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사 회생 성공사례

두레에어메탈(회장 김을태) 5백여명의 임직원들에게 지난 9월18일은 뜻깊은 날이었다. 83년8월 법정관리에 들어간지 14년만에 「정상기업」으로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99년 10월로 예정된법정관리종결일보다 2년1개월이나 앞서 정상궤도에 진입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법정관리기업들이 제3자에게 인수되면서 정상화 과정을 밟는 것과는 달리 기술력을 바탕으로 매출이 급증하면서 정상화됐다는데 의의가 있다고 박찬갑 기획부장은 강조한다.◆ 노사 합심해 법정관리 조기종결구 삼선공업이었던 이 회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가기 전만해도 알루미늄 전문생산업체로서 순탄하게 성장해 왔다. 지난 45년 설립돼방산제품과 알루미늄 섀시를 생산하면서 내실을 다져왔다. 70년대건축경기붐을 타고 알루미늄섀시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사세를 키웠다. 그러나 알루미늄 섀시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고부가가치제품으로 업스트림을 추구한 것이 자금난을 가져왔다.자동차용 알루미늄휠과 항공기 부품인 알루미늄고력압출제품의 생산에 착수했다. 여기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면서 재무구조가 악화됐다. 특히 경쟁업체에 한발 앞서 투자한 반월공장의 알루미늄휠에대한 수요가 적어 자금회전이 어려워졌다. 부도당시 조흥은행과 한일은행 등 채권단에 1백64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이 회사가 본격적인 정상화의 길로 들어선 것은 지난 83년 현 두레그룹 김을태 회장이 법정관리인으로 취임하면서부터다. 성균관대약대 출신의 김회장은 구사주측으로부터 법정관리인으로 취임할 것을 부탁받으면서 회사경영에 참여했다. 김회장은 먼저 구로 창원반월 등 3곳의 공장을 특화시켰다. 즉 구로는 알루미늄섀시, 반월은 자동차용 알루미늄휠, 창원은 알루미늄 고력압출제품의 전문생산공장으로 변모시켰다. 이와 동시에 법정관리라는 불리한 여건속에서도 86년부터 KAIST(한국과학기술원)와 공동으로 첨단 항공기소재 개발에 착수했다. 동종업계 최고의 임금을 받던 노조원들도회사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정상화에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삼용기획팀과장은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을 때 법정관리회사 직원이라고 제출서류를 한번 더 검토하는 것을 보면서 말못할 서러움을느꼈다』며 이같은 경험이 있었기에 회사정상화에 노사가 합심할수 있었다고 들려준다.이같은 자구노력은 마침내 법정관리조기종결이라는 성과로 보답받았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국내자동차업계의 호황으로 알루미늄휠의 매출이 급증했다. 법정관리를 야기했던 애물단지가 회사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현대 대우 기아자동차 등의 1차벤더업체로서 선정됐다. 이 회사는 자동차업계의 수요에 부응키 위해 지난 9월말 전주에 연간 72만개의 알루미늄휠을 생산하는 공장을 완공했다. 4백억원을 투자한 전주공장은 오는 2000년 5월까지 연간 1백80만개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다.또한 KAIST와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록히드, 보잉, 맥도널드더글러스 등 미국의 세계적 항공사들에 알루미늄 소재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들 회사로부터 생산인증인 「QCL」을 획득했다.매출액도 급증했다. 지난해에는 7백7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1천50억원을 기대하고 있다. 2000년에는 2천억원도 가능하다고 낙관한다. 순이익도 지난해 5억원에서 올해는 25억원으로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이같은 경영호조로 1백64억원의 부채와 이자를 모두상환했다.이 회사는 지난 10월 상호를 삼선공업에서 두레에어메탈로 변경했다.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이미지를 지우고 항공기에 들어가는 첨단알루미늄소재 생산업체로 변신하겠다는 최고경영진의 의지가 담겨있다고 박부장은 강조한다.지난 86년 초 어느날.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10년간 이끌어온 회사가 부도가 나고 그 여파가 그를 옥죄고 있었다. 돈을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녔으나 모두가 허사였다. 거래해온은행도 등을 돌렸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다. 이미 몇몇 임원들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하나둘 회사를 떠나고 있었다.그러나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서울지방법원을찾아갔다. 회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이제 그것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두번에 걸쳐 경비원에게 강제로 들려나온 끝에 담당 판사를만나 법정관리를 얻어냈다. 주력 품목인 외국어 학습기 닥터위콤의가능성을 설명하고 반드시 살려낼 수 있다는 열정을 보여준 것이먹혀들었던 것이다. 당시 현장실사를 위해 공장을 찾았던 판사가오히려 당신 의욕만 믿겠다며 용기를 북돋워주고 돌아갈 정도였다.어학기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서부산업의 윤만희 회장(53). 그는업계에서 의지의 한국인으로 불린다. 부도난 기업을 일으켜 오뚝이처럼 다시 섰다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특히 그는 연간 매출액 30억원의 중소기업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조건이 무척 까다로운 법정관리를 얻어내는데 성공, 회사를 살렸다. 게다가 법정관리를 받으면서도 채권은행과 담당판사를 설득해 자신이 직접 법정관리인에 취임, 기업을 회생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을 크게 앞당겼다. 당초 서부산업은 오는 2002년까지 법정관리를 받게 돼 있었으나 각고의 노력끝에 지난해 5월 30일 예정보다 7년 일찍 굴레를 벗어던졌다.윤회장의 경영스타일은 아주 독특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근성이 대단하다. 한번 매달리면 끝장을 보고 만다. 물론 이런 스타일때문에 부도를 맞은 면도 있다. 시장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닥터위콤을 개발하느라 무려 17억원이라는, 중소기업으로서는회사의 운명을 가름할 수 있는 거액을 쏟아붓는 바람에 몰락을 자초했다. 중간에 개발 자체를 그만두거나 투자규모를 줄일 수도 있었으나 그대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윤회장의 이런 근성은 결국 그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부도 이후에도 계속해서 더 나은 재품을 만들기 위해 기술개발에 매달렸다. 연구실 책상에 앉아 밤을 샌 날도부지기수였다. 다행히 법정관리중이라 은행빚에 신경을 쓰지 않고기술개발에 몰두할 수 있었다.◆ 150억 매출에 10억 R&D 투자직원들도 별 불평없이 묵묵히 따라주었다. 일부 임원들이 부도를전후해 회사를 떠났지만 생산직 근로자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오히려 오너가 전 가족을 이끌고 공장에 들어와 숙식을 해결하며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회사인양성심성의껏 보살폈다. 회사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걱정은부차적인 문제였다.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드디어 햇살이 비치기시작했다. 마침 88올림픽을 계기로 어학교육 열풍이 불어닥쳤다.각급 학교에서도 어학교육을 크게 강화했다. 여기저기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특히 그동안 카세트를 이용해 어학을 공부하던 사람들사이에 닥터위콤을 이용하면 훨씬 더 편리하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심지어 해외교포들까지 국내에 들어왔다가 사갖고 나가곤 했다.94년부터는 국내시장을 넘어 해외로 진출했다.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한 외국 바이어들이 하나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첫해에만 2백만달러의 수출실적을 기록했다. 그것도 전부 닥터위콤이라는 상표를 붙여 내보냈다. 일부에서는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을 주장했으나 끝내 고유상표를 고집했다. 현재 중국의 3백여 학교, 미국의 2백여 학교, 사우디의 1백여 학교 등 세계 각지에서 메이드인코리아가 선명한 닥터위콤을 사용하고 있다.윤회장은 올해 기술투자에만 10억원을 쏟아부었다. 종업원 1백30여명에 연간 매출액이 1백50억원 가량 되는 회사 치고는 파격적인 액수임에 틀림없다. 일각에서는 또 일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이 있다. 주력인 어학기기 시장도 상당히 안정적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한길로만 달리면 성공할수 있다는 굳은 신념이 있다. 비록 중소기업이지만 자기만의 장기가 있으면 내로라하는 대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할 수 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앞설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한우물을 파는, 집념으로 똘똘 뭉친 한 중소기업인의 재기는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경영개선, 돌파 50, 관리혁신, HIT, 혁신」한진중공업이 법정관리를 벗어나기 위해 펼친 경영혁신프로그램 이름이다. 지난 87년 경영부실로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 회사는 한진그룹에 인수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경영 정상화를 위한 필사의 회생전략을 펼쳐왔다. 인수된 89년부터 법정관리가 해제된 96년까지8년 동안 무려 경영혁신프로그램의 명칭을 5번이나 크게 바꾼 것이이를 입증한다. 1~3년마다 경영혁신의 골격을 변경시킨 셈이다. 이처럼 경영혁신운동을 신속하고 일관되게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당시법정관리인으로 선임된 송영수 사장이 모그룹과 호흡을 맞춰가면서종업원들의 사기를 도모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송영수 법정관리인은 이질감을 느끼고 있는 종업원들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조중훈 회장과의 상면을 주선하는가하면 열차를 빌려 종업원가족들의 대전 엑스포 구경을 주선하는 성의를 보였던 것이다.한진중공업의 원래 회사명은 조선중공업. 지난 37년에 설립된 조선중공업은 우리나라 최초의 철강선박 건조, 공작기계 제작, 철도차량 제작업체였다. 그후 대한조선공사로 이름이 바뀌고 지난 68년에는 민영화를 거쳤다. 한때 단일기업으로 국내 30대 기업군에 속하기도 했으나 80년대 중반 해운 불황과 경영부실로 87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것이다.한진그룹은 법원과 채권은행의 결정에 의한 공개입찰을 통해 89년5월 대한조선공사를 인수, 한진중공업으로 사명을 바꾸고 경영정상화를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했다.경영진은 인수 첫해에 사원들의 복리후생 확대 및 교육훈련에 혁신운동의 초점을 맞췄다. 종업원들의 일체감 조성과 사기진작만이 회사를 살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내부적인 갈등이 어느 정도 안정됐다고 판단되자 이듬해인 90년에는 조직개편에 착수했다. 방만한 경영의 통합조정과 사업구조개편을 위해 부산수리조선과 한진조선 그리고 광명목재를 흡수 합병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본업과 직접 관련이 없는 건설부문은 한진종합건설로 이양하는 한편 항업부문을 한국공항으로 양도하였다. 또한 본사를 부산으로 이전하는 등회사 전반에 대한 조직운영의 효율을 향상시켜 나갔다. 인사와 원가관리를 전산화함으로써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고 조선소 합리화조치를 단행, 현장 생산성을 50% 상향시킨다는 목표를 세웠다. 「돌파 50」이란 혁신운동이름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돌파 50」 2차연도에는 회사의 경영체제를 본사 및 관리 중심에서 영도조선소울산조선소 다대포제작소 등 3개 공장의 생산제작 중심으로 전환,현장중심 운영체제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ISO9001인증 획득후 종합중공업체 틀 다져현장중심의 경영혁신운동은 관리부문에 일대개혁을 일으키면서 무파업과 LNG선 등의 대규모 선박 수주로 이어졌다. 이에 힘입어 인수후 처음으로 흑자를 실현할 수 있었다.조직의 기본뼈대가 갖춰지고 노사간의 화합이 이루어짐에 따라 93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업구조의 고도화와 고부가가치에 힘을 쏟기시작했다. 조선 차량 기계 등 사업부문별 연구개발체계의 정비에나섰다. 이 결과 전 사업에 걸쳐 ISO9001 인증을 획득할 수 있었다. 국제적인 생산공정의 규격화와 품질의 일관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셈이었다.한진중공업은 일단 국제적인 수준의 조직과 기술이 갖춰지면서 종합중공업체의 틀을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경부고속전철의 차량제작에 참여하는 동시에 중국으로부터 30량의 객차 수주를 계기로 해외진출을 개시하였다. 부실기업이 8년만에 세계적인 종합중공업체로발돋움하기에 이른 것이다.한진중공업은 지난해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법정관리를 청산, 법원이라는 보호막을 벗어나 홀로서기를 한다는 과감한 결정이었다.「고비용 저효율」의 구조 속에 수주가격이 하락하고 원가가 상승하자 법정관리 상태에서 안주하기 보다는 오히려 공격적인 경영전략을 선택했다. 대단한 위험이 따름에도 불구, 회사이미지의 개선으로 국내외의 신용도가 크게 좋아지고 법정관리기업에 적용되는수주제한탈피 등 영업활동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이점도 고려됐다.그러나 경영 정상화에 대한 자신감이 더 크게 작용했다.한마디로 고통의 시기였던 법정관리기간을 경영정상화를 뛰어넘는경영고도화를 위한 시기로 적극 활용했다. 수송물류기기 제조전문의 세계적 종합중공업체를 지향하는 한진중공업이 과거의 쓰라린경험을 되살려 또다시 제3의 신화를 어떻게 이루어갈지 주목된다.◆ ‘밀맥스’로 시장점유율 5위 차지신한제분의 지난해 매출액은 5백20억원. 94년부터 가동중인 아산공장의 가동률이 90% 가까이 되는 등 영업은 순조로운 편이다. 다만85억원에 달하는 금융비가 부담스럽다. 7백50억원의 부채중에서 단기차입금이 6백억원이 돼 단기간에 재무구조의 안정을 바라기 힘든실정이다.재무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20억원에 불과한 자본금을 늘려야하는데 이것도 쉽지 않다. 그룹최고경영진이 연 1∼2%의 성장률에그치고 있는 제분산업에 거액을 선뜻 투자하기가 쉽지 않아서이다.또한 원맥을 전량 수입해야 하고 원화가 계속 상승하는 상황도 재무구조 개선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법정관리에서도 살아남은 신한제분이지만 금융비용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이후 생존여부가 달려 있다는게 회사의 대체적인 분위기다.연도별 경영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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