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 우선한 미국의 '전략적 도박'

최근의 엔저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미국과 일본 경제의 실력 차이가 그대로 반영된 당연한 귀결이란 의견이 있는가 하면 유럽의 통화블록과 아시아경제 부상에 대한 미국의 견제라는 음모론까지 설이 분분하다. 게다가 가파른 엔 추락에 대해 미국과 일본이한때 팔짱만 끼고 있던 것과 관련, 두 나라가 자국의 실리를 위해뭔가 바터(주고 받기)를 했을 거라는 암묵적 결탁설까지 나오고 있다.어쨌든 환율은 그 나라 경제력의 잣대라는 경제학 교과서에 충실하자면 최근의 달러고-엔저는 미국과 일본의 경제성장률 격차로 쉽게설명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국 경제는 사상 유례없는 8년간의 장기호황을 구가하고 있다.지난해에도 연간 3.8%의 경제성장을 달성했고 올들어 3월까지1/4분기 성장률은 4.2%에 달했다. 반면 일본 경제는 90년대초 버블붕괴후 복합불황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97회계연도(97년4월∼98년3월) 경제성장률은 전후 최악인 마이너스0.7%를 기록했다. 특히 금년 1월부터 3월까지 한분기 동안의 성장률은 마이너스 5.3%로 급락, 깊게 파인 불황의 골을 반영했다.미국과 일본간의 금리 차이도 엔저를 부채질하는 요인이다. 일본의10년만기 정부채 금리는 현재 1.2% 수준. 경기침체 장기화로 금리가 지속적으로 떨어지면서 거의 바닥에 다다랐다. 이에 반해 미국의 10년만기 국채(TB) 금리는 5.5% 정도로 일본보다 4.3% 포인트나높다. 이 격차는 작년말 4% 포인트에서 계속 벌어지고 있다.돈은 금리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 일본내 자금이빠져나와 미국으로 몰리는 이유다. 달러고-엔저가 나타날 수밖에없다는 얘기다.물론 이는 밖으로 나타난 지표만을 놓고 따진 원론적 분석이다. 그러나 최근의 엔저를 이렇게 교과서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이라는게 전문가들의 지적. 역사적으로도 엔/달러 환율은시장논리 이외에 미국의 정치 경제적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그런만큼 미국의 전략적인 의도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 이번에도 그런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미국이 엔하락을 방치한 것은 물론 부추기기까지 했다는게 그렇다.미국 재무장관 루빈은 『달러당 1백50엔까지 엔화 약세를 용인할수도 있다』고 지난 5월25일 발언해 달러당 1백35엔대에 머물던 엔화 가치의 추락을 촉발시켰다.지난 6월11일엔 『엔화 약세는 전적으로 일본경제의 취약성에서 비롯된만큼 해법은 일본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말해 엔화를 달러당1백44엔 밑으로 끌어 내렸다. 마치 엔저를 유도하기 위해 짜여진시나리오대로 입을 놀리고 있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유로 출범 견제심리도 작용그렇다면 미국은 왜 엔저를 용인하고 있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미국의 이익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우선 과열조짐을 보이고 있는경기를 연착륙시키는데 엔저는 유효하다. 엔저에 따른 아시아 경기의 침체 덕에 미국은 과열경기를 진정시킬 수 있고 아시아 통화약세로 수입물가가 떨어져 물가를 계속 안정시킬 수 있는게 사실이다. 엔저에 따른 대일역조 확대는 완전고용 재정흑자 내수증가라는세마리 토끼를 잡은 미국에 그리 큰 부담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에서 유출된 자금이 미국으로 몰려 붕괴위기의 미국 증시에 안전판구실을 해주는 효과가 크다.또 내년 1월 출범하는 유럽 단일통화 「유로(EURO)」에 대한 미국의 견제심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엔저에 따른 강한 달러는 세계 유일의 기축통화로서 그 기반을 더욱 공공히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에 급격히 부상하고 있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화경제권에 대한 사전 억제설도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중국과 동남아 화교자본을 바탕으로 한 아시아의 비상을 미리 억제하기 위해 미국이 일본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 일종의 외곽 때리기인 셈이다.한편 일본도 최근의 엔저에 대해 적극적인 방어보다는 소극적인 대응에 그쳤다는 점에서 구설수에 오른다. 일본이 엔저를 방치하는데는 수출을 늘려 경제를 회복시키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게 대체적인 시각이다.또 엔저에 따른 아시아 경제의 위기감을 등에 업고 「엔 블록」과같은 엔화의 국제화를 추진하려는 속셈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와관련, 일부에선 미국과 일본이 자국의 실리 차원에서 「엔저」와「엔의 국제화」를 서로 용인하는 묵시적 거래를 한 것이 아니냐는추측도 한다.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숨은 의도 여부를 떠나 분명한 건 엔화의 추락이 세계경제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 금융계의 투기꾼인 조지 소로스마저 급격한 엔화 하락이 세계경제를 침몰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미국과 일본 정부가 달러당 1백50엔 직전에서 엔 추락방지를 위해공동개입한 것도 그런 사태의 심각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미-일간 환율공방 역사엔화와 달러화의 가치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줄다리기는 그 역사가 30년 가까이 됐다. 브레튼우즈 체제로 대변되는 고정환율제도가붕괴된 지난 70년대초 이후 미국과 일본은 엔/달러 환율의 수준을놓고 끊임없이 공방을 벌여왔다. 통화가치는 그 나라의 수출경쟁력과 국익에 직결돼 있어 힘겨루기는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가히 「총성없는 전쟁」이었다. 물론 그것은 현대 국제경제사의 큰 줄기를관통하고 있다.70년대 이후 미일간 환율전쟁의 주된 테마는 엔화의 가치를 어떻게끌어 올리느냐였다. 경제의 기초체력에 비해 낮게 평가된 엔화가치덕분에 일본은 무역흑자를 늘려 갔고 미국은 이를 견제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95년부터는공방의 초점이 엔화를 어떻게 끌어 내리느냐로 옮아갔다. 최근엔특히 미국 금융자본의 이해가 중시되면서 엔 약세가 미일간 핵심이슈로 부상했다.엔화는 지난 71년까지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서 IMF(국제통화기금)가 정해준 달러당 3백6엔으로 고정돼 있었다. 그러다가 71년12월16.88%나 한꺼번에 평가절상됐다. 일본의 경상 흑자가 늘어나자미국 등 선진 10개국이 대폭적인 엔화 평가절상을 요구했던 것. 소위 스미소니언 합의였다. 이후에도 엔화의 평가절상 압력은 계속됐다. 일본은 73년2월엔 달러당 2백73.10엔으로 환율을 내리고 아예고정환율제도를 폐지했다. 74년 제1차 오일쇼크의 충격으로 3백엔밑으로 떨어졌던 엔화는 미국경제의 디플레이션으로 다시 강세 기조를 지속했다. 78년7월엔 2백엔선을 넘어섰고 그해 10월31일에는1백75.50엔까지 올랐다. 그러나 2차 오일쇼크(78년12월)와 미국의 달러화 방위조치(80년4월)로 82년10월에는 2백74.70엔으로 급락하기도 했다.이같은 엔저는 일본의 무역수지 흑자를 눈덩이처럼 불려 놓았다.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가만히 놔둘리 없었다. 선진 5개국 재무장관들은 85년9월 미국 뉴욕의 플라자호텔에 모여 엔화를 평가절상키로 합의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플라자 합의다. 엔화는 여지없이 강세로 돌아섰고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지난 88년11월1백21.15엔까지 올랐고 걸프전 등으로 1백40엔 부근을 맴돌던 엔화는 94년6월 드디어 1백엔을 돌파했다. 95년4월 멕시코 통화위기 당시엔 79.85엔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일본경제의 거품이 붕괴돼 그후유증이 확산되면서 95년12월부터 엔화는 다시 1백엔을 밑돌기 시작했다. 마침 미국 경제가 호황을 거듭해 달러화 가치는 치솟았고이는 엔화약세를 재촉했다. 엔화는 작년 12월에 1백30엔, 올 4월엔1백35엔으로 떨어졌고 최근엔 1백50엔을 위협했다.엔화의 최근 약세는 실물경제 측면 이외에 금융적 요인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일본은 경기부진으로 고전하는 지금도 미국을 상대로엄청난 무역흑자를 내고 있다. 반면 달러가 초강세를 보이고 있는미국은 무역적자가 사상최대 수준이다. 실물경제의 방향과 통화가치가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역시 엔/달러 환율에미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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