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회사원...밤엔 학원수강생

국내 굴지의 대기업인 D사에 근무하고 있는 황모씨(31)는 요즘 직장을 옮기기 위해 사원모집 광고를 유심히 본다. 외국회사 여러 군데에 원서도 내놓고 있다. 물론 그동안 면접도 몇번 봤다. 재취업이 확정되는대로 지금 다니는 회사에는 사표를 낼 작정이다. 그렇다고 황씨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 무슨 큰 불만이라도 있는 것은 아니다. 정리해고 대상자로 분류될만큼 입지가 좁지도 않다. 회사 역시 IMF사태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시쳇말로 아주 잘 나간다. 어찌보면 그대로 있어도 당분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그러나 황씨의 생각은 다르다. 근무환경이 자유롭고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외국인 회사로 옮겨 공인회계사 시험에 도전해볼 작정이다. 4년여 동안 직장에 다니면서 직장인으로서 많은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들어 각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정리해고는 그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아무 힘도 쓰지못하고 무너져 가는 직장인들의 모습에서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비슷한 일이 닥칠지 모른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물론 이런 사례는 황씨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이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느냐의 문제만 남아있을 뿐이다. 최근 한 기관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조사대상 직장인의 약 80%가 독립할 생각이 있다고 대답한 것은 이런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한다. 직장인들사이에서 평생직장의 개념 자체가 급격하게 무너져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비상구를 찾는 직장인들이 관심을 갖는 분야는 어디일까. 또 그들은 어떤 식으로 자신들의 소망을 이루어가고 있을까.중견기업인 D전자에 다니고 있는 이모 과장(35)은 최근 창업컨설팅기관을 통해 상담을 받았다. 5천만원의 자본으로 창업할 수 있는것 가운데 전망이 좋은 것을 소개받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평생을다닐 곳이 아니라면 빨리 나와서 자리를 잡는 것이 더 나을 수도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특히 점포의 권리금이 바닥상태라 잘만 활용하면 오히려 지금이 기회가 될수도 있다는 점이 마음을 끈다. 이과장은 시간적인 여유를 갖고 차분히 검토한 다음 오는 10월쯤 의정부 쪽에 컴퓨터 관련 점포를 차릴 생각이다.지난해 이맘때쯤만 해도 창업 관련 강좌나 컨설팅기관을 찾는 직장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식적인 통계는 아니지만 전체의 20%를넘지 않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하지만 요즘은 사정이많이 달라졌다. 실직자들 뿐만 아니라 직장인들의 발길도 꾸준히이어지고 있다. 이경희 창업전략연구소장은 전체적으로 창업희망자가 지난해에 비해 2배 가량 는 것으로 분석된다며 직장인들 역시비슷한 비율로 늘었다고 말했다. 양혜숙 여성창업대학원장 역시 요즘은 나이와 직업 유무를 가리지 않고 창업대열에 뛰어드는 추세라며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 가운데는 남들이 부러워 할만한 대기업에다니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설명했다.앞서 말한 D사의 황모씨처럼 전문 자격증에 도전하는 직장인들도느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자격증이 있으면 신분이 보장되는데다정년도 없다는 점 때문에 젊은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지원자가 몰리고 있다. 지난 4월말 한 회계학원이 개최한 미국공인회계사 공개설명회에서도 이런 상황이 그대로 연출됐다. 이날 설명회에 참가한1천여명 가운데 대학생과 실직자 등을 뺀 순수한 직장인만 3백명이넘을 정도로 화이트칼라들의 관심이 높았다.각종 자격증 관련 학원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최근 인기를 모으고있는 주택관리사나 물류관리사 등의 자격증 관련 강좌를 마련해놓고 있는 학원들의 경우 직장인 수강생이 지난해에 비해 2배 가량늘어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또 해외자격증 가운데 인기가 급부상하고 있는 미국 공인회계사나 선물거래사의 자격증 취득을 도와주는 학원들도 직장인 수강생의 대거 출현에 싫지 않은 표정이다.민진희 국제회계학원장은 직장인 수강생이 IMF 사태 이후 2배 이상늘었다며 이는 평생직장의 개념이 깨진데서 연유하는 것 같다고 풀이했다. 국제회계학원은 얼마전 시간이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직장인들의 편의를 돕기 위해 야간강좌 4개를 추가로 개설하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전선에도 직장인 몰려창업을 하거나 자격증에 도전하는 직장인들은 어찌 보면 행복하다고 할수 있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으로 비쳐지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회사 사정상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지금당장 먹고 살길이 막막한 사람들은 회사 근무를 마친 다음 다시 아르바이트 전선에 나선다. 구로공단내 중소기업인 S실업에 다니는김모씨는 올해초부터 월급이 부정기적으로 나와 애를 태우다 퇴근후 갈비집에서 숯불을 갈아주는 일을 시작했다. 부인이 너무 무리를 한다며 극구 말렸지만 당분간만이라도 가계에 보탬을 주기 위해하루에 2번 출근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밤일」 근무시간은7시~10시까지로 육체적으로 힘든 감이 있지만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을 생각해 참고 견딘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버는 돈은 한달에60만원으로 적자에 허덕이는 가정살림을 지탱하는데 큰몫을 한다.직장인들이 할수 있는 아르바이트 업종은 무궁무진하다. 최근 PC통신 천리안은 요즘 잘 나가는 직장인 아르바이트 업종 1백54개를 소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시간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는 별로 없을 것 같다. 회사에 다니면서 짬짬이 하는 일이라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제약은 받지만 퇴근 이후 시간을 잘만 활용하면 문제없다는것이 경험자들의 지적이다. 잡지사 사진기자로 일하는 이모씨 역시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광고용 카탈로그의 사진을 찍는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매일 나가지는 않는다. 충무로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부르는데 일주일에 보통 2~3차례씩 나간다.수입 역시 일정하지 않다. 일이 많을 때는 1백만원을 넘기도 하지만 적을 때는 50만원이 채 안된다.하지만 직장인들의 아르바이트 외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도적지 않다. 내일을 위해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회사 일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직장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근무 시간중에 피로를 호소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몸담고 있는 직장에 대한 애사심역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최근 들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민은 직장인들에게 또 다른 탈출구다. 번듯한 직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민을 떠나겠다며 이민대행업체에 모여든다. 특히 IMF 사태 이후 희망자가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박태서 신세계이주공사 대표는 이민희망자가 하루평균 40~50명씩 찾아온다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5배가량 늘어난 것으로 이 가운데 대략 절반은 현재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했다.그런데 여기에는 한가지 특징적인 점이 있다. 과거의 이민자들이자녀 교육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던 것에 비해 요즘은 취업에 많은비중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로여건이 악화된 국내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은 외국에 나가 직장을 구한 다음 현지에서 살겠다는 얘기다. 이럴 경우 자녀들의 교육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이민희망자들의 주장이다.또 하나 이민희망자들의 나이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수 없다. 특히 최근에는 아예 30대 초반의 대리급 가운데도 이민자행렬에 합류하려는 사람들이 적잖다. 이들은 대부분 일단 이민을간 다음 현지에서 공부를 하거나 취업을 원하는 사람들로 언젠가는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희망한다. 굳이 지금 이민을 가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좀더 젊은 나이에 체험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3월부터 이민을 준비중인 L화재 정모 대리는 캐나다에 건너가 일단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라며 학비와 생활비는 부인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해 충당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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