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사진 국내 최고"

이색기업인 조영승 삼성문화인쇄사장.세계 각국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미녀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일본항공 캘린더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한마디씩 던진다.『역시 일본달력은 달라. 색감도 좋고 인쇄상태도 너무 깨끗해.』일본항공캘린더의 상당수가 한국의 삼성문화인쇄에서 제작되는지를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같다.서울 성수동에 자리잡은 삼성문화인쇄는 대통령사진을 비롯, 일본항공캘린더 등 고급인쇄물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업체이다. 고급품을 만들다보니 특히 일본업체들의 주문이 끊이질 않는다. 일본항공에는 18년째 납품을 하고 있고 마루베니 닛쇼이와이 등 종합상사들과도 20년 이상 거래를 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일본업체에 이렇게 오랫동안 인쇄물을 수출하면서도 단한번도 품질이나납기문제 등으로 클레임을 제기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사람이 없어 주문을 다 받지 못할 정도이다.◆ 학비 벌기 위해 등사 시작개성출신의 조영승 사장이 인쇄업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대학재학중생계를 위해 등사일을 한게 계기가 됐다. 또 그의 생활이 어려워진것은 6·25가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지금도 악몽의 전쟁터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뭐, 난리가 났다구.』 조씨는친구들의 웅성거림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멀리서 대포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개성 송도중학교 3학년시절 6·25를 맞은것이다. 집까지 한걸음에 달려가 누나를 찾았다. 부모님을 일찍 여읜 조씨로서는 누나가 곧 어머니였다. 형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누나와 함께 보따리를 둘러매고 정처없이 남쪽으로 발길을 향했다.거리는 피란민의 물결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전주를 거쳐 부산으로내려갔던 조사장은 종전후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시장 근처에서 만년필장사 등을 하며 끼니를 이었다. 그러던중 인쇄업을 하는 형님친구를 만나 무교동의 인쇄소에서 등사일을 도왔다. 지금도 중년층이면 추억이 남아있는 등사였다. 얇은 반투명지를 「가리방」이라고 부르던 줄판위에 대고 철필로 긁은 뒤 등사기에 부착해 롤러로미는 일이었다.공부를 열심히 했던 그는 고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전차비를 아끼려고 자취하던 무교동에서 고대까지 걸어다녔다. 옷은 군복을 검게 물들인 것이 전부였고 신발은 군인들이 신다버린 군화였다.그는 학비도 벌고 생활을 하려면 친구들과 동업을 해서 본격적인등사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울 상대생 2명과 공동투자,사업을 시작했다. 투자한 돈은 모두 합쳐 2만원으로 등사용지를살 정도의 금액이었다. 등사기는 고물을 주워 직접 만들었다. 사업체라고 할수도 없는 허름한 장소에서 함석조각으로 간판을 내걸고학생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이때가 56년. 회사 이름은 「미경사」였다. 1년뒤 회사명을 삼성문화인쇄로 바꿨다. 일감은 주로 인근고등학교로부터 받았다. 숭문고 한성고 중앙여고 등으로부터 출금전표 편지봉투 등 사무용품의 겉면에 서식을 등사하는게 주된 일과였다.일감이 한창 밀릴 땐 「스리나」라는 잠이 안오는 약을 먹고 일주일 동안 밤샘작업을 할 때도 종종 있었다. 이같은 무리한 작업으로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몸져 누운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학교를상대로한 사업에서 자신감을 얻은 조사장은 기업체로 영역을 넓혔다. 반도호텔에 있던 삼성물산 등 기업체들이 주거래처가 됐다. 이들로부터는 명함 문구 편지봉투 등의 주문을 받아 인쇄했다.꽤 짭짤하게 돈을 벌자 다동에 20평짜리 집을 한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어엿하게 기계를 갖춰놓고 사업을 하기로 하고 독일에서 인쇄기계를 들여왔다.그는 이때 나름대로 터득한 경영관이 있었다. 잘될 때 사업내용을바꾼다는 것이다. 업종은 물론 인쇄라는 동일분야지만 내용은 조금씩 바꿔 나갔다. 프린트가 잘될 때 이를 포기하고 명함인쇄에 뛰어들고 명함이 잘될 땐 명함을 포기하고 사무용품인쇄를 시작한 것이다. 사업이 잘되면 경쟁자들이 뛰어들어 과당경쟁이 벌어지기 쉽다고 판단, 한발 앞서 나가기 위한 것이다.이 전략은 적중했다. 충무로에도 사업장을 마련하면서 「인쇄의 꽃」이라는 오프셋분야에 진출했다. 가장 좋은 설비를 도입해 최고품질의 제품으로 소비자로부터 인정을 받겠다는게 그의 철학이었다.이 철학은 다시 말해 돈이나 집어주면서 대충대충 오더를 따내 납품한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하지만 이같은 경영철학 때문에 종종 어려움을 겪었다. 인쇄는 대표적인 수주산업. 따라서 주문을 받는게 경영의 첫번째 과제이며술을 마시고 교제를 하며 뒷돈을 집어주는게 당연했다. 대쪽같은성격의 그는 이같은 일을 할수가 없었다. 자연히 주문을 따내기 어려워졌다. 선배들은 그런 식으로 하면 절대 사업을 못한다며 다시생각할 것을 권유했다. 그럼에도 굽히지 않았다. 품질과 신용으로사업을 밀고 나가면 언젠가는 인정을 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믿었다.70년대 중반 어느날 자정무렵 막 잠이 든 조사장은 갑자기 따르릉소리에 잠을 깼다. 긴급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문공부 간부였다. 도대체 삼성문화인쇄가 어떤 회사냐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어안이 벙벙하던 조사장에게 그는 내일 당장 회사를 방문하겠으니위치를 알려 달라며 전화를 끊었다.다음날 오후 2시 약속시간이 되자 문공부와 청와대 및 상공부 간부들이 대거 몰려왔다. 회사시설을 샅샅이 살펴보고는 『앞으로 대통령 사진을 여기서 인쇄할테니 최고의 품질로 차질없이 작업을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사라졌다. 조사장은 대규모 인쇄업체도 즐비한데 자기처럼 조그만 회사에서 어떻게 대통령사진을 인쇄하겠느냐며어리둥절했지만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게 됐다.◆ 일본종합상사와 20년 이상 거래수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박정희대통령은 6개월에 한번씩 중앙청에서 수출업체 카탈로그 전시회를 열도록 했다. 그리고 몸소 전시회를 둘러봤다. 카탈로그는 수출품의 얼굴인만큼 카탈로그가 잘 나와야 상품의 가치도 올라간다는 취지에서 전시회를 열게 한 것이다. 전시회를 둘러본 박대통령은 대우와 코오롱의 카탈로그를 보고감탄을 했다. 우리나라 카탈로그도 이렇게 잘 나오냐며 어느 회사에서 만든 것이냐고 물었다. 이들 카탈로그는 바로 삼성문화인쇄에서 제작한 것이다. 마침 수행하던 공무원들은 대통령사진도 이곳에서 인쇄해야겠다며 삼성문화인쇄를 찾았다. 이때로부터 20년이 넘게 대통령 사진은 이곳에서 인쇄되고 있다. 비록 규모는 작아도 품질수준은 뛰어난만큼 나라 안팎에서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품질이 일본의 A급 제품보다 낫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이다.그는 번돈은 모조리 고급설비를 사는데 사용했다. 고급기계를 사되남보다 1달러라도 싸게 산다는게 그의 구매철학이다. 이제까지 일본을 1백20차례나 드나들며 인쇄기계업체와 인쇄업체를 안 다녀본업체가 없다. 도쿄시내 거리는 도쿄에서 태어난 일본인보다 더 잘알 정도이다. 일본인들이 어떻게 도쿄지리를 잘아는지 물으면 그는답한다. 『당신들이 차를 타고 다닌 거리를 나는 구석구석 걸어다녔으니 더 잘 알 수밖에 없지 않은가.』그는 일본이나 독일에서 기계를 도입할 때 다른 회사보다 35~40%쯤 싸게 산다고 귀띔한다. 국내에선 고급인쇄기계가 나오질 않아어차피 외국에서 사야 한다면 한푼이라도 깎는게 애국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또 외국업체들도 삼성문화인쇄의 명성을 듣고 있는만큼이 회사에 기계를 수출했다는 것 자체가 한국시장에서 자사 제품을알리는데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잘알고 있어 이 회사에만큼은 싸게판다는 것.40년이 넘게 인쇄업에 종사해온 그로서는 요즘 간절한 소망이 있다. 그것은 근로기준법을 하루빨리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노동법을 봐도 한국의 근로기준법만큼 사용자에게 불리한것은 없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가 퇴직금이라는 것이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하지 않으면 제갈공명도 사업을 해서 이익을 남기기가 힘들 것이라며 한국기업의 경쟁력은 근로기준법을 바꾸는데서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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