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사선 맨몸으로 넘은 '또순이'

울 스웨터 생산업체인 유럽피안 함서경사장(40)은 창업이후 지금까지 「사선」을 세번이나 넘었다. 삶과 죽음이라는 생물학적인 사선이 아니다. 다름아닌 기업경영의 사선인 부도위기를 세차례 맞았다.그러나 그는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 여전히 경영일선을 누비고있다. 사선을 돌파한 비밀병기는 없었다. 맨몸이 무기였다. 결혼도하지 않았다. 육탄전을 펼친 셈이다. 그래서 여성경제계에서는 함사장을 「또순이 사장」으로 부른다.함사장이 사업전선에 뛰어든 것은 86년. 여고를 졸업한 뒤 강원도강릉에서 야외결혼식등 이벤트성사업에 손을 댔던 그는 단돈 5백만원을 갖고 이해 봄 무작정 상경,명동 사보이호텔 1층에 보세상품가게를 차렸다.「리즈 클레이번」「리미티드」등 해외유명브랜드의 수출재고상품을 사들여 창고식으로 걸어놓고 장사를 시작했다. 이들 보세상품은일본관광객 및 국내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장사를 시작한지7개월만에 돈방석에 앉았다. 당시 서울강남 중형급 아파트 한채값은 5천여만원이었는데 그는 아파트 두채값에 해당하는 1억여원을버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여기서 힘을 얻은 그는 사업영역을 넒혀나갔다. 사보이호텔 가게를처분하고 함스통상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보따리장사에서 벗어나어엿한 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수출재고 보세상품을 구입,판매한데 이어 「함스」라는 자체브랜드상품도 개발했다.순탄하게 나가던 사업이 첫 위기를 맞은 것은 88년. 올림픽특수가의류업종에도 나타날줄 알았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임금인상으로의류수출은 가격경쟁력을 잃어 주문이 급감했다.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의류업체에서 생산량을 대대적으로 줄여재고상품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함스로서는 팔 물건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여기서 함사장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등 동남아지역에서 팔다 남은 해외유명 브랜드 의류재고품을 수입, 위기를넘겼다.◆ 보따리장사에서 어엿한 사업가로그러나 이것은 여진에 불과했다. 91년 대지진이 터지고 말았다. 무역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어 현금송금방식으로 수입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것이 문제를 일으켰다. 싱가포르 수출업자가 4억원정도를 송금받고 물건을 보내주지 않고 사라져 버렸던 것.함사장은 이 한건의 국제사기로 그동안 번 돈을 몽땅 날렸다. 함사장은 『죽고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며 그러나 그대로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기에는 너무 억울했다고 회고한다.고향친구로부터 5백여만원을 빌려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동안 수입을 하면서 알게된 그곳 수출업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조지 알마니」 「구치」 「밀랴숀」등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있던 물건들을 컨테이너에 실은 뒤 결제는 나중에 할수 있느냐고 의사를 타진했다. 기대하지 않았으나 이탈리아거래선은 쉽게 이를 승낙했다. 그동안 거래과정에서 신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이를 통해 큰 고비는 넘겼다. 그러나 불행의 끝은 아니었다. 「해외유명브랜드 재고상품 비즈니스」는 한계가 있어 유럽에서 원단을수입, 국내 의류업체에 판매하는 원단수입판매로 사업방향을 돌렸다. 상호도 유럽피안으로 바꾸었다.원단수입판매는 그런대로 순항을 했다. 그러던중 97년 11월 IMF구제금융사태가 발생했다. 날벼락 그자체였다. 당시 함사장은 은행으로부터 4억원 정도를 빌려 원단을 수입해 놓고 있었는데 졸지에IMF사태가 터져 4억여원의 환차손까지 입었다.부도를 내느냐,마느냐는 결정만이 남아 있을 뿐 더 이상 해결책은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신용이 이로인해 한꺼번에 무너지게 할수 없다고 판단, 거래은행을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적금을 해약해 마련한 1억5천만원과 거래기업으로부터 받은 어음을몽땅 내놓고 할인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가 97년 12월. 당시어음은 휴지조각에 불과했으나 은행측은 함사장의 신용을 믿고 혼쾌히 응해줘 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다.다시 무일푼상태가 된 함사장은 올 1월 친하게 지내던 한 홍콩 거래선의 도움으로 자금을 마련, 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미쑈니라는 브랜드로 울 스웨터를 생산해 케이블TV 홈쇼핑채널을 통해판매,월 3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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