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관리와 리더십

『모든 책임은 회사를 잘못 운영한 제게 있습니다. 직원들은 아무잘못이 없습니다. 직원들이 거리를 헤매지 않게 도와주십시오.』지난해말에 도산, 세계 금융계에 충격을 안겨줬던 일본 야마이치증권의 노자와 사장이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을 쏟으면서 했던 말이다.노자와 사장은 실패한 경영자다. 자신이 사장으로 있는 동안 야마이치증권은 결국 망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리더십이 요구되는 위기 상황에 성공하지 못한 경영자를 떠올리는 것은노자와 사장에게서 우리에게 부족한 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다.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는 생전에 『경영을 잘못한다는 것은 바로 범죄행위나 다름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장이 문을 닫고 조업을 단축하거나 중단하게 되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취업의 기회를 빼앗고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노자와 야마이치증권 사장은 경영자로서는 실패했다. 그러나 지도자로서는 실패하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직원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호소하는 책임감을 끝까지 보였기 때문이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가 「경영을 잘못한다는 것은 범죄행위」라고말할 때 가진 책임감을 노자와 사장도 뼈저리게 느끼고 반성하고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리더십의 덕목이기도 하다.어려울 때일수록 사람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한다.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휘어잡아 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면서 위기를 타개할수 있는 「영웅」을 요구한다. 지난해 유난히 정계 재계 문화계를통틀어 박정희 신드롬이 불었던 것도 위기상황에서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대중의 은근한 욕구가 현실로 드러난 결과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과연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건국이래 최대 경제위기라는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십이 단순히 강력한카리스마인지는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우리에게넘치는 것은 강력한 카리스마고 부족한 것은 아랫사람을 다독이는솔선수범이 아닌지 하는 점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기 극복의모범 사례로 꼽히는 미국 크라이슬러 자동차의 리 아이아코카 회장과 로버트 이튼 회장은 우리에게 좋은 시사점을 준다.리 아이아코카는 79년에 도산 위기에 몰린 크라이슬러의 회장자리에 취임, 크라이슬러를 화려하게 회생시킨 신화적인 인물이다. 아이아코카는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강한 리더십을 발휘, 뛰어난 로비력으로 정부의 지원을 얻어내는 한편 감량경영과 대대적인 경영합리화 조치를 밀어붙였다. 그는 먼저 자신의 연봉을 1달러로 묶어모범을 보인 뒤 종업원의 임금도 일률적으로 10% 인하했다. 35명의부사장 중 33명을 해임하고 근로자도 8천5백명을 해고했다. 이런감량경영의 결과로 크라이슬러는 84년에 23억8천만달러의 대규모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른바 아이아코카의 신화를 이룬 것이다.◆ 아이아코카, 감량경영·경영합리화 추진아이아코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87년에는 당시 미국내 4위 자동차회사인 아메리칸 모터사를 인수, 미국 자동차업계의 빅3체제를구축했다. 그러나 80년대말부터 아이아코카 체제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무리한 사업 확장과 투자 실패, 일본 자동차업체의 공략등으로 매출이 급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아이아코카는 92년에두 손 들고 화려한 전적을 뒤로 한채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했다.아이아코카의 뒤를 이어 회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 바로 현재의 로버트 이튼 회장이다. 혹자는 오늘날의 경쟁력있는 크라이슬러를 만든 공은 아이아코카보다도 이튼에게 돌려야 한다고까지 말한다.아이아코카와 이튼은 둘 다 크라이슬러를 회생시켰다는 공통점을가지고 있지만 실제 경영 스타일은 전혀 다르다고 평가된다. 아이아코카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특징으로 한다면 이튼은 팀워크를 강조한다. 아이아코카가 이튼보다 내부의 적이 훨씬 많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이아코카는 또 외부에 나서서 자신을 오뚜기같은 경영인으로 내세우길 즐겼지만 이튼은 전면에 나서는 것을꺼린다. 안에서 조직을 챙기는 스타일이다.LG경제연구원의 정일재 이사는 아이아코카와 이튼을 이렇게 비교한다. 『아이아코카와 같은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추종자를 모아 힘을결집하기에 유리하다.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는 빛을 발하기 쉽다.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울 때일수록 이렇게 강한 지도자를 원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몰라도 지금과 같은 불확실한 시대에는 한 사람이 큰 조직을 전적으로 이끌기는 힘들다. 단 한번의 판단 실패로도 조직 전체가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깨닫고 있지 못하다 뿐이지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카리스마적인 1인 경영자 체제에 익숙해져 있다. 오히려 예측이 불가능한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는 이튼처럼 팀워크와 공동체 의식을 강조,조직의 힘을 강화할 수 있는 화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이튼 스스로도 자신을 「팀워크」를 강조하는 팀리더라고 평가한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나는 참여주의식 경영을 선호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튼회장은 결속을 통해 밑으로부터의 자발적참여만을 유도한 것이 아니라 경영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플랫폼 팀」이라는 새로운 생산방식을 도입, 자동차 생산기간을24개월로 단축시켰다. 이는 기존 기간의 절반에 해당하는 획기적인속도다. 플랫폼 팀은 엔지니어 디자이너 부품업체 생산자 등이 차량의 기본 설계부터 제작 과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작업에 동시에참여,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튼회장은 「나를 따르라」는 식의 강한 리더십보다는 「밑에서부터 스스로」 일을 하게 하는 합리적인리더십의 소유자인 셈이다.아이아코카와 이튼이 경영 스타일에서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공유하고 있다. 솔선수범이다. 회사가 어려울 때 스스로 자신의 연봉부터 1달러로 삭감했던아이아코카나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고 회사와 팀워크를 앞세우는 이튼은 모두 솔선수범의 모범들이다.아직 경영능력이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11월초 거의 몰락 위기에 몰린 기아그룹의 사령탑에 오른 진념회장도 솔선수범하는 리더로 꼽을 수 있다. 그는 취임 인터뷰에서 『경영이 정상화될 때까지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밝혔다. 먼저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최고 경영자가 고통분담을 먼저 실천하는데 일반 직원들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진념회장은 노동부장관 시절에 기아노조에강경했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기아 노조는 진념체제로의 변화에 별다른 거부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먼저 어려움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믿음을 봤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기아가 어려워진 것은 노사의 공동책임』이라며 『경영진과 노조가 모두 이기는「윈-윈(Win-win)」전략으로 회사의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진념회장의 말에 힘이 실렸던 것이다.◆ P&G 존 페퍼 회장은 ‘덕장’「팸퍼스」기저귀로 유명한 세계 최대의 생활용품업체인 P&G(Procter & Gamble)의 존 페퍼 회장도 인화를 존중하면서 부하직원들을보듬어안는 「덕장」스타일이다. 존 페퍼회장과 바로 밑의 덕 야거사장은 P&G의 대대적인 「수술」을 주도했던 에드윈 아르츠트 회장이 물러나면서 동시에 「차기」물망에 거론됐던 경쟁자 관계였다.결국 존 페퍼가 95년 7월에 P&G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에 올랐고 같은 때 야거는 사장이 됐다. 야거는 전임 회장처럼 강한 리더십을 내세워 부하들을 내몰고 이끌어가는 맹장의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페퍼가 회장이 됐지만 그는 경쟁자 관계였던 야거가 사장이 되는데 반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적극적으로 포용했다. 회사 안팎에서는 두 사람의 경영스타일이 달라 P&G의 경영혁신을 위한 노력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우려했다. 그러나 페퍼회장은 권한이양에 인색하지 않았고 조직을 인화로 이끌면서 주변의 우려들을 말끔히 씻어냈다.95년 3월에 13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상무에서 일약 사장자리에 올랐던 일본 소니의 이데이 노부유키 사장도 카리스마적인 인물은 아니다. 지난 60년 샐러리맨으로 입사, 35년만에 세계적인 기업의 톱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사장 자리에 오를 당시에는 「창업 50년만에 맞은 최대위기를 극복하기에 무언가 부족한 인물이 아닌가」하는 주변의 평가도 들었다. 그러나 이데이 사장은 위기에 빠진 소니를 수습하면서 2년만에 위기경영 관리자의 모범 사례 대열에 들게됐다. 그의 사업능력도 탁월했지만 그보다는 열린마음과 풍부한 유머, 합리적인 의사결정으로 조직에 사기를 불어넣은 것이 주효했다고 할수 있다.구조조정의 귀재인 GE의 잭 웰치회장은 한 때 「중성자탄」이란 별명을 얻었다. 너무나 과감하게 회사를 매각하고 감원을 추진했기때문이다. 그러나 무자비한 구조조정과 감원 과정을 거친 후 잭 웰치가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이 「조직 끌어안기」였다. 직원들 스스로 경영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바텀 업(Bottom-up)」방식으로 직원들의 사기를 올리고 조직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했다. 「핵폭탄」처럼 과감한 「잘라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처 보듬기」도 함께 실천했던 셈이다.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도 직원들의 「마음을 끌어안는리더」로 꼽을 수 있다. 타워스 페린의 박광서 한국지사장은 빌 게이츠와 만났을 때 느낀 인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솔직히 빌게이츠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사람이 사업수완이 뛰어난 인물이라고만 생각했지 뛰어난 리더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구원중에 체스에 푹 빠진 사람이 있어서 그 연구원이 체스를 즐기면서연구를 할 수 있도록 체스 코치를 채용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역시 세계 최고의 기업을 이끄는 최고경영자는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앞 뒤 사정을 모르긴 하지만 체스를 좋아하는 연구원에게 체스 코치까지 붙여줬다면 그 연구원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빌 게이츠로서는 그 연구원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면서 좋은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면 체스 코치를 채용하는데 드는 비용은아무 것도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기업은 곧 인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어려울 때 과감한 추진력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통찰력과사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추진력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이 봐왔다. 경영혁신의 모범 사례에서 우리가 제일먼저 보는 것은 언제나 「과감한 개혁조치로 사업구조를 조정하고감원을 통해 감량경영을 실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사업과 조직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야마이치증권의 노자와 사장같이 책임을 지는 솔선수범이 없다면 그 기업에 남아있는 직원들이그 기업의 비전을 믿을 것인가. 어려울 때일수록 사람 마음을 보듬어 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21세기를 바로 앞에 둔 과학의 시대에서 개혁이 성공을 거두려면 그러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갖춰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뛰어난 리더들이 보여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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