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는 맞을수록 더 강해집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것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신념이 있었고 그 신념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신념이 저를 지탱해주는 의지였던 셈이지요. 라는 러시아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 제목대로 쇠는 맞을수록 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살아온 길이 꼭 그랬습니다.』주강현씨(43)는 민속학과 북한 생활사, 해양문화 등의 분야에서 「알아주는」 학자이자 를 비롯해 16권의 책을 쓴 인기 작가이다. 경희대에서 「한국 민속학」과 「민속미술 사상사」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한국 역사민속학회 이사이자재단법인 해양문화재단 이사, 경실련 산하 단체인 통일협의회 사회문화분과 정책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여러 가지 직위를 줄줄이 달고 있는 사회적 「명사」인 셈이다. 명예 뿐만이 아니라 불혹의 나이에 「돈」도 얻었다. 96년에 발간한 란 책이 20만권 이상 팔려 인세로만 2억원 이상을 벌었다. 이를제외하더라도 인세와 강의료 등을 합해 연간 6천∼7천만원 정도의소득은 올리고 있다고 말한다.그러나 「화려한 오늘」 뒤에는 「배고픈 어제」가 있었다. 보증금1백만원에 월세 3만원하는 단칸방에 살면서 이리 저리 아는 사람집을 전전하며 밥을 얻어 먹던, 그런 때가 있었다. 이런 「궁핍」의 나날은 한달이나 두달, 혹은 일년이나 이년으로 끝나지 않았다.10년 이상 「가난」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 가난을 고생이라고는생각하지 않는다.◆ 한계 만나면 돌아가는 것도 방법주씨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 출신이다. 74년에 경희대 국문학과에 입학한 이후 87년 6.29 선언 때까지 「현장」을 지키며 「운동」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81년에는 라는 진보적인 희곡을써 무대에 올렸고 84년부터 3년간은 서울 구로공단의 노동자 문화공간 「살림」에서 활동했다. 운동을 하던 10여년 세월은 평탄치않았다. 80년에는 학교에서 제적당했고 10여년 이상의 세월을 경찰과 가난에 쫓겨 다녀야 했으며 잡혀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운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에 대해 주씨는 「농민의 아들이기 때문」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대답한다. 70, 80년대의 시대적 상황이 운동을 요구했고 사회적 모순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농민의 아들로서 이운동을 외면할 수 없었다는 설명이다. 힘든 세월이었지만 「개혁이필요하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그 10여년 「운동 인생」이 꼭 고생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87년에 「현장」을 떠난 것은 『지식인으로서 이제는 방향을 전환할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식인으로 현장에서 활동할 때는 지났고 전문성을 갖춰야 할 때라는 판단이 섰다는것이다. 이런 결정에 따라 이듬해 경희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에 들어가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94년에는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를하면서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어떻게든 먹고는 사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의 신념이 무엇이고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한 의지가 어느 정도로 강한가 하는 것이죠. 저라고 좌절한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당장 안된다고 그 일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단 물러서되 결코 꺾이지는 않았습니다.』당장 불가능한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가슴에 묻어 뒀다 장기적으로이뤄냈다고 한다. 『스스로의 한계와 장점을 파악, 직선으로 갈수없는 길이면 돌아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는 설명이다.가난했을 때 가난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듯 돈을 좀 벌었다고해서 특별히 더 행복해졌다거나 생활이 화려해지지는 않았다. 주씨는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옷 한벌이 2만원』이라며 옛날이나지금이나 먹고 입고 사는 것은 비슷하다고 말한다.『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필요 이상의 돈은 투자해야 합니다. 연구와 학문 등에 대한 투자 뿐만이 아니라 사회 환원까지도 고려해야 한다는게 제 생각입니다.』주씨는 이런 신념에 따라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을 민속학 연구에투자하고 있다. 앞으로 사재를 털어 민속문화관을 건립해야 겠다는생각도 가지고 있다. 주씨는 『우리나라 경제의 문제는 돈의 많고적음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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