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년 첫삽... 곳곳에 '건설 기념비'

한국의 「노가다」들이 해외에서 첫삽을 든 것은 지난 65년.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98km에 이르는 고속도로 공사를 5백만달러에 맡으면서다. 그후 전쟁을 치르던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와 태평양지역의 국가들에서 단순공사형태로 활발한 공사를 벌이며 건설한국의기반을 닦았다. 65년 이후부터 70년대 초반까지 당시 경제개발을위해 도입하던 외자규모의 5% 정도를 충당했을 정도로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해외건설의 비중은 상당했다.해외건설의 기반 조성기가 60년대 후반이었다면 70년대에서 80년대초반까지는 해외건설의 전성기로 한국경제가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하는데 한몫을 단단히 했다. 특히 삼환이 73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1백64km의 고속도로 공사를 따내면서 시작된 「중동특수」는 건설한국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이 기간동안 건설업체들은 연간 10억∼20억달러를 벌어들였을 정도로 중요한 외화 수입원의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다. 70년대 두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로 위기에 몰렸던한국경제에 있어 중요한 외화획득로이면서 동시에 연간 직접고용인원 15만명, 전체고용 유발 30만∼60만명에 이를 정도로 고용창출에도 크게 기여했다.그러나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급전직하했다. 81년 1백31억달러를 수주해세계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잘 나가던 국내건설업체들의 해외진출은 건설특수의 진원지였던 중동경제의 위축에 따른직간접적인 타격을 받고 침체기에 접어든다. 올림픽이 열린 88년에사상 최저수주액인 16억달러를 기록하는 수모도 겪었다. 90년대 초반까지 해외건설의 침체가 계속되면서 「건설한국」 「넘버원 코리아」의 이름이 무색해지자 업계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한편건설업체들은 나름대로 새로운 활로를 찾아 연구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등 꾸준한 변신을 도모했다.그 결과 해외건설업은 92년의 마이너스성장을 고비로 다시 기지개를 켜고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93년 들어서면서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건설업체들은 해외건설에 있어 과거와 같은 「넘치는 정력」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동남아 국가들의 경제발전에 따른 도시개발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따른 건설수요의 급증에다 건설업체들의 꾸준한 자기변신이 맞물려 상승효과를 내면서 해외건설은 활기를 되찾았다. 이후 해외건설부문에서의 수주실적은 급속히 증가했다. 지난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1백억달러를 넘어서며 세계 7위의건설대국으로 자리잡았다. 시장도 중동에서 동남아로 중심이 바뀌었으며 미주 아프리카 동유럽 등 새로운 시장으로 무대를 더욱 넓혀가고 있다.이같은 해외건설의 부침 속에서 한국건설업체들이 세워놓은 굵직굵직한 이정표들이 세계곳곳에서 건설한국을 알리는 「간판」으로 자리잡고 있다. 세계건설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단일공사로 사하라사막을 녹지대로 바꾼 리비아대수로공사, 73층으로 기네스북에 세계최고층 호텔로 기록된 싱가포르의 웨스틴 스탬포드호텔, 길이 8.4km로 아시아에서 가장 길며 세계에서 3번째로 긴 장대교량인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20세기 최대의 역사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쥬베일산업항, 높이 4백46m로 세계 최고높이의 쌍둥이빌딩인 말레이시아콸라룸푸르 시티센터(KLCC)빌딩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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