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업이 죽어간다

금이 국내에서는 천덕꾸러기다. 금비즈니스는중세의 연금술사들처럼 일확천금을 꿈꾸기는커녕 우리 사회에서 가장 경쟁력이 떨어지는 분야로 손꼽히고 있다. 장사치들은 아예 밀수꾼 취급을 받고 있고 잦은 세무조사는 금산업 전체의 활력을 빼앗고 있다.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건너편의 진양상가. 한때 60여개의 점포가입주, 전문 귀금속상가로 성가를 높이던 이곳에는 요즘 찬바람이쌩쌩 분다. 20여개의 점포가 문을 닫았고 나머지 입점업체들도 극심한 불황에 몸살을 앓고 있다. 귀금속 진열대는 예전의 찬란함을잃어버린 채 손님들의 발길을 돌려세우지 못하고있다.4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 종로 4가의 예지동 귀금속상가 역시 마찬가지 사정이다. 『우리는 서서히 망해가고 있다. 지금으로서는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다.』(M사 대표)는 푸념처럼 예지동상가는 완연히 풀이 죽은 모습이다. 매출이 예년의 절반수준으로 꺾이고 그나마 마진폭도 5% 아래로 주저앉아 버렸다.(밀수금을 사용하는 점포들의 경우 마진폭은 이보다 더 클 수도 있다.) 인근 종로통의 「우수사」 「금석」 「변씨공방」처럼 금장신구 수출을 통해활로를 개척하는 점포들도 없지않지만 절대다수의 점포들은 임대료도 제대로 못낼 지경이다. 『전국적으로 30%의 점포들이 문을 닫은것으로 추산된다. 이대로 가다간 조만간 폐점비율이 50%를 넘어설것』(H사 대표)이라는 단언을 통해 이들의 위기의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귀금속 점포 30% 문닫아외환위기이후 피해를 입지않은 업종이 없다고는 하지만 귀금속업계는 그 정도가 심하다. 워낙 영세한 기반속에서 IMF사태를 맞았기때문이다.사실 금산업만큼 베일에 가려있는 업종도 드물다. 국내 공급 및 유통경로는 물론 전체 규모까지도 오리무중이다. LG금속은 97년 기준으로 국내 금의 유통물량을 1백20t으로 추정했다. 금도매상 및 제조업체의 하루 금소요량과 실제영업일을 기준으로 산출한 숫자다.그러나 세계금평의회(WGC)와 영국의 「Gold Fields MineralServices Ltd」의 계산은 1백t이하로 나왔다. 한국귀금속판매업 중앙회의 얘기는 또 다르다. 연 1백t에서 1백50t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처럼 의견이 엇갈리는 이유는 국내에서 상당규모의 금이 무자료거래를 통해 유통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국내 광산에서 채취하거나 제련업체를 통해 생산된 금외에 밀수등 음성적인 경로를 통해조달되는 금이 많다는 뜻이다. 밀수금은 일명 「나카마」로 불리는태국 홍콩 등지의 공급책들로부터 반입되는데, 주로 해로를 이용하고 있다는 전언이다.금밀수가 암묵적으로 횡행하는 이유는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이다.정상적으로 해외에서 금을 들여올 경우 수입업자는 관세 3%와 부가가치세 10%등 모두 13%의 세금을 물어야한다. 따라서 밀수금은 세금만큼의 가격경쟁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밀수금은 처음부터 무자료거래로 들어왔기에 가공 및 유통단계에서도 지하에서 거래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 소비자들에게 최종적으로 팔 때도 세금계산서가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세금을 물지 않는다. 『전국 귀금속점포가운데 최소 50%이상이 무자료거래를 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고백도 들리고 있다.지난 9월 국민회의 김민석의원 주최로 서울에서 열린 「금 부과세제도 개선을 위한 공청회」에서 강동세무서의 박인근계장은 『현재금시장 전체는 거대한 음성거래와 탈세의 무대가 되어있다』면서『연간 1천5백억원 가량의 세금이 새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 경우 피해를 보는측은 정상적으로 세금을 물고 들여온 금을 취급하는업자들이다. 처음부터 가격격차가 벌어진 상태에서 밀수 금제품을상대하다보면 좀처럼 영세성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세무당국의 조사라도 한번 받으면 세무서가 자체적으로 인정하는 마진율(도매 3∼4%, 소매 10∼20%)에 따라 무거운 세금을 추징당하게된다. 단순히 사치성 소비재라는 이유로 물리는 세금이 반사회적인범죄를 야기하고, 나아가 금산업 전체의 활력을 죽이고 있는 셈이다.이런 구조속에서 지난 75년, 전북 이리에 조성된 귀금속 보석가공수출단지는 거의 제 역할을 하지못하고 있다. 과다한 경쟁에 따른기술수준의 낙후, 국제시장에 대한 정보부족등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80년대이후 종로상가를 중심으로 발전해온 내수시장도90년대들어 답보상태를 유지한지 오래다.물론 귀금속업계 자체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밀수금이 만연한 탓이라고는 하지만 업계 전체가 만성적인 도덕불감증에 빠져있는 것이 사실이다. 당국의 불신을 불식시키기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세법망을 피하는데 열중했다는게 당국의 시각이다. 자체 정화운동이라도 활발하게 벌어졌더라면 입지도 한결 나아졌을 것이다.정부와 국민들을 상대로 한 홍보 노력도 부족했다. 자신들의 주장대로 금의 가치는 영원하고(대외결제수단으로서), 또 고용 및 수출효과도 높다면 금산업의 경제적효과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를적극적으로 알렸어야 한다는 지적이다.그러나 이같은 비판을 받아들이면서도 귀금속 업계는 금이 사치성소비재라는 시각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금은 장신구뿐만 아니라 공업용으로도 널리 쓰인다는 주장이다. 국내의 경우 반도체 칩을 비롯한 PC와 TV의 전자부품용이 총 수요의 12.5%에 달하고 있다. 또 수출용 귀금속, 도금용, 기념주화 및 메달등 소장용,치과등 의료용으로도 쓰임새가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귀금속산업은 고부가가치의 무공해산업』(서울산업대학교 오원택교수)이라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금산업, 고용유발 효과 높아귀금속산업의 효과는 고용확대 측면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고도의세공기술이 요구되는 노동집약적 산업인 만큼 높은 고용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기계화가 어려운 반면 정신집중과 섬세한 손재간을 요하는 수공업적 특성을 갖고있기 때문에 장애인등의 고용을최대화할 수있다는 지적이다.그러나 금산업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오해」는 유별난 편이다.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대외결제수단으로 보유하고 있는 금은 10t에도 못미친다. 미국측이 무려 8천t을 보유하고있는 것을 감안하면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나라는 외환위기가 닥치자 일반 국민들을 상대로 「금모으기 운동」을 벌이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한국은행의 전고위관계자는 『금모으기 운동에서도 드러났듯이 금은 대외결제의 유력한 수단이다. 그러나 과거 역대 한은총재들에게 금보유량을 늘리자는 건의를 해봤지만 아무도 귀담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한은내에 전문가가 없는 탓이기도 했지만 금보유를 왠지 꺼려했다』고 털어놨다. 중장기적으로 국제금시세가안정돼 있고 선물을 통한 손쉬운 헤지수단도 있는데 한은이 다른중앙은행들과 달리 금을 멀리한 것은 순전히 「무지」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사정이 이렇다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은행에 금을 맡기면 외국처럼소정의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관료를 내야한다. 대출시 담보로도 활용되지 않는다.금이 이처럼 「냉대」를 받는 나라에서 어찌 금산업의 부흥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인터뷰 / 세공업체 '보석사랑' 김문수 사장금 세공업체 「보석사랑」 김문수(31`)사장은 지난 89년 영국 버밍엄에서 열린 제30회 기능올림픽에 출전, 금은세공 분야에서 금메달을 딴 인물이다. 굳이 금메달리스트란 사실을 부각시키지 않더라도열다섯살 때부터 익힌 그의 고급기술은 자타가 인정하고 있다.그는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자신같은 고급기술인력이 쓸모가 없다고 푸념한다. 『지금 이런 여건으로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기술인력들이 마치 죄인처럼 음지를 떠도는 상황에서 무슨 비전이 있겠는가.』푼푼이 모은 돈으로 지난 94년에 개인사업체를 차린 김사장은 변하지 않는 업계의 풍토에 넌덜머리를 친다.국내에서 유통되는 상당량의 금이 밀수를 통해 조달되고, 그에따라자주 행해지는 세무조사는 업계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한다. 도·소매업자는 무자료 거래를 일삼고 기술인력들은 간판도 없는 허름한 사무실에서 조악한 작업에 매달려야 한다. 이것이 싫으면 해외에 나가 품을 팔아야한다. 『힘들여 인력을 양성해봤자 남좋은 일만 시킬 뿐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금세공인력은 상당수가일본으로 빠져나가 있다. 그것도 경력 10년이상의 유능한 인력들이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자체 금생산이 거의 없는 일본은 한국기술자 2천여명을 채용할 정도로 금가공산업이 발전해있다. 세명의기술자에게 공임료를 주고나면 자신에게 떨어지는 돈은 월1백∼1백50만원. 개인 금방에서 월급쟁이로 일할 때보다 훨씬 낮은보수다.『현실에 맞게 세법이 개정돼야 하는데도 조세당국은 수십년째 방관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것은 거의 직무유기에 가깝다.』 김사장은 정부를 강도높게 비판한다. 오늘날 이처럼 금산업이 낙후된 배경에는 정부의 잘못된 정책적 판단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전용공단을 지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다른 정책적 보조를 바라는것도 아니다. 금을 사치소비재가 아니라 원자재로 봐달라는 것 뿐이다.』그는 『장기적인 측면에서 경제발전으로 소득수준이 늘어나게 되면금수요도 필연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며 『그때 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국내수요를 수입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김사장은 역대 금은 세공분야의 기능올림픽 입상자들간 친목단체의총무를 맡고 있다. 금메달리스트 10명을 포함해 모두 15명이 회원들이다. 서울과 지방에 흩어져 있지만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다.그러나 그런 만남이 썩 즐겁지만은 않다. 『만날 때마다 서로 지쳐가는 모습을 볼 때면 이 업종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는 그의 표정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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