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2,3세에 전문직 참여 '봇물'

정부 경제부처에 근무하고 있는 유아무개 서기관은 얼마전 자신이참여해온 한 재계모임에 작별인사를 했다. 재계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모임에 정부 관료가 나간다는 점에 대해 주변의 시선이달갑지 않다는 점을 의식해 스스로 발을 뺐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이후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파문이 불거진데다 설상가상으로 올해들어 한보파문이 겹치면서 아쉽지만 결단을 내렸다. 물론 회원들이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며 극구 만류했지만 자칫 유착시비에휘말릴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 뿌리쳤다.재계모임은 보통 기업을 하는 사람들이 주축을 이룬다. 모임의 특성상 기업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예외없는 법칙이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계모임에 반드시 기업인들만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모임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그동안 공무원 학자 변호사 언론인 공인회계사 등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가입해서활동하고 있다. 특히 일부 모임의 경우는 아예 몇자리에 대해서는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 비재계 인사들이적극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다.그러나 최근 이러한 기류에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앞서 설명한 유아무개 서기관처럼 재계모임에 대한 공무원들의 기피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재벌2, 3세 모임의 하나로 알려진 P모임을 예로 들면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검찰수사로 정경유착의 사례가 속속 드러나면서 회원으로참여해온 4명의 공무원이 모두 모임을 떠났다. 대부분 30대후반~40대 초반이었던 이들 공무원들은 참여사실 자체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주변의 시선이 따가워지자 어쩔 수 없이 하나둘 탈퇴했다.공무원이 재계모임을 떠나는 대신 그 자리를 교수나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메우고 있다. 특히 경제학이나 경영학을 전공한교수들이 재계모임에 참여하는 비율이 점점 느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학자들이 가장 활발하게 참여하는 푸른회의 경우 전체 회원50여명 가운데 유진수 숙명여대 교수, 김기홍 한양대 교수 등 5명이 대학강단에 서는 학자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의 10% 가량이 학자인 셈이다. 이 모임에는 또 변호사와 공인회계사, 언론인도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94년부터 참여해온 유진수 숙명여대 교수는모임에 재계인사들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은문제가 있다며 비슷한 또래의 젊은 사람들끼리 만나 정보도 교류하고 새로운 지식도 얻고 있어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특히 그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을 초청해 한달에 한번씩 강연을 듣고 토론을 벌이다보니 여러모로 얻는 것이 많다고 말했다.최근 전개되고 있는 재계모임의 새로운 흐름 가운데 또 하나 눈에띄는 대목은 재벌 2, 3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모임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각 그룹의 전면에 젊은 총수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이들이 기존모임을 활성화하거나 별도의 모임을 만드는 사례가증가하고 있다. 이들 젊은 경영자들의 모임은 대부분 새로운 만남을 통해서 부족한 경험을 메꾸고 정보를 공유하자는 공통된 인식을바탕에 깔고 닻을 올리는 분위기다.올해 들어 새로 명함을 내민 모임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크림슨포럼이다. 이 모임은 고려대 출신 재벌 2, 3세들을 중심으로지난 봄 결성돼 활동을 시작했다. 김석준 쌍용그룹 회장, 정몽원한라그룹 회장 등 30대그룹 회장급만 4~5명이 참여하고 있는데다정몽규 현대자동차 회장, 이재현 제일제당 부사장 등 굵직굵직한인물들이 많이 가입해 있어 무시못할 조직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이밖에 EPO(대표이사는 아니지만 실질적인 오너인 재벌 2,3세 모임)나 YLO(젊은리더 모임) 등도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새로운 재계모임이다. 이들 두 모임은 사회적인 분위기를 고려해 아주 은밀히 회원을 모아오다가 최근 들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 것으로알려지고 있다.◆ ‘안팎’ 새단장… 정보 얻으려는 의식 팽배모임의 수적인 변화 뿐만 아니라 모이는 형식에도 다양한 모습이연출되고 있다. 과거 같으면 회사일을 마친 후 저녁시간을 이용해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2~3년 사이 아침시간을이용해 모임을 갖는 경우가 크게 느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특히 경영자총연합회, 한국생산성본부 등 경제 관련 단체에서 주최하는 모임은 거의 예외없이 조찬모임 형식으로 진행되는 실정이다.경영자총연합회의 한 관계자는 저녁시간을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널리 퍼지면서 한달에 한번 여는 경총경영세미나를 퇴근 이후에서 아침시간으로 바꿨다며 참석자들의 호응이 아주 높고 출석률도높아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제적인 조직인 YPO도최근 들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외부강사를 초빙해 강연을 듣는 교육세미나는 반드시 아침시간에 개최한다. 그래야만 참석률도 높고세미나 자체도 아주 효과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변하는 것은 모임의 겉모습 뿐만 아니다. 외부적으로 모임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 할수 있는 내용물도 바뀌고 있다. 사실 모임하면 흔히 끼리끼리 모여 친목을 다지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일반적으로 대외적인 활동을 중시하는 이전의 모임들은 그런 성격이 강했다. 일년에 한두차례씩 불우이웃이나 양로원의 노인들을 돕는 것도 이들의 빼놓을 수 없는 행사의 하나였다.상당히 인간적인 측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그러나 요즘 재계모임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물론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요즘에는 모임을 통해 뭔가 의미있는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특히 주변 환경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상황에서 모임을 통해 경영활동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을 얻으려는 의식이 팽배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각 모임들이 앞을 다투어 세미나를 개최하고 각계의전문가를 초청해 대화를 나누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주)풍농 부사장으로 푸른회를 이끌고 있는 이종철 회장은 『유능한 강사를 섭외하는 것이 회장의 가장 큰 역할일 정도로 세미나의비중이 크다』며 『주로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그때그때 초청대상자를 결정한다』고 말했다.각 업종 중심의 CEO(최고경영자) 모임이 최근 들어 봇물 터지듯 크게 활성화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맥락이다. 정보나 지식을 얻건 아니면 로비를 하건 회원 개개인이 처리하기가 어려운 일을 모임을 통해서 해결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압력단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마찬가지다.특히 전에는 유명무실했던 모임들도 다시 뭉쳐서 회원들 상호간의이익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여러 사람들에게 문호를개방하고 힘을 키우는데 골몰하고 있는 분위기다. 여기에서 모임의운영방식을 바꾸는 것은 기본이다. 지난해 만들어진 한 중소기업인모임에 나가고 있는 태윤실업 이정우 사장은 불황이라 그런지 알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아주 빡빡하다며 회원들도 바쁜 시간을 쪼개 나온 사람들인만큼 모임을 잘 이끌어 사업을 하는데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키워가자는 주문이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아울러 앞으로 모임이 사업상 자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떠날 생각이라고 밝혔다.재계모임의 근본적인 변화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한편으로 많은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집단이기주의를 더욱 심화시킬 여지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모임을 통해서 고급정보를나누어갖고 로비를 하는 등의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나보다는 우리를 더 소중히 여기는 모임이 정말로 필요한때가 됐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실에서 비롯된다. 공병호 자유기업센터 소장은 『모임의 효율을 올리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너무 인맥만들기에만 신경을 쓰다가는 자칫 스스로무덤을 파는 일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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