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이공계 전문직들 '뜨고 싶다'

H종금사에 근무하고 있는 김영호(가명·34)대리는 요즘 틈만 나면캐나다 관련 서적을 읽는데 몰두한다. 주로 현지 사정을 알 수 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캐나다와 관련된 책은 닥치는 대로 서점에서 골라 사다 읽는다. 김대리가 갑자기 캐나다 연구에 빠진데는 분명하고도 당연한 이유가 있다. 그곳으로 이민을 갈 결심을 했기 때문. 그는 이미 지난 2월초 이민알선업체에 이민수속을 정식으로 신청해 놓았다. 현재는 인터넷 등을 통해 현지에서 취직할 일자리를 찾고 있다. 일단은 금융기관을 물색중이다. 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제조업체에도 이력서를 낼 계획이다. 물론 회사엔 아직 비밀이다. 최종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다.이민신청이 받아들여져 출국일자를 잡고 나면 그때 가서 사표를 내고 알릴 생각이다.◆ 이민 나이대 낮아지고 있다이민 절차를 밟으면서 김대리의 부인도 덩달아 바빠졌다. 전업주부인 부인은 이민을 가면 그곳에서 맞벌이를 할 요량으로 오전엔 요리학원, 오후엔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다. 유치원생인 아들(6살)도이달부터 일주일에 세번씩 영어학원에 보내기 시작했다. 세식구 모두 캐나다 이민 준비에 본격 돌입한 셈이다.IMF이후 이민을 검토하고 있거나 결심한 사람들중엔 김대리 처럼30대의 젊은 직장인들이 의외로 많다. 과거 이민자들의 절반 이상이 40대 이상의 중년층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그만큼 이민가는사람들의 나이대가 낮아지고 있는 것. 실제로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 대한 이민수속을 대행해 주고 있는 온누리이주공사엔 하루에도 5건 안팎의 이민 상담자가 찾아오는데 이중 3~4건이 30대직장인들이다. 하루 10건 정도씩의 상담을 해주고 있는 현대이주공사의 이민컨설턴트 린다윤씨는 『상담건수 기준으로 올들어 이민희망자가 40% 이상 늘었다』면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30대의 젊은고학력자들이 몰리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추세를 반영해 각 이민알선업체들이 여는 이민설명회엔 평균 50~1백명 정도의사람들이 참여하는데 이중 70% 정도가 넥타이를 맨 30대 샐러리맨들이다.『예전엔 한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40대들이 자녀 유학이나사업을 위해 투자이민을 가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30대가 눈에 띌 정도로 늘었다. 이들은 대개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다.영어에도 자신이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한국에서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샐러리맨들이다. 최근 경제상황이 불안해지고 미래가 불투명해지면서 이들이 기회를 외국에서 찾아 보겠다고 나서는것이다. 게다가 자녀들이 어릴 때 이민을 가야 외국에서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점도 적잖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유연희 신세계이주공사 컨설팅 실장) 그래서 과거엔 2억~3억원 이상씩을 들고나갈 수 있는 40대의 투자이민이 주류였지만 이젠 나이가 젊어지면서 기껏해야 수천만원에서 1억원 안팎의 돈을 쥐고 나가 현지에서취직을 하려는 독립이민이 대세라는 것.이런 독립이민 희망자의 경우 컴퓨터 프로그래머나 전기·전자 엔지니어 등 이공계 전문직 직장인들이 두드러지게 많다는 것도 특징이다. 분명한 전문기술을 갖고 있는 이들이야 말로 외국기업에 취업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으로 보인다. 작년 12월 캐나다 이민을 신청해 현재 구체적인 수속절차를 밟고 있는 이정호씨(가명·35)의 경우가 그렇다.◆ 고급인력 유출 우려도이씨는 현재 모 대기업 전산실에 근무하고 있는 컴퓨터 엔지니어.그는 지난해 대기업들이 잇달아 부도로 쓰러지고 주변의 선배들이 직장을 잃는 것을 목격한 뒤 이민 결심을 굳혔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직장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에 회사를 떠나는 선배들의뒷모습이 마치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결단을 내렸다.『대학졸업후 8년동안 야근을 밥먹듯 하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고자부합니다.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3년만에 대리로 승진도 했습니다. 한데 별로 보람을 못 느끼겠어요. 오히려 3살 5살 난 두딸과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하면서 일만 해왔는데 결국 저에게 다가온 현실은 실직공포와 감봉이었으니까요. 차라리 이번 기회에 외국으로이민 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다행히 부인도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도 그게 낫겠다』며 적극 찬성해 이씨는 쉽게 결정을 내렸다. 그는 현재 캐나다 이민을 추진중인데 몇몇 현지회사엔 이미 입사희망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내놓은상태다. 이씨는 일단 취직만 되면 이민을 떠난 후 나중에 MBA(경영학 석사)과정에도 도전해볼 꿈을 키우고 있다.흥미로운 건 이민을 추진하는 사람들중엔 사업에 실패했거나 직장을 잃어 절박한 상황에서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가려는 사람들은거의 없다는 점. 일반의 예상과 거리가 있는 대목이다. 『이민 상담을 하는 사람중에 실직자는 거의 없다. 대부분 현재 직장을 갖고있는 사람들이다. 보통 실직을 당한 사람들은 아직 이민을 고려할정도로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 게다가 실업자는 이민국으로부터 기피대상이어서 사실 이민수속이 쉽지도 않긴 하다.』(안영운온누리이주공사 사장)이런 경향 때문에 일부에선 IMF한파로 국내 고급인력만 해외로 빠져나가는게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지난 70년대 한국의 엘리트들이 미국 유학을 갔다가 현지에 주저앉아 두뇌유출이 문제가 됐던상황과 비교하는 사람도 있다.어쨌든 한국경제 전반을 뒤바꿔 놓고 있는 IMF바람이 이젠 이민 풍속도마저 변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인터뷰 / 박필서 신세계 이주공사 사장▶ 이민희망자가 언제부터 늘기 시작했나.지난해 하반기, 구체적으로는 환란위기가 불거지면서부터다. 특히올해 들어서는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가 겹치면서 이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 같다.▶ 이들이 가장 고심하는 대목은 무엇인가.역시 요즘은 환율문제다. 환율이 급등해 원화가치가 절반 가까이떨어지면서 크게 고민하는 모습들을 볼수 있다.▶ 이민 적령기가 따로 있는가.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각 나라가 이민여부를 판정할 때 나이를많이 따진다. 대개 20대 초반에서 30대초반의 사람들에게 후한 점수를 준다. 반면 50살이 넘으면 거의 0점에 가깝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민알선 업체를 이용했다가 피해를 보는 사례도 있다던데.부끄럽지만 현실이다.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고개를 들수가 없다.▶ 부실업체를 가리는 방법은 없나.여러 군데를 돌아다녀보고 상담한 후 결정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꼼꼼히 살펴보면 누구든 어렵지 않게 가려낼 수 있다.▶ 정신적인 자세도 중요할텐데.물론이다. 일단 뭐든지 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그런다음 현지에 가서는 욕심과 즐긴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외국은우리와 생활문화가 다르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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