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은 싫어 "왜? 패가망신하니까"

H그룹계열 광고대행사 김모사장(52)은 요즘 「귀가전쟁」을 치르고있다. 작전개시 시각은 밤 10시에서 11시 사이. 특별징후가 감지될땐 이보다 늦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귀가를 아예 포기한다.김사장은 우선 귀가에 앞서 집주변의「야간정찰」부터 실시한다.「적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채 귀가하다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애써 쌓은 공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김사장이 이처럼 올빼미가 된데는 그만한 사정이 있다. 그가 샐러리맨의 꽃이라 할수 있는 사장자리에 오른 것은 지난해 1월. 다른계열사 사장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회사채무에 대한 연대보증을섰다.IMF사태가 터진 뒤 문제가 발생했다. 그룹이 자금난에 봉착하면서김사장 또한 불안한 나날이 계속됐다. 그룹이 부도가 날 경우 20여년 동안 고생하며 모은 8억원 상당의 재산이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민 끝에 부인과 합의이혼한 뒤 모든 재산을 부인명의로 바꾸었다. 일종의 위장이혼을 한 셈이다. 그리고 난 뒤 그룹은 결국 부도가 났다.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채권 확보에 나선 주거래은행이 김사장의 이혼에 대해 의심을 품고 나섰고 퇴근무렵이면 감시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이 때문에 그는 올빼미처럼 심야 퇴근전쟁을 하게 됐다.심야퇴근전쟁도 몇번 은행권에 감지돼 최근에는 이마저도 여의치못한 형편이다. 김사장은 휴대전화로 접선장소를 정한 뒤 부인을만나 아이들 교육문제와 집안살림을 챙기고 있다. 현대판 「견우와직녀」가 바로 김사장부부인 셈이다. 김사장은 그래도 유비무환형에 속한다. 미처 회사부도를 감지하지못해 재산을 몽땅 날린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문경영인도 있다.H그룹계열 종합상사 유모(56)사장이 가장 비극적인 케이스. S그룹계열 종합상사에 근무하다 지난해 H그룹으로 옮겼던 그는 그룹이부도가 난 뒤 지난 5월초 살고 있던 서울 여의도동 아파트에서 투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유사장을 잘 아는 재계인사들이 전한 자살 이유는 이렇다. 그룹이부도가 난 뒤 유사장은 다른 사장들처럼 큰 고민은 하지 않았다.자신의 명의로 된 재산은 별로 없고 부인명의로 된 재산이 많아 설사 은행이 채권회수에 나선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아서였다.그런데 은행이 부인명의로 된 10여억원의 재산에 대해서도 압류처분을 하고 나서자 유사장은 충격을 받았다. 은행은 이것도 모자라자녀들에 대한 상속권마저 포기할 것을 강요했다. 유사장은 은행의이같은 무차별적 채권회수에 충격을 받아 자살했다는 것이다.사실 대표이사 사장자리는 월급쟁이면 한번 오르고 싶은 정상이다.그러나 두 사례에서 보듯 IMF체제하의 대표이사사장자리는 이제 더이상 샐러리맨들이 오르고자 하는 정상이 아니다. 패가망신의 블랙홀일 뿐이다.이런 기현상은 IMF와 은행의 잘못된 보증관행 때문에 빚어지고 있다. 은행들은 기업에 대출해줄 때 담보를 요구하고 이것도 모자라대표이사사장 등 임원진에 대해서 연대보증을 요구한다.◆ 월급쟁이 사장 ‘책임만 많고 권한은 쥐꼬리’사실 이것은 오래된 관행으로 IMF상황이 도래하기 전에는 별문제가되지 않았다. 경기가 그런대로 좋은탓에 30대그룹 계열사일 경우에는 부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그러나 IMF한파가 본격화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은행권이 대출금회수에 나서고 고금리현상이 지속되면서 「부도무풍지대」는 사라져 버렸다.은행들은 담보물건으로도 모자라 연대보증을 선 대표이사 사장등월급쟁이 임원들에게까지 부채를 상환토록 하는 등 무차별적으로채권회수에 나섰다. 이로인해 월급쟁이 전문경영인들은 직장 잃은것도 서러운 판에 재산까지 날리고 있다.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부 그룹에서는 오너회장이 대표이사 사장자리를 주자 해당임원이 이를 거부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섬유업종이 주력인 H그룹에서였다. 이 그룹 오너회장은 올해초 인사를 단행하면서 세명의 임원을 대표이사 사장에 승진임명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놀랍게도 이를 거부했다. 그룹운명이 풍전등화인상태에서 연대보증을 선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인해 이들 중역은 해임됐다.IMF이후 연대보증 이외에 월급쟁이 사장 및 임원들을 고개숙이게하는 요인은 많다. 내수시장이 위축되면서 월급쟁이 사장자리는 책임은 무한하고 권한은 쥐꼬리만한 실정이다. D그룹 계열 한 중역은『정리해고를 단행할 때면 오너회장은 뒤로 빠지고 대부분 총대는월급쟁이 사장 몫』이라며 전문경영인은 영광이 아닌 빛좋은 개살구일 뿐이라고 심정을 토로했다.이 중역은 『현행 담보위주의 대출관행을 바꾸지 않고서는 전문경영인은 설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며 이에대한 대책 또한 금융개혁에 반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IMF는 한국경제 뿐만 나이라전문경영인체제까지 뒤흔들고 있다.★ 직장내 승진기피 현상『승진은 무슨 승진…. 살아남는게 중요하지』.올해초 직장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이다. 사실 그때만해도 직장인들은 이 말을 농담반 진담반식으로 했다.그러나 최근들어 이 말은 진담이 돼 버렸다. 봉급쟁이의 유일한 희망은 승진이라고 할수 있으나 이를 포기하고 살아남기에 급급해하고 있다. 기업들이 월급이 많은 고위직급부터 정리해고 대상으로삼고 나서자 나타난 기현상이다.모그룹 자동차회사에 다니는 신모과장(36)은 올해 차장승진연한이됐다. 그러나 그는 승진을 사실상 포기했다. 다른 해 같으면 인사담당임원에게 인사도 다니는등 분위기를 잡아야 하나 올해는 하지않기로 결심했다. 그저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고 있을 뿐이다.그렇다고 신과장의 승진에 결격사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차장승진에 필요한 영어시험도 합격했고 연한도 됐다. 신과장은 『연말이되면 또 한번의 정리해고가 예고돼 있는 마당에 승진은 의미가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승진로비를 하고 다니면 「찍히기」밖에 더하겠느냐고 반문했다.요즘 기업에서는 신과장같은 봉급쟁이들이 많다. 초고속 승진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정리해고 0순위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IMF시대 직장인들은 승진을 기피하고 있다.직장인들이 승진을 기피하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경기가 호황이면 모르지만 불황일 때는 직급이 높아져봤자 책임만이 클뿐 아무 이득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기업들은 IMF한파가 본격화되면서매출이 급감하자 고육지책으로 직원들에게 판매량을 할당하고 있는실정이다. 물론 이 판매할당량은 직급이 높을수록 많다. 판매목표를 달성하면 모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 돌아올 결과는 물어보나마나다. IMF라는 특수상황에 따른 봉급쟁이의 생존책이 승진기피로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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