 미국은 한국에 대해 공산품과 농산물에 대한 시장개방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미국 통상법 301조, 슈퍼 301조, 우선협상국지정 등 다양한 수단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기도 했다. 그만큼 시장개방요구가 집요했으며 보호무역주의의 경향은 더욱 기승을부렸다. 물론 여기에는 86년부터 급증한 한국의 무역흑자도 기름역할을 했다.한국경제는 85년 선진국간 플라자합의로 나타난 달러화의 평가절하, 국제금리 하락, 국제원유가격 하락 등 3저현상에 힘입어86∼88년의 3년간 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구가했다. 과잉설비와 낮은 가동률이 고민거리던 중화학공업이 새로운 수출주력산업으로 떠올랐으며 섬유 등 산업구조조정과 합리화의 대상이었던 경공업부문의 수출도 크게 증가했다. 덕분에 3년간 연평균 12.1%의 고도성장을 기록했으며 86∼89년 4년간 2백19억달러의 종합수지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국내산업의 경쟁력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외부요인에 영향받은 것이었으며 흑자수지가 곧바로 개방압력의 빌미를 제공했다.◆ 흑자수지, 개방압력 빌미 제공80년대 중반 미국이 주도한 한국의 시장개방은 90년대 들어서면서전세계적인 경제침체와 냉전종식에 따른 신보호무역주의 등장으로더욱 빨라져 자본시장개방(92년), 외국인 직접투자인허가제의 전면신고제로의 전환·우루과이라운드 타결·공산품평균관세율의 선진국수준 인하 (93년), 세계무역기구의 설립(95년), 유통시장 전면개방·OECD가입(96년) 등을 겪으면서 완전개방경제에 들어섰다.개방은 경쟁을 뜻한다. 경쟁에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적용된다. 시장개방으로 물밀듯이 밀어닥친 외국제품이나 서비스에 비해 경쟁력이 없으면 도태되는 것이 시장의 논리다. 80년대 후반에 불어닥친외국의 거친 개방압력과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능력이나 준비가 없이 빗장을 푼 덕에 국내산업은 기반부터 흔들릴지 모른다는 우려마저 나오기도 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릴정도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괄목할만큼 성장했지만 뿌리는 부실한 한국경제의 빈곤한토양 때문이었다.한국경제의 기적과 같은 성장에는 60년대의 수출산업지원, 70년대의 중화학공업육성, 80년대의 기능별지원방식의 산업지원제도 등그때그때마다 정부가 이끈 경제정책이 큰 몫을 했다.이러한 정부의 정책지원이라는 닦여진 터전 위에 벽돌 올리듯 쌓기만 한 것이었다. 스치토프스키(Scito-vsky)교수의 말처럼 「(정부에 의해)강요된 성장(forced groth)」이었다. 덕분에 50년대말 1인당 국민소득 1백달러미만에서 95년말에는 1만달러시대에 접어들었으며 경제규모면에서 세계 11위, 교역규모면에서 세계 12위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뿌리가 튼튼하지 못한 것이었다.비바람이 몰아치는 경쟁환경이 아닌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란 온실속에서 자란 탓이다. 그만큼 자생력이 부족했다는 얘기다. 그런만큼 경제개방은 풍부한 자본과 선진경영기법으로 무장한 외국기업과의 힘겨운 승부를 벌여야만 하는 「정글」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시장에서의 경쟁은 체질의 변화 즉 경쟁력확보를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우위의 경쟁력확보는 곧 산업구조조정의 원동력이자 목표이기도 하다. 결국 구조조정을 통한 경쟁력확보가 개방경제에 발을맞춰야 국가경제가 견실할 수 있다. 그러나 빗장을 풀면서도 경쟁력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구조조정에 있어서 정부와 기업의 노력은미미했다.중앙대학의 차철호교수는 『80년대 초반부터 추진하던 정부의 산업구조조정정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가운데 개방경제로 편입됐다』며 『80년대 후반의 국제수지흑자를 여유재원으로 하는 전반적인산업구조조정이 실패하고 오히려 90년대초 세계경제의 불황과 각국의 신보호무역주의 기류속에 개방압력에 이끌려 문을 열었다』고지적하기도 했다.◆ 정부부터 바뀌어야 규제개혁 성공유통시장개방만 해도 그렇다. 당초 유통시장개방을 앞두고 『국내유통업계의 아킬레스건인 규모의 영세성에 대한 탈피와 물류구조의혁신, 대형할인점 등 신업태의 등장에 대한 대비 등이 필요하다』는 학계와 업계의 목소리가 높았다. 우려대로 본격적인 유통개방이이뤄지자 까르푸 마크로 등 외국계 대형할인점이 올해만도 2조원대로 추산되는 국내할인점시장을 급속히 장악해 들어갔다. 국내할인점들이 자금난으로 주춤하는데 비해 이들은 점포확장과 자본금증액등 한국시장공략을 위한 공격경영의 고비를 늦추지 않고 있다.특히 규모면에서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전국 1천5백여개재래시장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10년이상된 노후재래시장에 대해 정부에서 유통구조개선자금을 조성해 재개발지원에 나섰지만 담보요구와 분양상가에 대한 융자지원이 없는데다 그나마 조성기금도 부족하고 신청서류만도 15가지가 넘는 등 문제점이 많이 남아있다.경제개방과 그에 따른 경쟁은 구조조정을 촉발시키기도 한다. 지난해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은 시장개방으로 인한 수입과 외국인의 국내투자확대는 경공업과 서비스업의 경쟁력을 잃게 만들어 이 부문의구조조정이 가속화될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실제로 70∼80년대대표적인 수출산업이었던 섬유·신발·건설업체들이 정보통신 유통등 고부가사업으로의 진출이나 한계사업정리 등 구조조정을 모색한예를 흔히 볼수 있다.한국경제가 개방경제로 편입하면서 구조조정을 등한시한데 반해 구조조정으로 경제활력을 되찾은 미국의 사례는 우리경제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지난 3월에 열린 경제장관합동기자회견에서 강경식재정경제원장관 겸 경제부총리가 『쇠퇴징후까지 보이던 미국경제가 끈질긴 구조조정 노력 끝에 다시 번영하고 있다』며 한국경제에서도 구조조정을 성공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였을 정도다. 매년2~3%대의 안정성장과 3%이내의 물가상승률, 77%를 웃도는 노동참가율, 완전고용상태에 근접한 5.6%의 실업률 등이 미국경제에 있어구조조정의 성공을 보여주는 숫자들이다.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라는「쌍둥이적자」에 허덕이던 미국경제가 90년대 들어 완전히 벌떡일어선 것이다. 미국경제회생의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구조조정의핵심어는 비효율적인 정부규제의 완화 즉 진입장벽의 철폐였다. 반면 우리는 지난 4월말 현재 정부부처별로는 1백33건, 업종별로는3백25개 업종의 63%에 해당하는 2백5개 업종에서 아직도 구조조정을 가로막는 진입규제가 존재하고 있다.그러나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을 제한하는 규제가 얼마나 비효율적인가는 이미 지난 86년 공업발전법으로 시행된 산업합리화정책의 실패로 증명이 되고 있다. 당시 경쟁력상실분야와 경쟁력보완분야로구분해 신규진입 및 경쟁제한을 내용으로 하는 구조조정을 추진했다.부산대 경제학과 신태곤교수는 한국국민경제학회의 경제학논문집에서 『기업의 자구노력소흘, 신규진입 및 경쟁제한에 따른 효율성의저하, 산업지원에 따른 통상마찰 등의 부작용을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지난달 「기업의 구조조정과 업종전환전략」이란 토론회에서 이규억 산업연구원장은 『소위 정책사항과 규제사항을 구분해전자는 규제개혁의 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일부 부처의 권한집착을불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규제개혁을 위해서는 정부부터가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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