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히 도전해야 기회잡는다"

『과감히 도전하는 자만이 새로운 기회를 붙잡을 수 있습니다.』크레딧 스위스 퍼스트 보스톤(CSFB)은행의 서울지점장,이성진씨(40)는 가까운 후배들에게 늘 이런 조언을 해준다고 한다.『비록 자신이 캄캄한 바닷가나 황량한 벌판에 서있다는 느낌이 들지라도 절대로 겁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점장의 직장 이력은 다채롭다 못해 화려하다. 지난 84년 첫 직장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를 시작으로 대신증권 제일은행 등을거쳐 지금은 CSFB에 안착해 있다.그러나 이지점장의 잦은 이직은 나름대로 치밀한 전략적 사고에서비롯됐다. 그는 고려대 영문과를 나왔다.졸업무렵 그는 최고의 국제금융전문가를 꿈꾸며 BOA 서울지점을 노크했다. 『2년만 다닌 뒤유학을 간다는 목표를 세우고 준비를 했습니다.』이지점장은 실제로 만 2년째 되던 86년9월에 사표를 던지고 유학길에 올랐다. 일하는 재미나 국내은행보다 높은 급여를 생각하면 아쉬움도 많았지만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미련없이 돌아섰다고 한다. 89년4월 미국 UCLA에서 MBA과정을 마친 이지점장은 증권회사를 지망했다. 당시 우리나라의 증시는 수십년간 축적된 고도성장의 효과가 일거에 만개하고 있었다. 그는 월세 1천달러짜리 허름한 아파트에서 당시 국내 5대 증권사 사장 앞으로 정성어린 편지를썼다. 자신의 경력과 장래 포부를 소상히 밝힌 「자천서」였다.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대신증권의 양재봉 사장(현재 대신그룹회장)이 흔쾌히 입사를 허락한 것. 대신증권 국제부에 둥지를 튼이지점장은 국내 유수의 상장기업들을 끼고 로드쇼를 벌였다.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전환사채 신주인수권부채권 주식예탁증서 등의 해외발행 업무를 담당하면서 실력도 부쩍 향상됐다. 그러던 차에91년6월 제일은행으로부터 스카웃제의를 받게 된다. 『최고의 은행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에 미련없이 옮겼습니다. 대신증권이 싫었다기 보다는 제일은행에 워낙 마음이 끌렸습니다.』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오판이었다. 이지점장과 제일은행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중은행의 풍토가 자신에게 맞지 않았던 것이다.93년6월, 이지점장은 마침내 보따리를 쌌다. 행선지는 CSFB의 아시아본부가 있는 홍콩. 답답한 은행업무에 넌덜머리를 낼 즈음,CSFB측으로부터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두려웠습니다. 오도가도 못하고 국제미아가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지점장이 CSFB에서 맡은 첫 업무는한국담당 채권딜링.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적막한 홍콩 도심의 빌딩가에서 약육강식의 생존게임에 몸서리를 쳤다고 한다. 뉴욕과 런던금융시장의 시황들이 유령처럼 모니터를 깜박이며 떠돌던 밤에도그는 철저히 혼자였다. 『힘들 때마다 저를 잡아준 것은 젊은 날스스로에게 다짐한 약속이었습니다.』98년4월, 이지점장은 5년만에 서울로 돌아온다. 각고의 노력 끝에직급은 두단계를 뛰어 디렉터가 됐다. 그는 98년6월 서울지점장에앉자마자 굵직한 사업을 성사시켰다. 작년 10월 외자유치를 위한정부합동투자설명회의 주간사를 맡게 된 것이다.『지금껏 약속의 절반은 지켰다고 생각한다』는 이지점장의 입매에는 이제 나머지 절반을 이루기 위한 각오가 새롭게 서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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