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죄는 명퇴 ... '2세계획'도 연기

대기업 계열 K전자에 다니는 김모대리(33)는 최근 국수 다이어트를시작했다. 얼마 전에 신체검사를 했는데 키에 비해 몸무게가 좀 많이 나가는데다 지방간이 의심된다는 말을 들었다. 뭐 그 정도야 직장 생활 8년 경력의 샐러리맨에게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라고그다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김대리로 하여금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관리부서 직원인 듯이 보이는 사람이 『당신, 이번엔 봐주지만 계속 이러면 다음엔 자를거야』라는 말을 던졌다. 평소 같으면 농담이겠거니 하고 웃으며넘겼겠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가슴이 철렁했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외모상으로 뚱뚱해 보이지 않는 몸집이라 태어나서 한번도 자신이 다이어트를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누구는 고기만 먹는 황제 다이어트를 한다는데 저같이 언제 쫓겨날지도 모르는 샐러리맨이 그런 비싼 다이어트를 할수 있나요. 집사람이 냉면하고 모밀국수만 먹으면 살이 빠진다길래 주로 국수 종류만 먹고 있습니다』.김대리는 스스로 「지방간이 좀 있다고 자르지는 않겠지」하고 생각을 하면서도 요즘 회사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든다.최근 지방 공장에서는 출근시간 5분 전에 관리부 직원들이 회사 출입문에 나가 지각하는 직원들의 사진을 찍어 사내 통신망에 올리기도 했다. 『사람은 잘라야 하는데 누구를 잘라야 하는지 특별한 기준이 없으니까 해고자 명단 작성을 위해 증거를 수집하는 것 같다』는게 김대리의 한숨 섞인 고백이다. 「근무 기강 확립」이라는명목으로 샐러리맨들의 「살을 떨리게 만드는 사건」들이 하루에도다반사로 일어난다는 설명이다.『봄에 있었던 1차 구조조정 때 이미 전체 직원의 15%가 명예퇴직당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거죠. 앞으로 2차, 3차 정리해고가 계속 있을 거라는 소문이에요. 하루에도몇번씩 언제 몇명을 자른다더라, 어떤 사업부는 아예 없앤다더라하는 흉흉한 소문이 떠돕니다. 어쨌든 회사의 방침은 현재 직원의50∼60%만 남기고 다 정리하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합니다.』인원은 줄었는데 충원이 안되다 보니 업무는 배 이상 늘었다. 김대리도 밤 10시 이전에 퇴근해본지 오래됐다. 보통이 밤 11시, 늦으면 새벽 1시반이 퇴근 시간이다. 지난해 연말 보너스를 받지 않은것 외에 아직 월급이 깎이진 않았지만 앞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씀씀이도 대폭 줄였다고 한다. 『담배 사고 늦게 퇴근할 때 택시 타는 것 외에는 거의 개인적으로 쓰는 돈이 없다』고 김대리는말한다. 일은 늘고 생활은 더 빡빡해지고 마음은 항상 긴장의 연속이다. 그 중에서도 김대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이 고난이 끝이아니라 「현재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지난 봄에 있었던 명예퇴직도 말만 명예퇴직이었지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이 작성돼서 내려왔습니다. 떠도는 말이 거기에 이름이올라 있는 사람들은 언제라도 정리해고될 사람이니까 명예퇴직해줄때 기분 좋게 그만 두라는 식이더군요. 우리 부서에서도 두명이 명단에 올라서 결국 그만뒀습니다. 앞으로 그런 일이 두번은 더 있을거라고 하는데 제가 그 과정을 모두 다 거치고 이 회사에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지난 봄, 명예퇴직자 명단이 작성된다는 소문이 떠도는 동안 김대리는 거의 한달간 밤잠을 설치며 담배만 피워댔다고 한다. 다행히김대리는 정리해고 대상자 명단에서 빠졌지만 자신도 언제 정리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계속되고 있다.김대리는 또 『결혼한지 1년이 넘어 이제 2세를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미래가 점점 더 불안해지다 보니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는다. 중소기업에 다니고있는 부인의 위치도 최근들어 불안하기 짝이 없다. 『요즘 직장 다니는 여자가 임신한다는 것은 회사쪽에 스스로 그만두겠다고 사직서 쓰는 꼴이나 똑같다』는게 김대리의 설명. 부인이 다니는 회사는 그나마 명예퇴직이고 하는 것도 없이 일주일에 평균 23명씩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퇴직시킨다고 한다. IMF전에 1천3백명이 넘던직원들이 현재는 8백명으로 줄었을 정도다. 하루 하루가 그야말로살얼음을 걷는 것 같다는게 김대리 부부의 요즘 심경.『회사 전무가 봄에 정리해고 당하고 친구가 하는 중소기업 고문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 전무의 업무가 우리 회사를 거래처로 뚫는거예요. 그 전무님, 우리 회사 있을 때는 사장 직속으로 하늘 같은사람이었는데 요즘 저보고 「김대리님, 잘 좀 봐주세요」라고 그래요. 세상이 참 허무하더라구요.』며칠째 야근을 해서 초췌해진 모습의 김대리가 씁쓸한 표정으로 던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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